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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루의 휴가 (3) (120/130)

나루의 휴가 (3)

내가 저 말을 제대로 들은 게 맞는 걸까. 송나루 입에서 수영장에, 섹스라는 말이 나온 게 현실이 맞나.

“…뭐라고?”

“수영장 있잖아. 풀빌라에 수영장이 있거든, 그런데 거기에서 섹스할 수 있을까, 궁금했어.”

얘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규연의 두 눈이 멍청하게 끔뻑였다. 자신이 들은 게 현실이 맞는 건지, 도저히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루는 순진한 눈빛을 거두지 않은 채 규연의 대답을 기다렸다. 순수 악이라는 게 이런 걸까. 바닥에 던져 버린 담배가 그리워지는 순간이었다.

규연이 당황하는 사이, 나루는 2차 공격을 준비했다.

“그런데 거기 수영장 말고 스파도 있대. 따뜻한 물 있는.”

“…….”

“따뜻한 물에서 하면 안 춥지 않을까? 규연아, 너는 어때? 여기 침대도 많은데, 하면 좋을 거 같아….”

“잠시만, 야, 나루야, 나 머리 돌릴 시간을 좀 줘 봐.”

2차 폭탄은 더 무시무시했다. 질문이 우수수, 떨어지는 걸로 모자라 보채기까지 하다니. 규연은 제정신을 붙잡을 수 없었다.

달라붙는 나루를 살짝 밀쳐낸 규연이 미간을 짚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루 한정으로 온순하던 눈은 어느새 다시 뾰족하니 날카로워져 있었다.

누구야. 씨발. 누가 송나루한테 바람을 넣은 거냐고.

은근히 단순해서 호텔이라고 하면 정말 호텔만 알아볼 앤데, 풀빌라는 어떻게 안 거지. 아니, 됐고, 밑도 끝도 없이 섹스 얘기가 나오니까 당황스럽네. 규연은 나루의 말간 얼굴을 내려다보며 눈썹을 묘하게 찌푸렸다.

그러자, 인내심을 발휘해 기다려 주던 나루가 답답하다는 듯 규연의 대답을 보채기 시작했다.

“규연아, 머리 돌렸어? 풀빌라 갈래?”

“거기 좋다는 얘기는 누구한테 들었어.”

“…그, 그냥. 내가 스스로 알아냈는데….”

나루도 기본적인 눈치는 있던 터라, 이런 이야기를 해 준 게 서연이라는 사실을 절대 밝히지 않았다. 땅이 꺼질 정도로 한숨을 내쉬던 규연은 나루의 주의를 어떻게 돌려야 할지 진지하게 고심하는 중이었다.

철저히 풀빌라 얘기만 하자. 아무리 주변에 사람이 없다지만, 직장에서 이런 얘기를 하는 건 좀. 생각을 마친 규연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좋지, 풀빌라. 일부러 시간을 끌며 대답을 늦추던 규연이 나루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잠깐 사이에 광기 어린 눈동자가 가라앉아 있었다.

“가자, 규연아. 내가 잘 예약할게!”

“어, 그래. 예약해. 풀빌라 괜찮네, 응.”

“좋지? 수영장도 있으니까, 그리고 또 규연이는 나랑 섹스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어. 그때도 욕실에서 우리 같이,”

“야, 누가 들을라! 좀, 좀, 조용히 좀…!”

이번에는 조금 센 공격이 날아들었다. 그냥 폭탄도 아니고, 핵폭탄을 떨어뜨린 것이다. 특유의 순진한 얼굴은 그런 무시무시한 발언을 하고도 아무렇지 않다는 낯이었다.

아무도 없는 골목이라지만, 이런 남사스러운 말을 누가 듣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눈을 휘둥그레 뜨며 식겁한 규연은 황급히 나루의 입을 단속시켰다. 오밀조밀한 입술 앞에 검지를 가져다 대니 나루가 멀뚱히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게 또 쓸데없이 귀여워서, 규연은 그만 정신을 놓을 뻔했다.

“제발, 어? 조용히. 그런 얘기는 밖에서 크게 하지 말자. 나루야.”

“왜? 하지만, 욕실에서 섹스했었잖아. 난 그래서 네가 수영장에서 하는 것도 괜찮을 줄,”

“야, 송나루, 나 좀 살려줘. 너 왜 그래….”

“수영장은 사람이 있어서 그래? 맞다, 다른 사람들이랑 같이 쓴다고 했어. 그러면, 스파에서는 괜찮겠지?”

모든 것을 다 놓아버린 체념한 눈빛. 텅 비어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은 공허한 동공. 딱 지금 규연의 상태였다. 나루는 넋이 빠진 규연의 몸을 앞뒤로 흔들어대며 졸라댔다. 와중에 요구하는 것도 정상적이지 않아서, 이야기가 점점 산으로 향하고 있었다.

얘 대체 나한테 왜 이래? 여기가 그냥 길거리였으면 어쩔 뻔했냐고. 사회적 체면이고 뭐고, 다 좆되는 거지.

규연이 허망한 시선으로 나루를 내려다보자, 나루가 애교를 부리듯 눈을 깜빡이며 규연의 어깨에 볼을 비비적거렸다.

씨발. 귀여우면 다냐? 어이가 없네.

규연이 나루의 유혹을 참아내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어? 규연아, 스파에서 하는 건 괜찮아? 대답해 줘.”

“그만, 송나루, 제발 이런 이야기는 좀 그만하자. 내가 정신이,”

“사실 나 그때 하나도 안 무섭고, 좋기만 했단 말이야. 다른 사람들은 다 사랑하면 한댔는데, 이제 나도 할 수 있어! 정말인데.”

이 당당함은 또 어디서 나온 걸까. 규연은 그럴듯한 이유에 저도 모르게 홀려 넘어갈 뻔한 걸 간신히 참아냈다.

점점 말만 늘어서 사람을 막 꾀어내질 않나. 송나루 이게 진짜….

나루가 부탁하는 건 웬만해서 다 들어주는 규연이었지만, 직장에서 이런 남사스러운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었다. 게다가 수영장이니, 스파니, 내뱉는 장소가 다 정상적이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도 이용했을 만한 시설에다가, 청소를 제대로 했는지도 모르는데. 그딴 곳에서, 어떻게, 그런 행위를 할 수 있단 말인가. 나루의 몸에 더러운 물이 들어간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언짢아졌다.

“안 돼.”

“왜?”

“그런 곳은 물이 더러워서 안 돼. 네 몸에 안 좋아.”

“나는 괜찮은데, 정말 괜찮은데.”

안 된다는 말이 나온 순간부터 나루의 표정이 썩어들어갔다. 상황이 제가 원하는 대로 돌아가지 않는 데다가, 규연이 단호하게 거절하니 답답한 마음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진 것이다. 규연 또한 나루에게 지지 않고 맞대응했다.

“네가 괜찮다고 해도, 내가 안 괜찮아.”

“내 몸인데…!”

“아무튼 그런 장소에서는 안 돼. 괜히 궁금해하지 마. 우리 평범하게 좀 하자.”

“재미없어….”

“야.”

규연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나루의 미련을 단호하게 잘라냈다. 그러나, 이런다고 해서 순순히 물러날 나루가 아니었다. 경고 섞인 말에도 기죽지 않고 대꾸하자, 규연의 미간이 확 찌푸려졌다.

짝!

동시에 날카로운 마찰음이 골목길을 메웠다. 그 소리에 놀란 나루는 눈과 입을 크게 확장하며 어깨를 흠칫, 떨었다.

뭐지? 규, 규연이가 나를 때린 건가?

순간적으로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한 나루가 규연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게 뭔 소리야.”

“……어어?”

하지만, 놀란 건 나루뿐만이 아니었다. 규연 또한 마찰음에 놀란 건지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중이었다.

왠지, 맞은 것치고는 정말 안 아프다 싶었어. 규연이가 나를 때린 게 아니구나. …그럼 이건 무슨 소리지?

손을 뒤로 뻗어 제 엉덩이를 더듬거리던 나루가 두 뺨까지 꼼꼼히 만져 보더니, 맞은 게 자신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주변을 경계했다.

짝!

아무리 둘러봐도 소리의 출처가 어디인지 유추할 수 없을 때 즈음. 다시 한번 큰 마찰음이 울렸다.

뒤에서 나는 소리다!

이번에는 정확히 감지한 나루가 소리가 난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방금까지 규연과 작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는 건 이미 까먹어 버렸다.

규연은 대화가 적절한 타이밍에 끊겨서 다행이라 여겼다. 그러면서도 나루가 이상한 상황에 휩쓸리지 않을까, 걱정하며 황급히 뒤를 쫓아 걸었다.

소리가 난 곳은, 바로 저기다! 골목길 뒤편이야!

한순간에 탐정에 빙의한 나루가 걸음을 조심스레 옮기며 코너 너머로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야, 나한테 와야 할 돈이 왜, 왜 네 새끼 입으로 들어가는데. 어? 대답해 봐. 이 천박한 새끼야.”

“허, 허억, 형, 여기 내 일터야. 집에 가면, 윽!”

“내 말에 감히 토를 달아? 네가?”

나루가 발견한 장면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오랜만에 마주하는 얼굴과 익숙한 뒷모습. 도건혁과 건후였다. 몇 개월 사이 눈에 띄게 초췌해진 건혁은 사람 같지 않은 시선으로 제 동생을 바라보며 폭력을 퍼붓고 있었다. 막말은 기본이었고, 무차별적인 폭력까지. 당장 말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분명 카페 안에 있어야 할 건후가 왜 여기서 이렇게 맞고 있는 건지. 의아하다가도 피떡이 된 얼굴을 보니 울화가 치밀었다. 눈을 매섭게 치켜뜬 나루는 이를 드러내며 그사이에 끼어들려 했다.

턱!

그러나, 규연의 제지로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나루가 놓으라는 듯 어깨를 비틀어 보았지만, 규연은 잡은 몸을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위험해. 여기 가만히 있어.”

“도건후가 맞고 있는데!”

“내가 해결하고 올 테니까, 넌 여기 가만히 있으라고. 저 새끼랑 얼굴 마주하지 마. 뭐 좋은 사이라고.”

“…….”

안 그래도 냉한 규연의 얼굴이 더 차갑게 얼어붙었다. 혼잣말로 욕을 중얼거리던 규연은 나루를 코너 뒤에 밀어 넣고, 대신 나서서 두 형제 사이로 끼어들었다. 진심으로 열받은 듯 험악해진 목소리에 주춤한 나루는 규연이 시킨 대로 행동했다. 코너 뒤에서 꼼짝하지 않고 얌전히 기다리는 것. 와중에 돌아가는 상황이 궁금해서 고개를 몇 번 내밀긴 했다.

타악!

마침 건후에게 날아들던 주먹이 중간에서 막히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뜬 나루는 규연이 무사하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한시름 놓았다.

“내 가게 앞에서 이게 뭐 하는 짓이냐. 정신을 덜 차렸나….”

“너, 너…!”

“야, 얘 내 직원이야. 나름 페이스 괜찮아서 매출까지 올랐는데, 네가 손대는 바람에 장사 초 치게 생겼잖아.”

날아드는 주먹을 가로막은 건 다름 아닌 규연이었다. 건후의 앞을 지키고 선 규연이 건성으로 대처하자, 당황한 건혁이 입을 뻐끔거렸다.

죽도록 맞아서 겨우 살아난 지가 언제인데, 다시 규연을 마주하니 겁을 먹긴 한 모양이었다.

아니야, 규연아. 보내주지 마. 그냥 죽이자!

주먹을 불끈 쥔 나루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규연이 거칠게 대응하지 않는 게 못마땅한 듯했다. 조급해하는 나루와 다르게 규연은 여유로워 보였다.

“몸은 좀 괜찮은가 봐.”

건후를 자연스레 밀쳐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킨 규연이 건혁의 귓가에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으르르릉. 으르릉.

나루는 열심히 이를 가는 중이었다. 얼마나 분노가 치민 건지, 으르릉거리며 앓는 소리가 입 밖으로 마구 튀어나왔다.

조금만 더 조르면 규연이가 수영장에서 해도 괜찮다고 말해 줄 것 같았는데. 분위기도 괜찮았는데. 저 쓰레기가 또 굴러 들어와서 방해할 게 뭐야? 진짜 개짜증 나. 그리고 저 자식, 내 친구 얼굴에 손댔어. 감히!

규연이 이 속마음을 들었다면 단호하게 말했을 것이다.

후자는 그렇다 쳐도, 전자는 전혀 아니라고.

그러거나 말거나, 나루는 혼자만의 착각에 빠져 최선을 다해 분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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