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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루의 휴가 (5) (122/130)

나루의 휴가 (5)

부스럭, 툭!

신경질이 난 나루가 과격한 몸짓으로 쓰레기봉투를 정리했다. 제 딴에는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게 나름의 분노 표출이라고 생각했지만,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그저 야무지게 일하는 귀여운 직원 정도가 다였다. 아침 일찍부터 나와 일하던 건후는 심통 난 나루에게 다가와 초콜릿 몇 개를 건넸다.

“야, 여기. 뭐가 또 심통이 났대.”

“유규연이 풀빌라에서 섹스 안 해 준대.”

“오우, 깜짝이야.”

받은 초콜릿을 바로 입에 까 넣은 나루가 서슴없이 불만을 토로했다. 매장 안에서 이런 민망한 단어를 아무렇지 않게 내뱉다니. 놀란 건후가 눈을 동그랗게 떴으나, 나루는 남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았다.

“나한테도 이러는데 규연이 형한테는 얼마나 직설적으로 말하는….”

“응? 뭐?”

“아니다.”

“그런데 너 상처가 많이 나았어. 입술이 터져 있었는데, 여기에 딱지 앉았다?”

나루가 대화 주제를 자연스레 돌렸다. 의도적으로 돌린 건 아니었다. 워낙 단순해서 눈에 보이는 대로 말을 내뱉는 거였다. 건후는 대화 주제가 돌아간 것에 무언가의 안도감을 느꼈다.

나루는 손을 뻗어 건후의 입가에 앉은 딱지를 매만졌다. 좋은 약을 써서 그런가, 상처가 금세 나아가는 게 신기했다.

건후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고, 입꼬리를 부들거렸다. 안 그래도 딱지가 앉아 간지러운데, 나루의 손길이 닿으니 표정이 이상해진 것이다. 이런 반응을 무시한 나루는 오직 제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건후의 입가를 열심히 만지작거렸다.

“딱지가 완전 커. 이거 뜯으면 피 나지?”

“겁나 아플걸?”

“나 뜯어 보고 싶다.”

“야, 야, 손에 힘주지 마. 진짜 뜯어지면 피 난단 말이야.”

친구끼리 오갈 법한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을까. 순간, 나루의 뒤로 서늘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건후는 귀찮은 일에 휘말렸다는 얼굴로 소리 없이 경악하는 중이었다.

나루가 인기척에 뒤돌아보려 했을 때 즈음이었다. 옷 뒷덜미가 단단한 손아귀에 붙잡히고, 몸이 뒤로 질질 끌려갔다.

“누가 여기서 노닥거리고 있으래.”

“이거 놔, 유규연!”

“어쭈, 유규연? 호칭 똑바로 안 하지.”

“이거 놓으라고, 사장!”

나루의 뒷덜미를 잡아끈 사람은 다름 아닌 규연이었다. 서연과 재료 이야기를 나누던 규연은 한걸음에 나루의 뒤로 다가와 둘 사이를 갈라놓았다.

아침부터 내가 매정하게 굴었다고 다른 새끼랑 스킨십을 해? 송나루, 간댕이가 점점 커지네.

질투. 이건 명백한 질투였다.

규연은 건방진 호칭을 사용하며 발버둥 치는 나루를 그대로 질질 끌고 나왔다. 자그마한 몸으로 반항해 봤자, 규연에겐 그저 사소한 앙탈 수준이었다.

끄잉, 낑!

끌려오는 동안 나루는 강아지 특유의 앓는 소리를 내었다. 누가 보면 규연이 사람이라도 잡는 줄 알 것이다. 온갖 불쌍한 척을 하는 나루의 모습에 어처구니가 없어진 규연이 헛숨을 내쉬었다.

“하, 참. 어이가 없어요. 송나루, 너 여기 서 봐.”

“쳇.”

“눈 마주쳐.”

“뭐…!”

구석에 나루를 세워 둔 규연이 어린아이 혼내듯 단호한 목소리를 냈다. 그러자, 콧방귀를 뀌던 나루가 눈동자만 슬쩍 치켜뜨며 규연을 쳐다봤다.

뭘 잘못했는지 전혀 모르고, 알게 돼도 절대 반성하지 않겠다는 저 싹수 노란 눈빛. 나루의 기세등등한 태도에 무너져 내릴 뻔한 규연이 제 이마를 짚었다. 한숨을 푹, 내쉬고 나니 그나마 마음이 좀 굳건해졌다.

“아무한테 스킨십하고 다니지 마. 경고야.”

“흥, 나 그런 적 없거든.”

“없기는, 내가 방금 본 건 뭔데 그럼.”

“나야 모르지! 유규연, 나랑 풀빌라에서 해 줄 거 아니면 말 걸지 마! 나 쓰레기 버려야 하거든?”

“저게 진짜….”

애인 사이에 놀러 가서 섹스도 안 해 줄 거면서. 유규연은 바보야.

일부러 규연의 어깨를 치고 지나간 나루는 당찬 발걸음으로 걸어가 다시 쓰레기 정리를 시작했다. 매정하게 돌아선 나루의 뒤통수를 허탈하게 바라보던 규연은 지끈거려오는 관자놀이를 지그시 압박하며 눌렀다.

쟤를 어쩌면 좋지.

규연이 늘 하는 생각이었다. 쟤를 어쩌면 좋지, 어떻게 해야 하지. 아무리 생각해도 결국 끝은 똑같았다.

그래, 씨발. 귀여우니까 내가 한 번 참자.

규연은 오늘도 이런 식으로 마음을 다스렸다.

한편, 콩콩거리며 나온 나루는 튀어나온 쓰레기들이 규연이라 여기며 쓰레기통에 발을 집어넣고 꾹꾹 밟아댔다.

부스럭, 부스럭.

힘차게 스트레스를 푼 다음에는 또 쓰레기봉투를 규연이라 생각하고 매듭을 꽈악 지어 묶었다. 이제 이걸 들고 나가 쓰레기장에 내던지고 오면 끝이었다.

덜컹.

카페 뒷문을 열고 나간 나루는 바로 옆 쓰레기장에 무거운 봉투를 휙, 던져 놓고 두 손을 개운하게 털어냈다.

“응?”

그렇게 가게로 돌아오기 위해 문고리를 막 잡았을 때였다. 나루의 레이더망에 누군가가 걸려들었다. 새로 세운 담벼락 위로 검은색 정수리가 슬쩍 보였다가 사라지고 또 나타나길 반복했다.

뭐지? 누구지? 침입자인가?

순간 나루의 호기심이 크게 발동했다. 들어가려다 말고 문고리를 아예 놓아 버린 나루는 발뒤꿈치를 들어 멀리서나마 담벼락 뒤의 사람을 탐색했다.

“안 보여….”

하지만, 그렇게 정체 모를 사람을 탐색하기에는 나루의 키가 한참 모자랐다. 본능적으로 한 걸음, 두 걸음, 옮기던 나루는 점차 흥이 오르는 걸 느끼며 동동 뛰기 시작했다.

궁금하다, 궁금해!

기껏 신나게 담벼락 근처까지 뛰어왔건만, 나루는 다시 한번 절망을 맛보았다. 규연이 철저히 세워 놓은 담벼락은 나루보다 세 뼘이나 더 높았다.

쿠구궁.

까치발로도 안 돼. 담벼락 너머를 볼 수가 없잖아…?

입술을 삐죽이며 주변을 둘러보던 나루는 무언가 딛고 올라갈 만한 것을 찾아냈다.

저거다!

딛고 올라가기에 아주 적합한 도구. 나루의 시선이 담벼락 옆에 세워진 규연의 스포츠카에 꽂혔다.

규연의 차는 다른 차들과 달리 높이가 아주 낮고, 날렵한 형태로 빠져 있었다. 적절한 것을 찾아낸 나루는 망설이지 않고 행동을 개시했다.

“끄잉, 차.”

쿵!

주차되어 있어서 충분히 안전하다고 생각한 걸까. 나루가 보닛 위로 발을 쿵, 딛고 몸을 힘겹게 끌어올렸다. 억대 스포츠카 위를 쿵, 쿵, 밟아대며 올라가다니. 행인이 이 장면을 목격했다면 나루를 미친 사람 취급하며 경찰에 신고했을지도 모른다. 차체의 가장 가운데까지 걸어 올라간 나루는 담벼락 끝에 두 손을 얹고, 발꿈치를 살짝 들어 고개를 내밀었다.

호오오오. 이거 좀 신난다.

담벼락 너머로 눈을 내밀고 나니 흥미가 마구 샘솟았다. 나루는 새파란 하늘을 뿌듯하게 쳐다보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뭐야?”

나루는 드디어 담벼락 너머로 왔다 갔다 움직이던 머리통의 주인을 알아냈다.

이발하지 않아 부스스한 머리카락. 어두운 낯빛.

저건, 도건혁?

나루가 발견한 사람은 건혁이었다. 저번에 규연에게 그렇게 경고를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건혁은 포기를 모르고 가게 앞으로 찾아온 것이다. 건후의 상처가 겨우 좀 나아가고 있는데, 하필 이 타이밍에 또 나타나다니. 나루의 표정이 한순간에 일그러졌다.

저게 감히 또 찾아왔어? 내가 진즉 확 물어뜯어 놨어야 하는데. 잘 걸렸다.

나루는 새로운 스트레스 풀이 방법을 찾아냈다. 쓰레기를 던지는 것만으로 부족했는데, 딱 좋은 타이밍에 건혁이 나타나 줘서 다행이었다.

둔한 건혁은 나루가 담벼락 너머로 쳐다보고 있다는 걸 아직 눈치채지 못했다.

좋아, 좋은 생각이 났다!

나루는 슬금슬금 규연의 차에서 내려와 가게 안까지 전력 질주했다. 건혁을 되돌려 보낼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 떠올랐다.

덜컹!

카페로 들어온 나루는 커다란 볼을 하나 챙겨 화장실로 향했다.

“나루 씨, 뭐야? 볼은 왜? 어디 가요?”

“물청소 할 거예요!”

“…지금?”

다급한 행동에 서연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질문을 던졌지만, 나루는 대충 대답하며 제 할 일에 집중했다. 물을 한가득 떠 온 나루는 다시 뒷문으로 나와 규연의 차 위를 밟고 올라갔다. 한번 해 봤다 이건가, 두 번째에는 올라가는 솜씨가 부쩍 늘어 있었다. 차체를 밟는 행동도 훨씬 과감해졌다.

콩콩, 쿵.

촤아아악!

아까처럼 올라와 까치발을 든 나루는 담벼락 너머로 냅다 물을 끼얹어 버렸다. 얼마나 세게 퍼부었는지, 물 쏟아지는 소리가 날카롭게 느껴질 정도였다.

“아아악! 씨발! 뭐야!”

“풉.”

동시에 건혁의 거친 비명이 골목길에 메아리처럼 울렸다. 나루는 홀딱 젖은 건혁을 바라보며 쌤통이라는 듯 비웃음을 날려 주었다.

건혁은 제 머리통을 추하게 감싸며 위를 올려다보았다. 누구 하나 죽일 듯이 치켜뜬 눈은 어느새 나루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저 미친 새끼, 너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이냐? 뒤지고 싶어?”

“호오…….”

“씨, 씨발, 뭐야. 또라이 새끼가, 대답 안 해?”

“뒤지고 싶은 건 너면서. 뒤지고 싶어?”

건혁의 말에 감탄하던 나루가 받은 말을 그대로 되돌려줬다. 남이 들으면 초등학생 싸움이라고 오해할 법한 대화였다.

건혁은 나루의 황당한 말에 어이가 없어 입만 뻐끔거렸다. 뭐라고 대응해야 할지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나루는 건혁이 벙찐 상태를 노려 경고를 날렸다.

“여기 오지 마. 너는 도건후랑 절대 못 만나. 내 친구니까.”

“뭐, 무슨, 개소리를…!”

“다음에 또 접근하면 물로 안 끝나. 후추 뿌릴 거야. 후추.”

상큼한 목소리로 건넨 경고는 유치하면서도 강력했다. 나루라면 진짜 후추를 뿌리고도 남는다는 사실을 건혁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어디 후추만 뿌릴까, 나루는 고춧가루까지 섞어 뿌릴 만한 인물이었다.

건혁을 만만하게 깔아보던 나루는 한쪽 입꼬리를 씨익, 올려 비웃고 손을 휘휘 저었다.

“여기에 계속 있을 거야?”

“뭐, 뭐, 뭐?”

“꺼지라니까? 규연이 불러오기 전에 훠이 가 버려.”

웃으며 엿 먹이는 스킬은 또 언제 배운 걸까. 나루가 살살 눈웃음을 치며 건혁을 쫓아냈다. 그 손짓에 맞게 조금씩 뒷걸음질 치던 건혁은 끝까지 허세를 부리며 욕지거리를 읊었다. 자기보다 한참 조그마한 나루에게 당했다는 게 자존심이 상했다.

“하, 이 또라이 같은 새끼. 진짜 죽여 버릴,”

“해 봐.”

“…….”

“해 봐.”

작은 고추가 맵다고 했던가. 나루가 딱 그랬다. 끝을 모르고 덤벼드는 건혁에게 전혀 움츠러들지 않은 나루가 특유의 광기 어린 눈으로 대응했다.

유규연은 씨발, 저 또라이 같은 새끼랑 어떻게 붙어먹는 거야?

눈에 띄게 당황한 건혁이 속으로 벌벌 떨며 뒤돌아섰다.

“두고 봐, 씨발.”

“뭐, 씨발. 그러든가.”

“…저 미친놈이.”

언젠가 규연에게 써먹었던 거울 치료 수법을 그대로 건혁에게 사용해 준 나루가 아무 감흥 없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얼굴에 알 수 없는 공포감을 느낀 건혁은 바닥에 침을 한번 뱉고, 골목길을 빠져나가 버렸다.

담벼락 위로 눈만 빼꼼 내민 나루는 건혁이 완전히 이 근처를 떠날 때까지 집요하게 쳐다보다가 시선을 거두었다.

그나저나 이렇게 바깥 구경하는 거 재미있다. 좀 짱인데.

스트레스를 완벽히 해소한 나루가 상쾌한 심호흡을 마치고 세상 구경을 시작했다. 담벼락 너머로 보는 골목길은 전보다 더 새로웠다. 달라진 건 없는데, 참 이상했다.

한참을 규연의 차 위에 서서 담벼락 너머의 세상을 구경하고 있었을까. 마침 지나가던 고등학생들이 빼꼼 나온 나루를 발견하고 꺄악, 소리를 내질렀다.

“꺄악! 깜짝이야. 뭐야?”

“…….”

끔뻑끔뻑. 그러게요? 뭐지?

눈을 댕그랗게 뜬 나루가 놀란 학생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내가 여기에 서 있어서 깜짝 놀란 걸까? 그럼 사과를 해야겠지?

발꿈치를 끝까지 들어 올린 나루는 어렵사리 얼굴 전체를 드러낸 채 손바닥을 펴 보였다. 낑낑거리며 담벼락 위로 턱을 올려놓자, 말랑한 볼이 호빵처럼 눌렸다.

“미, 미안.”

아, 당황해서 습관적으로 반말이 튀어나와 버렸다.

저도 모르게 반말로 사과를 건넨 나루가 멋쩍게 볼을 긁적였다. 무례한 행동이었지만, 사과를 들은 학생들의 표정은 점점 환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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