나루의 휴가 (7)
구석진 복도. 나루는 규연의 집요한 시선을 이리저리 피하며 딴청을 피웠다. 혼낼 때마다 먼 산을 바라보는 습관은 여전히 고쳐지지 않고 있었다.
“저 학생들이 너를 왜 알고 있는지, 왜 그딴 이상한 호칭으로 불러대는지, 설명해.”
“…나도 모르는데.”
규연은 나루의 두 어깨를 단단히 붙잡은 채 직설적인 질문을 던졌다. 질투심에 가득 찬 눈이 어찌나 살벌하던지, 나루는 필사적으로 모르는 척해야만 했다. 모른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니 규연의 미간이 보기 좋게 찌푸려졌다.
1차 비상. 삐용삐용. 나루의 머릿속에 다시 한번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곧 있으면 규연이가 진짜로 화날지도 몰라. 그렇지만, 나도 내가 어쩌다 강아지 오빠가 됐는지 모르는데. 갑자기 억울하네, 막…….
우물쭈물하며 입술을 오물거리던 나루가 대답하려다 말고 눈썹을 축 늘어뜨렸다. 그러자, 규연이 나루의 볼을 꾸욱, 눌러 잡고 대답을 재촉했다.
“왜 그런 표정이야. 뭐가 억울해.”
“나도 몰라. 나는 그렇게 불러달라고 한 적 없는데! 그냥, 어, 맞아. 쓰레기 버리려고 나갔다가 우연히 마주쳐서, 자주 인사한 것뿐이란 말이야….”
나루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모두 사실이긴 했다. 다만, 가장 중요한 말들이 쏙쏙 빠져 있었다. 쓰레기를 버리려고 나갔다가, 겸사겸사 건혁이 근처에 얼쩡거리지 않는지 감시를 철저히 했고, 담장 너머로 고개를 내밀 때마다 학생들과 마주쳐서 인사를 한 것. 그래, 팩트는 이거였다. 하지만 규연은 나루가 뱉은 말을 그대로 믿는 눈치였다. 말이 제법 그럴싸해서였을까.
“모르는 사람이랑 인사를 왜 해.”
“그냥, 먼저 인사를 하니까.”
“…앞으로 하지 마. 아니, 아예 쓰레기 버리러 나오지를 마. 뒷문에서 서성거리는 거 보이기만 해.”
“쓰레기 버리는 건 내 일인데…!”
그래, 쓰레기 버리고, 도건혁을 감시하는 게 내 일인데!
속마음으로 진심을 외친 나루가 입술을 오리처럼 삐죽 내밀었다. 그러나, 규연은 나루를 봐줄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단단히 경고를 남긴 규연은 나루의 볼을 은근하게 꼬집어 주고 쿨하게 뒤돌아섰다.
덥석.
이렇게 상황이 끝나는 줄로만 알았는데. 나루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규연의 옷 끄트머리를 황급히 잡아챘다. 비장한 얼굴로 규연을 붙잡아 놓고서 한다는 소리는….
“내가 쓰레기 버리러 안 나가고, 얌전히 있으면 상 줘?”
“무슨 상.”
“잘했다고 주는 상.”
“뭘 원하는데. 일단 들어보고.”
얌전히 있는 것에 대한 보상. 나루는 야무지게 제 실속을 챙겼다. 애인에게 이런 행동을 하는 게 썩 좋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바라는 걸 이루려고 미끼를 한번 던져나 보는 거였다. 주변 눈치를 살피던 나루는 발꿈치를 들어 규연의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풀빌라 가서 나랑 사랑해 줘.”
“떨어져.”
“매일 조르는데도 안 해 주고. 유규연 얼음이야. 나 유규연 애인인데. 강아지 아니고 애인인데!”
나루가 이렇게까지 조르는데도 규연은 냉정한 태도를 유지하며 절대 꺾여 주지 않았다. 평소에는 호구 소리를 들을 만큼 나루에게 무른 그였지만, 이럴 때는 또 누구보다 신중했다. 끈질기게 풀빌라에서의 섹스를 졸라대던 나루는 끓어오르는 오기에 이를 갈았다.
놀러 가면 규연이가 나랑 꼭 사랑하고 싶게 만들어야지. 반드시 그러고 말 거야. 규연이는 결국엔 내 말 다 들어주니까. 응.
규연의 반응에 익숙해진 나루는 이제 아무렇지 않다는 듯 표정을 갈무리하고 카운터로 돌아갔다.
“나루 씨, 포장 상자가 다 떨어졌는데 확인 좀 해 줄래요?”
“네, 잠시만요!”
일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늘 머릿속이 텅 비었다. 당장 해야 할 일에만 집중하느라 풀빌라고, 도건혁이고, 다 생각나지 않았다.
그렇게 오후 늦은 시간까지 가게 안을 열심히 돌아다니다 보면, 어느샌가 한가해지는 때가 찾아왔다.
직원들은 이때를 노려 한숨 돌리거나, 사람들이 몰려와 정신없어진 홀과 주방을 정리하곤 했다.
“어휴, 오늘 쓰레기 왜 이렇게 많아? 이것 좀 버리고 올게요.”
“어, 그, 그거! 제가 버릴게요!”
“진짜? 요즘 나루 씨가 다 버렸잖아. 내가 버리고 와도 되는데.”
“아니에요. 제가 하고 싶어서 그래요!”
앞치마를 고쳐 매던 나루가 ‘쓰레기’라는 말에 반응하며 팔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러자, 쓰레기봉투를 꾹꾹 눌러가며 정리하던 서연이 손을 휘휘 저었다.
하지만 고집 센 나루를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 끝까지 제가 하겠다며 손을 들어 보이자, 서연이 어쩔 수 없이 나서서 쓰레기봉투를 묶어 주고 나루에게 건넸다.
드디어 도건혁 감시 시간이구나!
오늘도 제 몫의 일을 마칠 수 있다는 생각에 들뜬 나루는 쓰레기를 버리러 가지 말라던 규연의 경고를 무시한 채 뒷문을 당당히 열어젖혔다.
덜컹!
제 몸만 한 쓰레기봉투를 낑낑거리며 들고나온 나루는 쓰레기장에 그것을 던져 버리고, 홀가분하게 손을 털었다. 그리고 다음으로 한 일은? 여느 때와 같았다.
쿵, 코코콩!
“어, 오늘은 빨간색 차다.”
규연이 새로 뽑은 스포츠카 위를 서슴없이 밟고 올라간 나루가 태연하게 중얼거렸다. 나루의 눈에는 그저 색깔이 빨갛고 모양이 날렵하니 신기한 차였지만, 이 차는 무려 출시된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유명 브랜드의 신형 모델이었다. 게다가 해당 브랜드의 라인업 상에서도 가장 특별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새롭게 뽑힌 모델이라 극찬을 받고 있었다.
그래, 그런 스포츠카인데…….
쿵, 쿵!
운동화 신은 발이 잘 빠진 보닛 위를 잘도 쿵쿵 밟아대고 있었다. 나루는 익숙하게 담장 위로 얼굴을 쏙, 내밀고 골목길을 샅샅이 훑어보았다. 열린 뒷문 사이로 규연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줄도 모르고.
“내가 쓰레기 버리러 가지 말라고 분명 경고했는데, 저게 또.”
약 1분 전. 쓰레기봉투를 들고 쫄랑쫄랑 사라지는 나루의 뒷모습을 발견한 규연은 잽싸게 그 뒤를 쫓았다. 곧바로 그 앙증맞은 몸을 잡아 오려던 규연은 쓰레기를 버리고도 수상한 행동을 하는 나루를 가만히 두고 지켜보았다.
잠시 후, 규연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돌아올 줄 알았던 나루가 대뜸 자신의 차를 당당하게 밟고 올라갔기 때문이다.
“쟤 지금, 내 차 밟고 뭐 하냐…?”
황당함에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규연은 나루의 몸이 휘청일 때마다 인상을 찌푸리며 발을 움찔거렸다. 당찬 나루는 넘어질 거 같으면 허리를 숙여 중심을 잡다가, 끝내 담장 위로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저기서 대체 뭘 하고 서 있는 거야?
팔짱을 낀 규연이 한숨을 내쉬며 나루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했다.
한편, 나루는 담장 너머를 열심히 경계하는 중이었다. 오늘따라 영 느낌이 좋지 않은 게, 등이 서늘하기도 했다.
부스럭.
“어?”
나루의 직감은 틀리는 법이 없었다. 무언가 느낌이 이상하다, 했더니 곧바로 담장 아래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킁. 킁킁. 쫑긋!
나루는 강아지의 특성을 살려 코를 킁킁거리고, 귀도 더 쫑긋 세우며 인기척에 집중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골목길에는 사람이 없는데, 이게 어디서 느껴지는 인기척일까.
한참 고민하던 나루는 규연의 차 위에서 쿵, 하고 발돋움을 한 뒤 담장 너머로 점프해 올랐다. 그러고 나니 담장 끝에 딱 어깨선이 걸쳤다.
끄으응.
낑낑거리며 힘으로 버티던 나루는 몸이 떨어지기 전에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흐아아악!”
“와아악, 씨발!”
하나, 둘, 셋.
느릿한 정적이 지난 후, 두 남자의 비명이 동시에 튀어나왔다. 하나는 나루의 비명이었고, 다른 하나는….
“너, 너!”
건혁. 도건혁이었다.
삿대질하는 나루의 손끝을 따라가니 동태 눈깔을 뜬 건혁이 숨을 가삐 내쉬고 있었다. 나루는 건혁을 잽싸게 훑어보다가 손을 벌벌 떨며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카, 칼이야. 누구를 찌르려고!”
“야, 입 안 닥쳐?”
“칼이야! 규연아! 건후야! 규연아! 규연아! 규연아!”
“저 미친 새끼가 진짜!”
건혁이 손에 들고 있는 건 다름 아닌 흉기였다. 자그마한 것도 아닌, 부엌에서 쓸 만한 칼. 아주 위험한 흉기였다. 거기다 피폐한 표정까지 어우러지니 흉악 범죄자가 따로 없었다. 나루는 한 손으로 112를 누르며 규연과 건후의 이름을 힘껏 외쳤다.
“송나루!”
“규, 규연아, 저기 너머에!”
마침 문 너머로 지켜보던 규연이 일찍이 상황이 위험하게 흘러가는 걸 깨닫고 달려왔다. 규연이 먼저 한 일은 담장 위에서 나루의 몸을 내리는 것이었다. 상대가 칼을 들었다고 하는데, 저렇게 무방비한 상태로 담장 밑을 내려다보고 있다니. 간댕이가 튀어나와도 제대로 튀어나온 행동이었다. 규연은 팔로 나루의 허리를 감싼 규연이 몸을 가볍게 들어 땅 위에 안전히 안착시켜 주었다. 그러나, 나루는 담장 너머에 있을 건혁이 도망가지 않을까 걱정하느라 바빴다. 급기야 발을 동동 굴러대자, 규연이 쌍욕을 중얼거리며 뜀박질을 시작했다.
“이 씨발, 이게 갑자기 무슨 일이야. 송나루, 너 여기서 가만히 기다려.”
“규연아, 다치면 안 돼!”
내가 씨발, 별일을 다 겪어 본다.
타다닥! 탁!
담장을 능숙하게 타고 올라간 규연이 맞은편으로 홀가분하게 넘어갔다. 나루는 그 모습을 보며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오, 규연이 대박이다. 아니, 이럴 때가 아니지.
상황이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나루의 외침에 기겁하며 달려 나온 건후는 무슨 일인지도 모른 채 식은땀을 뻘뻘 흘렸고, 서연은 그 옆에서 호들갑을 떠는 중이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나루는 건후에게 제 할 말만 남기고 규연의 뒤를 쫓았다.
“너희 형이, 여기 앞에서 칼을 들고 막, 아무튼 신고해! 나 규연이한테 가 봐야 해!”
“어? 뭐, 뭐? 형이? 칼을? 야, 잠깐만. 송나루, 상황 설명은 하고 가야 할 거 아니야! 야! 기다려 봐!”
사람들은 보통 이런 상황을 이렇게 표현하곤 한다.
개판이다. 개판이 따로 없다. 엉망진창. 뒤죽박죽. 얼렁뚱땅. 우당탕탕.
분명 심각한 상황인데, 나루가 엮이기만 하면 정신이 없었다. 건후가 나루에게서 건네받은 핸드폰으로 경찰에게 상황 설명을 하는 사이, 나루는 규연의 뒤를 열심히 쫓았다.
“허, 허억, 규연이, 어디, 있지?”
힘차게 뛰어 보았지만, 규연과 건혁은 그새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나루는 근처 골목길을 모조리 돌아보며 냄새를 맡았다. 규연 특유의 향은 매일 맡아서 익숙했기에, 냄새를 잘 쫓을 수 있었다.
“으응? 여기?”
킁. 킁킁.
그렇게 규연의 향을 따라 도착한 곳은 웬 구석진 주차장이었다. 폐빌라의 낡은 주차장. 정말 아무도 사용하지 않아 먼지가 가득 끼고, 쓰레기가 나뒹구는 곳이었다.
쾅!
아무리 봐도 규연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데, 여기에 있는 게 맞는 걸까. 나루가 의심하며 자리를 뜨려고 했을 때 즈음, 주차장 깊숙한 곳에서 큼지막한 소음이 새어 나왔다.
흠칫, 놀란 나루는 조심스레 주차장 가까이 다가가 벽 뒤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는 눈만 찔끔, 내밀어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확인해 보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