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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루의 휴가 (2) (119/130)

나루의 휴가 (2)

“얼굴이 왜 그래?”

“아, 이거, 별거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바라본 건후의 얼굴이 말도 아니었다. 눈가에는 새빨간 피멍이 들어 있고, 입술도 다 터져서 피딱지가 굳어 있는 상태였다. 이곳저곳에 남은 자잘한 상처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대충 수습하겠다고 밴드를 붙여 놓긴 했지만, 솜씨가 영 형편없어서 안 붙이느니만 못했다.

나루는 건후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어디서 이렇게 다친 거지? 술 마시다가 시비라도 붙었나? 아니야. 요즘 바로 집으로 간다고 했었지.

그렇다면, 의심되는 건 하나밖에 없었다.

“그 사람이지. 너희 형.”

“…얘가 뭐래? 야, 아니야. 가서 오픈 준비 안 하냐. 규연이 형 화낸다.”

“당황한다. 너희 형 맞잖아.”

“아니라니까 그러네? 송나루, 저리 가.”

한참 잠잠하던 건혁이 이번에는 제 동생한테 손을 댄 걸까. 나루의 표정이 점점 심각해지자, 건후가 나서서 화제를 전환했다.

나루를 돌려보내려는 몸짓이 기름칠 안 된 쇳덩이처럼 삐걱거렸다. 이마에서는 출처 모를 식은땀이 한 줄기 흘러내리고 있었다.

사실, 나루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건후는 며칠 내내 건혁의 화풀이를 감당해내는 중이었다.

규연에게 된통 당한 후, 부모에게까지 한심한 놈 취급받던 건혁은 한순간에 나락까지 떨어졌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부모의 관심이 건후에게로 돌려졌다. 평생 신경도 쓰지 않던 사람들이, 아끼던 게 망가지자마자 새 물건을 찾는 꼴이었다.

건혁의 눈에는 건후가 좋게 보일 리 없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화풀이가 시작됐다.

“둘이서 왜 이러고 있어. 너 얼굴 왜 그러냐.”

“규연아, 그 사람이 때렸나 봐.”

“…….”

이런, 일이 커지고 말았다. 어느새 다가온 규연마저 건후의 얼굴을 발견하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건후가 뒤늦게 고개를 숙여 보았으나, 이미 들킨 걸 숨길 수는 없었다. 나루도 단번에 알아챈 사실을 규연이 모를 리 만무했다. 보자마자 건혁의 만행이라는 걸 깨달은 규연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니야, 나 괜찮아. 잘못하다가 넘어져서 그렇다니까. 어?”

“오전에 병원이나 다녀와라. 네가 일한 지 얼마나 됐더라.”

“어……?”

“보너스 줄 테니까, 웬만하면 집 들어가지 말고.”

끝까지 변명하던 입이 꼭 다물렸다. 규연은 건후의 어깨를 두어 번 토닥여 주고는 멍하니 서 있는 나루를 잡아끌었다.

저것도 가만 보면 미련한 구석이 있어.

규연은 건후의 속마음을 귀신같이 알아챘다. 누가 봐도 폭행당한 게 분명한데, 넘어졌다는 변명이나 늘어놓다니. 흔들리는 동공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도건혁이랑 우리랑 엮이게 하는 게 미안해서 계속 괜찮다고 하는 거겠지. 이전에 안 좋은 일도 있었고, 껄끄러운 관계니까.

지금 규연이 도와줄 수 있는 건 몇 없었다. 그저 보너스로 돈을 더 얹어 주고, 건후가 잠시나마 편하게 나와 살기를 바라는 것 정도.

“규연이 형…….”

작은 배려에도 건후는 크게 감동하는 중이었다. 불편하지 않도록 집요한 나루까지 데리고 가 주다니. 안 그래 보여도 규연은 은근 세심한 구석이 있었다.

“규연아, 이거 놔. 나 그 사람 가만 안 두러 갈 거야.”

“가만 안 두긴 무슨, 얌전히 있어.”

“쟤 그래도 내 친구인데…!”

“당분간 맞을 일 없을 거니까 걱정하지 마. 일단 너는 오픈 준비부터 하세요?”

쳇, 칫.

규연의 말에 분노를 가라앉히지 못한 나루가 씩씩거리며 카운터로 향했다.

저 성질머리 진짜. 쪼그만 강아지 같은 게 성깔 하나는 대단해요.

뒷모습을 바라보던 규연은 짧은 한숨을 터뜨리곤 노트북을 챙겨 테이블 앞에 앉았다.

“나루 씨, 이리 와요. 나랑 같이 포장지 정리해.”

“네에….”

“으이구우, 건후 씨 걱정돼서 그러는구나? 나도 많이 걱정했는데, 오히려 걱정하니까 부담 느끼더라고요. 우리 조용히 챙겨주자.”

역시, 서연은 나루의 눈높이에 맞춰 사근사근하게 타이를 줄 알았다. 사회생활을 오래 해서 그런가, 사람 다루는 법을 잘 알았다. 나루는 그제야 규연이 자신을 저지시킨 이유를 깨닫고, 고개를 얌전히 끄덕였다.

부스럭.

분위기가 묘하게 가라앉고, 포장지 정리하는 소리만이 카운터를 메웠다. 서연은 조금 풀 죽어 있는 나루를 보며 수다스럽게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맞다, 나루 씨. 곧 휴가지? 나, 이번에 놀러 다녀왔잖아요.”

“네네.”

“호텔보다 풀빌라가 좋아 보여서 다녀왔는데, 여기 수영장도 엄청 좋고, 스파도 있어서 괜찮더라고요.”

귀 쫑긋! 이거, 흥미로운 얘기다!

색다른 주제에 호기심이 발동된 나루가 금세 눈을 반짝였다. 호캉스. 그러고 보니 휴가를 위해서 조사해야 할 게 많았다. 어디 호텔이 좋고, 주변에는 어떤 재미있는 게 있을지 생각할 게 한두 개가 아니었는데. 마침 서연이 풀빌라에 다녀와서 좋았다고 하니 저절로 흥미가 생겼다.

“풀빌라요? 스, 파?”

“호텔보다 더 넓고, 수영장 물도 뜨뜻하니 좋아요.”

“우와….”

“그리고 무엇보다, 잘생긴 사람들도 많구요. 세상에 무슨 우연인지, 바로 옆 동에 얼굴 잘난 사람들끼리 놀러 온 거예요. 나 눈호강 했잖아.”

궁금하다는 듯 귀를 들이대자, 서연이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호텔보다 넓고, 수영장 물도 뜨뜻하다니. 멍하니 입을 벌린 나루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서연은 그 뒤로도 멈추지 않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수다스러운 성격답게 사소한 것까지 신나게 떠들어대자, 나루가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남자 얘기에도 순진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영 우스웠다. 물론,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이어가는 중이었다.

규연이랑 같이 가면 재미있겠다. 호텔 말고, 풀빌라로 가는 게 좋겠어. 기회를 노리던 나루가 서연에게 정보를 구했다.

“저도 거기 알려주세요.”

“어머, 진짜? 진심이에요? 정말?”

“네!”

나루가 적극적으로 정보를 묻자, 서연이 의외라는 표정으로 웃었다. 테이블에 앉아 있는 규연을 의미심장한 눈길로 쏘아봐 준 서연은 나루의 핸드폰에 풀빌라 정보를 찍어 주었다.

동그란 손끝이 검색 버튼을 누르자마자 정보가 가장 위에 떴다. 나루는 신나는 마음으로 사진부터 구경했다.

“오오….”

사진 속에는 믿을 수 없는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동화 속에서 볼 법한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는데, 그 앞에 널따란 수영장이 펼쳐져 있어서 풍경이 꽤 괜찮았다. 게다가 풀빌라 안은 깨끗하니 침대도 여러 개 있었고, 욕조에는 알록달록한 불빛까지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나루가 눈을 반짝이며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자, 서연이 뿌듯해하며 코를 문질거렸다.

“나루 씨, 이런 곳 안 가 봤어요?”

“네에, 처음이에요. 너무 좋네요.”

“너무 귀엽다. 여기 수영장이 크게 하나 있는 거라, 다른 사람이랑 같이 쓸 거예요. 아마.”

“아아, 그런가요?”

풀빌라에 푹 빠진 나루가 홀린 듯이 화면을 넘겼다. 서연은 그런 나루를 제 자식처럼 귀여워하며,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다른 사람이랑 같이 수영장을 쓴다는 말은 즉, 규연이 질투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뜻이었는데, 나루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나루 씨, 수영하는 거 좋아해요?”

“네, 네, 물이 따뜻하면 더 좋아요. 춥지도 않고….”

“그럼 사장님한테 꼭 여기 들어가자고 해요. 사람들도 많아서 재미있을 거야.”

“네!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아이고, 우리 순진한 나루 씨. 속으로 키득거리던 서연이 나루의 등을 두어 번 토닥여 주었다. 아직도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지 못한 나루는 그저 화사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이럴 때 복수하는 거지, 뭐. 일하는 동안 규연의 재수 없는 언행에 스트레스를 받았던 서연은 사소한 복수를 선물했다. 규연이 똥줄 타는 모습을 직접 보지 못한다는 게 아쉬웠지만, 이후 나루에게 전해 들으면 그만이었다.

서연이 어딘가 음흉한 얼굴로 웃기 시작하자, 나루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왜, 왜 그러세요?”

“아니에요, 나루 씨. 이제 일하러 갑시다!”

시원스럽게 대답한 서연이 일을 서둘렀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연을 바라보던 나루도 정신을 차리고 자리로 돌아갔다. 속으로는 여전히 휴가 때 갈 풀빌라를 생각하는 중이었다.

규연이랑 같이 가면,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따뜻한 물에서 수영도 하고. 좋겠다. 바, 밤에는 그때처럼 섹스할 수 있을까. 벌써 마음이 들떴다.

“저기, 이 케이크 하나 꺼내서 포장해 줄래요?”

“아, 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다른 생각은 금물이었다. 일이 시작되고 나서부터는 눈 뜰 새도 없이 바빠서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래, 지금은 일에 집중하는 거야. 그리고 이따가 규연이한테 물어봐야지. 풀빌라 괜찮으면, 같이 수영도 하고, 밤에는 사랑도 나누자고…!

흠칫.

테이블에서 일을 처리하던 규연은 대뜸 밀려드는 불안감에 몸을 잘게 떨었다.

“뭐야, 이 소름 돋는 느낌은.”

팔을 쓸어내리던 규연이 일에 열중한 나루를 은근슬쩍 쳐다보고 시선을 거두었다. 습관적으로 나루를 응시한 후에는 아무 이상 없다는 걸 깨닫고, 다시 노트북 화면에 집중했다.

아무것도 아니었네. 송나루한테도 별 이상 없어 보이고.

규연의 속마음과 다르게 나루의 속은 새카맸다.

스파에서 섹스한다면 무슨 느낌일까. 규연이가 또 해 줄까. 그때 기분 좋았는데. 수영장에서는 못 하려나.

…규연이 들었더라면 기겁할 만한 수준이었다.

* * *

슬슬 해가 자취를 감추고 어둠이 찾아오려는 때.

가게는 더욱 바빠질 시간이었지만, 나루에게는 더없이 행복한 퇴근 시간이었다.

“나루 씨, 지금 스태프 룸 비었어요.”

“저 그럼 옷 갈아입고 올게요!”

“하하, 퇴근이라 신났구나. 갈아입고 나와요.”

오랜만에 마감을 벗어난 서연이 화사하게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늘 유니폼 입은 모습만 보다가 사복을 입은 걸 보니 꽤 낯설 정도였다.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 나루는 스태프 룸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옷만 갈아입고 나오면 기다리고 기다리던 퇴근을 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아까부터 규연이가 안 보이네.

스태프 룸 앞에 멈춰서서 매장을 빙 둘러보고 있을 즈음. 익숙한 뒷모습이 시선에 걸렸다.

카페 뒷문으로 나가고 있는 규연이 모습, 발견!

산만해진 나루는 옷을 갈아입는 것도 까먹은 채, 규연의 뒤를 몰래 쫓아 나갔다.

왜 여기로 나오나 했더니, 담배 피우려고 그랬구나.

카페 밖으로 나온 규연은 제 차 앞에 서서 여유롭게 담배를 태웠다. 나루가 발소리를 잘 죽인 탓일까, 아니면 규연이 둔한 걸까. 그는 나루가 자신의 뒤를 졸졸 따라왔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허공에 흩어지는 담배 연기를 멍하니 바라보던 나루는 조심스레 규연의 뒤로 다가가 속삭였다.

“규연아, 뭐 해?”

“와, 씨, 깜짝이야.”

“여기서 뭐 해?”

“하아, 놀랐잖아. 너 언제 따라 나왔어.”

속삭임에 화들짝 놀란 규연이 제 뒤에 찰싹 붙어 서 있는 나루를 발견하고 나서야 가슴을 쓸어내렸다. 동시에 손에 들고 있던 담배꽁초가 저 멀리 튕겨 나갔다. 나루는 바닥에 처참히 나뒹굴고 있는 꽁초를 보고, 슬그머니 다가가 그 앞에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는 손을 뻗어 꽁초를 주우려는데.

덥석. 다행히 규연이 그 손을 재빨리 낚아채 잡았다.

“더러워, 만지지 마.”

“피워도 괜찮은데….”

“됐어, 안 돼. 퇴근 준비해야지, 여긴 왜 나왔어.”

“어, 그게, 규연아. 나 궁금한 게 있어.”

규연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순수한 눈빛. 무언가를 진심으로 궁금해하는 표정. 유독 차분한 말투. 그 속에 섞인 출처 모를 광기. 아무래도 나루의 질문을 듣기 전에 충분한 마음의 준비가 필요할 듯했다.

“하아아….”

크게 심호흡한 규연은 마음을 한 번 가라앉힌 후, 고개를 끄덕였다.

“뭔데.”

“응. 규연아, 나 좋은 곳 발견했어. 수영장도 있대. 근데 거기서 섹스할 수 있을까?”

“…….”

이런 씨발. 마음의 준비를 더 단단히 해 놓을걸.

이건 뭐, 기습 공격 수준이 아니었다. 나루가 던진 핵폭탄급 발언에 규연은 그 자리에서 굳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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