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루의 휴가 (4) (121/130)

나루의 휴가 (4)

“이건 우리 집 사정인데, 네가 왜, 왜….”

생각지도 못한 규연의 등장에 본능적으로 움츠러든 건혁이 구질구질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우리 집 사정? 친형제도 아닌 주제에 입만 살아서는. 가정 폭력 일삼는 새끼들이 꼭 이런 핑계를 댄다던데.

건혁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넘긴 규연이 같잖다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 짧은 사이 냉담한 시선이 건혁의 몸을 훑어내렸다.

그렇게 맞고도 정신을 못 차린 건가, 했는데, 오히려 반대로 정신을 제대로 놓아 버린 모양새였다.

턱까지 내려올 듯한 다크서클은 기본이고, 수염이 추잡하게 자라 있는 모습. 게다가 불안 증세라도 보이는 건지, 성인 남성이 손톱을 다 물어뜯어 손가락 끝에 피딱지가 여럿 내려앉아 있었다. 한때는 깔끔한 외모로 다른 사람들의 환심을 쉽게 사곤 했던 남자인데, 이렇게 된 꼴을 보니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여기서 얼쩡거리지 말고 곱게 가라.”

“야, 도건후, 이 비겁한 새끼야. 넌 이따,”

“괜한 애 잡지 말고 꺼지라고, 어? 쪽팔리지도 않냐. 야, 넌 먼저 카페 들어가 있어.”

사람은 한 번 추락하기 시작하면 끝을 모르고 떨어진다고 했다. 지금의 건혁이 딱 그런 꼴이었다.

규연은 신경질적으로 턱짓하며 건후를 카페 안으로 들여보냈다. 그 상황에서 안절부절못하던 건후는 규연의 눈살에 못 이겨 발걸음을 옮겼다.

“이 근처 어슬렁거릴 생각하지 마라. 웬만하면 생각 고쳐먹고, 네 인생이나 똑바로 살아.”

“…….”

심각한 상황이었으나, 규연은 큰 소리를 내지 않았다. 침착하게 대처하는 행동이 예전과 다르게 어른스럽기도 했다.

크르릉. 크르르르.

물론, 나루는 침착해지려면 한참 남았다. 끝까지 눈을 번뜩이며 이를 갈아대는 게 얼마나 살벌하던지. 마침 코너를 돌아온 건후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깜짝아….”

“너 괜찮아? 저 사람이 많이 때렸어?”

“아, 괜찮아. 뭐 많이 맞지도 않았거든. 너도 같이 들어가자.”

“아니야, 난 규연이 올 때까지 여기에 있을 거야. 너 들어가.”

내심 나루를 걱정한 건후가 손을 이끌어 보았지만, 고집을 이길 수는 없었다. 나루는 건후의 등을 떠밀어 카페 안으로 들여보낸 후, 긴장감이 맴도는 골목길을 빤히 응시했다. 잠시 그 자리에 서서 무어라 중얼거리던 건혁은 규연의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도 못한 채 발을 굼뜨게 움직였다.

어, 눈 마주쳤다.

그때, 피폐한 시선과 나루의 광기 어린 시선이 허공에서 맞물렸다.

으르릉. 크르르르.

규연의 뒤태에 홀려 멍한 상태를 유지하던 나루는 언제 그랬냐는 듯 이를 드러냈다.

건혁은 별다른 수를 쓰지 못하고 뒤돌아섰다. 여기에 더 있어 봤자 제게만 손해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타다다닥!

점차 뒷걸음질 치던 건혁이 한달음에 도망쳤다. 여유롭고 거만하기까지 한 규연의 뒤태와 크게 비교되는 경박한 뜀박질이 이젠 안쓰러웠다.

건혁을 되돌려보낸 규연은 제 머리카락을 짜증스레 털어내며 나루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카페 뒤쪽으로 오는 게 문제지, 하여튼. 이쪽 길이 영 치안도 별로고.”

“쟤가 뭐래? 확 물어 버리지!”

“인상 펴. 너 내가 경고하는데, 앞으로 저 새끼 또 찾아오면 맞대응하지 말고 나한테 먼저 와. 알겠어, 모르겠어.”

“응, 알겠어.”

규연이 돌아오자마자 한 일은 가벼운 안전 교육이었다. 겉보기에 순진한 것 같은 나루는 급발진도 장난 아니었고, 누가 들이받으면 불도저처럼 덤빌 애였다.

도건혁이 다시 안 온다는 보장은 없고. 송나루는 여기서 계속 일할 거고. 그러다 언젠간 마주치면 높은 확률로 송나루가 먼저 달려들겠지.

규연은 나루를 알아도 너무 잘 알았다.

“아예 담장을 설치하든가 해야지.”

“담장? 벽 세워? 어디에?”

“내 카페 구역에. 주차장으로도 쓰고, 괜찮겠네.”

임시방편으로 생각난 건, 바로 담장을 설치하는 것이었다. 규연은 떠오른 김에 전부 진행해야 한다며 핸드폰을 바삐 확인했다. 이런 일에 제일 관심 없고, 게으르게 굴 거 같은데, 규연은 의외로 꼼꼼했다. 직원들도 알뜰히 챙길 줄 알고. 의리까지 완벽했다.

상황이 완전히 마무리되자, 나루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건혁 때문에 아까 나누던 대화의 흐름이 끊겨서 아쉬워하는 표정이었다.

꾹. 꾹.

나루가 손을 뻗어 규연의 옷 끄트머리를 잡아당겼다. 그러나, 규연은 진즉 이상한 낌새를 알아채고 핸드폰에만 집중했다.

“규연아. 규연아.”

“이제 집 가야지. 가서 옷 갈아입고 와.”

“규연아?”

“나 먼저 들어가서 퇴근 준비 마칠게. 빨리 갈아입어.”

“유규연, 내 말 개무시…….”

끝까지 단호한 태도를 유지한 규연이 뒷문을 열고 카페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혼자 남게 된 나루는 하는 수 없이 그 뒤를 털레털레 쫓아야만 했다.

퇴근 준비를 마친 규연은 건후에게 보너스가 아닌 돈을 따로 챙겨주었다. 다른 직원들이 보지 않도록 은밀하게 전해줬지만, 나루는 모르는 척 그 장면을 전부 훔쳐봤다. 어디서든 발동되는 집착 증세가 대단할 정도였다.

“앞으로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자야 할 텐데, 이거라도 써라. 병원 꼭 가고.”

“규연이 형, 나 이런 거 안 해 줘도 돼. 미안하게 왜 그럴까.”

“쓰라면 써. 얼굴 그 꼬라지로 일하면 손님 떨어져.”

“…푸학! 아, 알겠어. 진짜로 고마워, 형.”

툭툭 던지는 말투 속에 건후를 생각하는 마음이 섞여 있었다. 옷을 다 갈아입고 나온 나루는 벽 뒤에 숨어 두 사람을 질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유규연 멍청이가. 내가 부를 때는 완전 개무시면서, 도건후한테는 잘해 주고.

나루의 집요한 시선이 느껴졌던 걸까. 이미 인식하고 있었다는 듯 눈동자를 스윽, 돌린 규연이 나루를 향해 손을 까딱였다.

흥, 내가 갈 줄 알고? 내가 개야?

종종종.

속마음은 반항심이 가득한데, 나루의 발은 절로 규연에게 향하고 있었다.

“가자, 너 내가 지퍼 잘 올리랬지.”

“잘 안 올라가는데.”

“또 일부러 그랬네. 이러면 옷 망가진다니까. 그냥 와도 올려줄 테니까 억지로 고장 내지 마.”

뜨끔.

일부러 지퍼 사이에 옷 끼운 거 어떻게 알았지? 티 안 난다고 생각했는데. 규연이 내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건가. 유규연 천재야.

심통이 나서 일부러 지퍼를 고장 내 온 나루가 당당히 가슴을 폈다. 겨울에는 패딩을 입어서 규연이 자주 지퍼를 올려주곤 했는데, 봄이 오니 옷차림이 가벼워져 그런 다정함을 쉽게 맛볼 수 없었다. 그래서 나루는 일부러 지퍼 있는 옷을 골라 입고, 이렇게 핑계를 대가며 어리광을 부렸다.

“형, 잘 가요. 송나루 너도 잘 가.”

“안녕, 도건후. 규연이한테 너무 친한 척하지 마.”

“야, 나한테 견제하지 마!”

“빨리 가자, 규연아. 훠이.”

장난 반으로 건후를 쫓아낸 나루가 규연의 손을 막무가내로 잡아끌었다. 얼떨결에 따라 나오게 된 규연은 나루의 동그란 뒤통수를 보며 어이없다는 웃음을 터뜨렸다.

조그마한 게 질투만 많아서 아주.

다른 사람이었다면 얄미웠을 법한 행동인데, 이상하게 나루가 하면 귀여운 게 스스로도 이해되지 않았다.

“송나루, 와서 볼 한번 찍고 가.”

“그럼 수영장에서 해 주는 거야?”

“됐다, 오늘 뽀뽀 없어.”

“안 돼, 규연아! 안 된다고!”

틈만 생기면 비집고 들어오는 게 나루다웠다. 체념한 규연이 일부러 쌀쌀맞은 척 연기하자, 애교스러운 목소리를 내던 나루가 달려들어 볼 위에 제 입술을 쪽, 쪽, 찍어눌렀다.

“뽀뽀 있어. 다 내가 결정할 거야.”

“…네 마음대로 해라.”

결국, 규연은 또 지고 말았다. 나루가 고집스럽고 제멋대로 굴어도, 전부 예쁘게만 보이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 * *

며칠 후.

건혁과의 작은 마찰이 있었던 날 이후, 카페는 매우 평화로웠다. 건후의 얼굴도 상처가 점점 아물어가고 있어 다행이었다.

늘 이렇게 평화롭기만 하면 좋을 텐데. 그럴 텐데.

“봐, 규연아. 여기야. 어때? 나 여기 예약할래.”

“핸드폰 내놔 봐.”

규연과 나루의 사이는 평소보다 더 어수선했다. 그 이유는 며칠 전과 동일했다.

나루는 풀빌라를 주장하며 수영장이나, 스파에서 섹스할 것을 요구했다. 규연과 욕실에서 첫 관계를 나눈 것이 퍽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놀러 가는 건 좋지만, 적나라한 요구를 듣는 건 아직도 적응되지 않았다.

차에서 내리기 전, 핸드폰을 빼앗아 든 규연이 나루가 찾아놓은 풀빌라 정보를 눈으로 훑었다.

시설도 그렇고, 전체적으로 평범한 수준의 풀빌라였다. 늘 호텔이나, 잘 관리된 별장으로만 다니던 규연의 눈에는 청결 수준이 영 만족스럽지 않은 곳이었다.

규연은 진지하게 고민했다. 휴가 계획을 나루에게 맡겨도 되는 걸까.

“차라리 내가 아는 곳으로 가.”

“아니야, 이번에는 내가 알아서 할 거야. 규연이 너는 따라만 와.”

“…….”

“여기 괜찮잖아! 물도 깨끗해 보여. 여기서 해도 괜찮을 거 같은데….”

“별로 안 깨끗해 보여. 이런 데서 무슨,”

규연의 매정한 태도에 눈을 일부러 불쌍하게 뜬 나루가 눈물을 글썽였다. 입매는 아래로 뚝 떨어졌고, 눈썹 또한 팔 자로 비틀어졌다. 그 안쓰러운 표정에 잠시나마 동하던 규연은 나루의 얼굴을 자세히 한 번 쳐다보고는 인상을 구겼다.

송나루 이게, 또 연기를 하고 있어?

눈물은 고였지만, 슬픈 감정은 전혀 없는 저 눈동자. 억지로 눈물을 쥐어 짜내느라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손. 나루는 지금 불쌍한 척, 연기를 하고 있었다. 가까이서 나루를 봐 온 규연이 이걸 눈치 못 챌 리 없었다.

“아무튼, 가는 것까지 좋다 쳐도, 여기서 하는 건 안 돼.”

“짜증….”

“안. 돼.”

“유규연 너는, 드라마에 나오는 까칠한 부자 사장님 같아.”

“…뭐, 뭐라고?”

쌍욕은 아니되 기분 묘할 만한 욕을 내뱉은 나루가 차에서 내려 문을 힘차게 닫았다.

드라마에 나오는 까칠한 부자 사장님이라니. 나루가 애청하는 드라마를 떠올려 보던 규연의 표정이 다양하게 변화했다. 멍하니 핸들 위로 엎어져 한숨을 푹 내쉬다가, 끝내는 실성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 하하, 어이가 없어서.”

어이없이 웃기고, 기분도 묘한 와중에, 나루가 또 밉지는 않았다.

욕을 해도 꼭 지같이 해요.

한 박자 늦게 차에서 내린 규연은 씩씩거리며 들어가는 나루를 웃음기 섞인 얼굴로 쳐다보다가도, 눈빛을 싹 바꾸고 시선을 돌렸다.

주차된 차 옆에 새로 생긴 담장이 늘어서 있었다. 최대한 빨리 설치해 달라고 한 게 효과가 있었나. 며칠 사이 튼튼하게 지어진 담장을 보니 조금이나마 안심이 되었다.

이 정도면 송나루가 막 달려들지는 못하겠지. 높이도 꽤 있으니까.

보통 사람은 위협적인 상대가 다가오지 못하겠다고 생각하겠지만, 규연의 경우는 달랐다. 어딘가 핀트가 살짝 엇나갔어도, 쉽게 수긍할 수 있을 만한 생각이었다.

뒷문을 열고 출근한 규연은 나루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담장을 세우길 잘했다고 느꼈다.

삐쳐서 일부러 쿵쿵 걷는 저 발걸음. 나름 화난 티를 내는 동그란 눈.

저 상태의 나루라면 누구 하나 물어뜯는 것 정도는 충분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