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루의 휴가 (6)
“저 오빠 뭐야?”
“몰라, 뭐지?”
저들끼리 눈빛을 주고받던 학생들이 입꼬리를 씰룩이며 서로 질문을 되받아쳤다. 그 와중에도 시선은 담벼락 위의 나루에게 집요하게 꽂혀 있었다.
잠깐의 정적 속, 나루는 울상을 지으며 다시 한번 사과의 말을 건넸다.
“죄송해요!”
이번에는 반말도 사용하지 않고, 정중하게 죄송하다는 말을 뱉었다. 목소리가 묘하게 발랄했지만, 무슨 상관인가. 뜻만 잘 전해지면 그만이었다.
사과를 들은 학생들도 나루처럼 생각한 걸까. 둘이 약속이라도 한 듯 고개를 힘차게 끄덕거렸다.
“괘, 괜찮아요!”
“맞아, 괜찮아요!”
사람은 누군가에게 호감을 느끼는 순간 얼굴에서부터 호의적인 감정이 적나라하게 느껴진다던데, 두 학생의 표정이 딱 그랬다. 멋쩍게 학생들과 마주하고 있던 나루는 눈인사를 보내고, 담벼락 아래로 쏙 내려와 버렸다. 순하고 귀여운 얼굴이 사라지자마자 학생들의 얼굴은 아쉬움으로 물들었다.
읏챠.
내려올 때도 마찬가지로 이불 빨래하듯 규연의 차를 짓밟은 나루가 땅에 무사히 착지했다. 그리고는 허리에 두 손을 올리고 자신만만한 포즈를 취했다. 끝이 조금 엉뚱하긴 했지만, 어쨌든 중요한 건 혼자 도건혁을 퇴치했다는 사실이었다.
나루가 자아도취에 빠져 있을 때, 누군가 이 분위기를 깨며 뒷문을 열었다. 그렇게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규연이었다. 한참이 지나도 카페로 돌아오지 않는 나루가 걱정됐던 건지, 눈썹이 조금 찌푸려져 있는 게 인상이 영 더러워 보였다.
“송나루, 땡땡이치지 말고 들어와.”
“내가 방금 무슨 대단한 일을 했는지도 모르면서.”
“무슨 대단한 일을 하셨는데?”
“…그건 비밀이야.”
규연은 나루를 향해 손을 까딱여 보였다. 거만한 태도에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짓던 나루는 괜히 한번 거드름을 피웠다. 물론, 규연에게 이 사실들을 솔직하게 말하면 혼난다는 걸 아주 잘 알았기에 끝까지 당당할 수는 없었다.
새침하게 대답한 나루는 규연을 지나쳐 카페 안으로 들어와 몸을 바삐 움직였다. 자꾸만 입이 근질거려서 억지로라도 일을 해야 할 것 같아서였다.
과연, 도건혁이 정말 내 경고를 알아듣고 이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을까. 혹시 모르니까 내가 매일 매일 감시해야지!
건혁을 한번 퇴치하고 나니 무언가의 정의감까지 들었다. 나루는 멀쩡히 일하고 있는 건후를 바라보며 저 혼자 어깨를 으쓱였다.
친구를 위해 이렇게 용감하게 행동하는 나. 정말 멋있어. TV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 같아.
“훗.”
거만한 태도에 의미심장한 웃음. 나루는 자신에게 제대로 취해 있었다.
아까까지 삐쳐 있더니, 그새 기분이 좋아졌네. 단순한 건 세계 최고다, 송나루.
뒤따라오며 나루를 관찰하던 규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까는 말도 걸지 말라며 고개를 휙 돌리더니, 이제는 뭐가 그리 좋은지 실실 웃기까지 하는 나루가 마냥 귀여운 모양이었다.
* * *
일주일 후.
나루에게는 새로운 루틴이 생겼다. 아침에 출근하면 직원들과 함께 오픈 준비를 마치고, 무조건 카페 뒤쪽으로 달려가 규연의 차를 쿵쿵 밟고 올라갔다. 그리고 담장 너머로 얼굴을 쏙, 내밀어 건혁이 근처에 어슬렁거리고 있는지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나루는 이 일이 매우 좋았다. 주변을 경계할 때면, 마치 늠름한 경비견이 된 거 같아 아주 보람찼기 때문이다.
“어? 강아지 오빠다.”
“어디, 어디? 어, 오늘도 보고 있네.”
“오빠, 안녕!”
그리고 또 하나의 소소한 재미가 있었다. 바로, 등교하는 학생들과 인사를 나누는 거였다.
학생들 사이에서 언젠가부터 유명해진 나루는 ‘강아지 오빠’로 불렸다. 담장 너머로 늘 얼굴을 빼꼼 내밀고 있는 게 강아지 같아서 붙여진 별명이었다. 무엇보다 이 별명이 생긴 데엔 나루의 생김새 덕이 컸다.
“오빠, 진짜 강아지 닮았어요. 너무 귀여워요!”
“어, 감사합니다.”
나는 강아지니까, 강아지를 닮는 게 당연한데.
멀뚱하게 눈을 깜빡이던 나루가 손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여기서 시간 버리면 학교에 지각할지도 모르니까 어서 가라는 신호였다. 이렇게 손을 흔들어 주면, 학생들은 아쉽다는 둥 중얼거리면서도 똑같이 인사를 해 줬다. 내일 또 보자는 말은 덤이었다.
이 동네의 인기 스타가 된 줄도 모르고 차에서 내려온 나루는 상쾌하게 두 손을 털며 뒷문을 열었다.
덜컹!
“여긴 왜 자꾸 드나들어.”
문을 열면 늘 규연이 나루를 반겼다. 밝은 표정보다는 주로 무언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한 뚱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이다. 나루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휘저으며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순수한 눈빛을 보냈다.
“나 아무것도 안 했어. 쓰레기 버렸어.”
“일주일 내내?”
“그래야 깨끗해.”
이제는 입만 열면 거짓말이 술술 나왔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게, 날이 가면 갈수록 거짓말하는 솜씨가 수준급으로 늘어갔다. 규연은 언제나 나루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갔다. 특유의 순수한 눈빛을 보낼 때면 품고 있던 의심도 홀린 것처럼 말끔히 사라지곤 했다.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한 나루는 중간중간 건후의 얼굴을 확인했다.
“흐음, 다 나았군.”
“뭐야?”
“여기 볼에 난 상처만 나으면 끝이다.”
“아, 이거? 열심히 약 바르고 있는데.”
건후는 며칠 내내 제 형을 피해 호텔을 돌며 생활했다. 규연이 돈을 넉넉히 챙겨 준 덕분에 편한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얼굴에 난 상처는 빠르게 아물었다. 약까지 열심히 발라 놓으니 하루가 다르게 상처가 옅어지는 걸 볼 수 있었다.
나루는 마지막 남은 상처를 매만지며 홀로 만족스러워했다. 상처가 나은 건, 모두 약의 효과가 좋았던 덕분일 텐데.
음, 내가 매일 철저하게 감시해서 상처가 빨리 낫고 있는 거야!
혼자만의 착각에 단단히 빠져 있었다.
“송나루, 그 손 떼라.”
“어, 규연아.”
“태평하게 내 이름 부를 때야?”
“왜?”
“내가 너 때문에 속이 터진다. 이리 와. 이게 툭하면 아무나 막 만지고 있어.”
계속해서 예의 주시하고 있었던 걸까. 규연은 나루와 건후가 붙어 있을 때마다 귀신같이 나타나 둘 사이를 떼어놓았다.
제 애인의 속을 다 터뜨려놓은 나루는 정작 자신이 뭘 잘못하고 있는지도 인지하지 못했다. 규연은 진심으로 답답했다. 고구마 천 개가 쌓인 마음에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오, 규연이 질투한다. 난 그냥 아무 감정 없이 궁금해서 본 것뿐인데. 규연이한테 정말 미안하지만… 난 규연이가 질투하는 게 너무 좋아. 나만 봐주는 느낌. 최고!
요즘 들어 심해진 규연의 질투에 나루는 꽤 만족스러워하고 있었다. 나루의 솔직한 심정을 규연이 들었더라면 극대노 했을지도 모른다.
“미안, 나 일부러 그런 거 아닌데. 나는 규연이만 좋아. 진짜로.”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한다.”
뜨끔.
겉으로나마 속상하고 미안한 척, 온갖 불쌍한 표정을 짓던 나루가 어깨를 움찔거렸다.
규연이가 날 너무 잘 알게 되어버렸어.
나루의 여우 같은 수법이 늘어갈수록 규연 또한 발전했다. 눈치가 얼마나 빠른지, 이제는 얼굴만 봐도 나루의 진짜 감정을 쉽게 알아내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루는 필살기를 사용했다.
“진짜라니까! 나 규연이 정말 정말로 좋아해. 사랑해.”
“…….”
“뽀뽀해도 돼?”
“…넌 어떻게,”
강아지가 아니라 점점 여우가 되어가는 것 같냐. 내 마음을 대놓고 쥐고 흔들어대네.
근데 그게 또 사랑스러워, 싫지가 않아. 이런 씨발…. 호구 새끼 다 됐다, 유규연.
깊은 한숨을 푸욱, 내쉰 규연이 직원들의 눈을 피해 나루의 입술에 짧게 키스하고 떨어졌다. 와중에 나루가 얄미워서 입술을 살짝 깨물어 주었다. 그러자, 나루가 아픈 신음을 내며 제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엄살은. 안 아픈 거 알아.”
“으응, 알아챘구나.”
“…….”
나루의 당당한 대답에 어처구니가 없어진 규연이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는 빨리 일이나 하라며 손을 휘저어 보였다.
총총거리며 카운터 앞으로 뛰어간 나루는 여느 때보다 더 열심히 일했다. 규연의 심기를 툭, 툭, 건드리고 난 후에는 꼭 이렇게 밉보이지 않으려고 일에 열중했다. 항상 말썽만 피우면 골치만 아프고 짜증 날 텐데, 나루는 완급 조절을 할 줄 알았다. 이게 바로 나루가 아무리 제멋대로 굴어도 짜증이 나지 않는 가장 큰 이유였다.
오후 세 시. 일이 한창 바빠질 시간이었다. 카운터에 선 나루는 몰려드는 손님을 응대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는 게 대단했다.
“삼만 오천 원입니다! 계산해 드릴게요. 쿠폰도 찍어 드릴까요?”
처음 왔을 때를 생각하면, 일하는 센스가 많이 늘어 있었다. 나루는 베테랑 직원이 되어 일을 야무지게 이어가는 중이었다.
“휴우.”
계산을 마친 나루는 한숨 돌릴 겸 통창 밖을 바라봤다.
이 시간대면 늘 중학생들이 하교하며 카페 앞을 우르르, 지나갔다. 오늘 역시 학교가 이 시간에 끝난 걸까. 무리 지은 학생들이 저들끼리 웃고 떠들며 카페 앞을 지나치고 있었다.
나도 저 나이에 학교에 다녔다면 좋았을 텐데.
나루가 속으로 씁쓸한 생각을 늘어놓을 때 즈음이었다. 마침 지나가던 학생 한 명이 통창 너머로 나루를 발견하고, 큰 소리를 내질렀다.
우와아악!
얼마나 크게 소리를 질렀으면, 가게 안까지 목소리가 다 들릴 정도였다. 덩달아 놀란 나루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왜 나를 보고 놀라는 거지. 기분이 이상했다.
저들끼리 소란스럽게 떠들던 학생들은 무언가 작정한 듯, 카페 안으로 당당히 들어왔다. 규연도 이 모든 장면을 목격한 건지 오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카페 데스티니입,”
“강아지 오빠다!”
“으음…….”
나루가 학습된 인사말을 내뱉자, 곧바로 우렁찬 목소리가 끼어들어 말을 끊었다. 강아지 오빠. 학생은 나루를 정확히 가리키며 익숙한 별명을 입 밖으로 꺼내었다.
규연은 도대체 저게 뭔 상황인지 의아해하며 학생들과 당황한 상태의 나루를 번갈아 쳐다봤다. 담장 너머로 늘 해맑게 인사해 주던 나루는 곤란하다는 듯 볼을 긁적이며 학생들의 눈을 피했다. 그리고는 자연스레 규연의 눈치를 살폈다.
큰일 났다. 내가 아침마다 하는 일을 규연이가 알게 되면 하지 말라고 할 게 분명한데. 나루는 학생들에게 제발 조용히 해 달라는 신호를 보내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하지만, 학생들은 나루의 간절한 신호를 마음대로 왜곡해 받아들였다.
“안녕하세요!”
“그, 그게 아닌데. 인사한 거 아닌데.”
“강아지 오빠 맞죠? 매일 담장에 있는 강아지 오빠!”
“어, 음.”
나는 인사를 한 게 아닌데! 뒤에서 규연이가 눈 번뜩이고 있는데! 어떡해!
삐용삐용. 나루의 속마음에 비상등이 켜졌다. 그러나, 학생들은 계속해서 폭탄을 터뜨려댔다. 결국, 나루는 자신이 ‘강아지 오빠’임을 인정하며 소심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학생들은 그제야 조용해지며 저들끼리 방방 뛰어댔다.
“우리 여기서 케이크 먹고 갈래?”
“그래, 그래!”
“강아지 오빠, 저희 치즈케이크 하나랑 딸기 스무디, 망고 스무디 주세요!”
나루는 등이 따가운 상태에서 주문을 받고, 계산까지 무사히 마쳤다. 케이크를 꺼내 접시 위에 놓고, 스무디를 갈아 컵에 넣는 동안 규연의 매서운 시선은 거두어지지 않고 있었다.
“주문하신 케이크랑 음료 드릴게요.”
“우와, 예쁘다. 강아지 오빠, 내일 아침에도 나올 거죠? 저희 인사해 주세요!”
“아, 그, 그게.”
“그리고 제 친구가 강아지 오빠 완전 귀엽고 잘생겼대요! 안녕히 계세요!”
오, 망했다. 규연이한테 엄청 혼나겠다!
음료를 받으러 온 학생이 마치 거대한 폭풍처럼 느껴졌다. 순식간에 너덜너덜해진 나루는 식은땀을 삐질, 흘리며 애써 웃는 얼굴을 유지했다.
학생이 돌아가고 나서는 등골이 서늘한 게 냉기가 맴돌았다.
터벅. 터벅.
난 왜 강아지여서 귀가 좋은 거지? 규연이 발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 그리고 이거, 완전 열 받은 발걸음이야! 질투 가득한 소리!
“송나루, 너 요즘 뭐 하고 다니는 거야. 얘기 좀 해.”
“…어?”
“그렇게 쳐다봐도 안 봐줘.”
아니나 다를까, 규연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귓가에 웅웅 울렸다. 경직된 나루는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애교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단호해진 규연은 이런 행동을 단칼에 잘라내 버렸다. 나루는 온몸에 힘을 빼고 축 늘어진 자세를 취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자, 규연이 냉정히 뒤돌아서서 걸었다.
이것도 안 통하는군.
시무룩해진 나루는 어쩔 수 없이 규연의 뒤를 따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