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루의 휴가 (1)
꽝꽝 얼어 있던 바닥이 포근하게 녹아내린 여느 봄.
11일, 12일, 13일. 달력 숫자 위로 찌그러진 동그라미 세 개가 직직 그려졌다.
빨간색 펜으로 특정 날짜에 동그라미를 치고, 별 표시까지 야무지게 남긴 나루는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휴가다, 휴가.”
“쉬는 날에 대체공휴일까지 잘 맞았네.”
“응, 나 열심히 놀 거야.”
일을 다니기 시작하면서 일주일에 꼬박 이틀씩 쉬던 나루는 처음으로 연달아 3일이나 쉴 수 있게 되었다.
대체공휴일. 대체공휴일이라는 건 정말 좋은 거구나!
생활하면서 새로운 사실을 알아갈 때마다 가슴이 쿵쿵 뛰었다. 들뜬 표정으로 발을 동동거리던 나루는 제 뒤에 선 규연에게 냅다 안기고 봤다.
“아침부터 애교는.”
“우리 이때 같이 놀아?”
“…뭐, 예전에 못 간 호텔이라도 갈까. 요즘 호캉스 많이 간다던데.”
“호, 캉스?”
원래라면 정상적으로 출근할 예정이었던 규연은 나루의 말 한마디에 자연스럽게 휴식을 결정했다.
이 눈을 보고 어떻게 같이 안 쉰다고 말하냐. 그냥 지나치면 사이코패스 새끼지.
속으로 한숨을 삼키던 규연은 핸드폰을 꺼내 들어 이전에 알아놓은 호텔을 찾기 시작했다.
탁!
그런데 이게 웬걸. 그 오묘한 낌새를 알아챈 나루가 눈을 게슴츠레 뜨더니, 규연의 행동을 저지시켰다.
“내 휴가니까, 내가 알아서 할래. 내가 계획 짜면, 규연이 너는 따라 와.”
“…….”
“대답해야지, 유규연아.”
“아니, 그래도 되는데. 너, 할 수 있겠냐.”
“유규연 나 못 믿어? 에휴….”
대뜸 내뱉은 말은 나루 스스로 계획을 짜 보겠다는 것이었다. 계획이야 그렇다 쳐도, 아무런 문제 없이 호텔을 예약할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선 규연이 은근슬쩍 말리려 들자, 나루가 동그란 눈을 매섭게 뜨고 노려봤다.
하여간, 눈치만 더럽게 빨라서.
잠시 이어지던 정적이 깨지고, 규연의 체념한 목소리가 그 사이를 메웠다.
“마음대로 짜 봐. 나는 따라만 갈 테니까.”
“응! 규연아, 기대해.”
“…어, 정말 기대된다.”
신난 나루가 귀엽다는 듯, 허탈하게 웃어 보이던 규연이 하나도 기대되지 않는 말투를 뱉어냈다.
호텔이랑 모텔을 착각하지 말라고 미리 말해 줘야 하나. 얘도 그 정도는 알고 있으려나.
이런저런 근심에 망설이던 규연은 나루의 표정을 발견하고 바로 말을 아꼈다.
말 한번 잘못하면 물어뜯을 것 같은 표정.
으르르릉. 으르르.
이건 뭐, 사람 상태냐. 개 상태냐?
뜬금없는 나루의 경계에 황당해진 규연이 급하게 대화 주제를 돌렸다.
“일단 며칠 동안은 출근해야지. 나가자, 시간 다 됐어.”
“그래. 규연아, 혹시 나를 못 믿는다던가, 내가 막 이상한 짓 할까 봐 걱정을,”
“믿어. 믿는다. 송나루, 나 너 진심으로 믿어.”
“…가자!”
대화 주제를 돌리면 뭐 할까. 의심이 끊이질 않는데.
마지막까지 눈을 이상하게 뜬 나루가 규연을 하나하나 뜯어보기 시작하자, 위기를 감지한 규연이 나루가 원하던 말을 아낌없이 건네주었다.
믿는다는 말에 다시금 들뜬 나루는 규연의 팔을 이끌며 현관문을 힘껏 열어젖혔다. 뒷모습이 어찌나 발랄하고 상쾌해 보이던지. 규연은 오늘도 어디로 튈지 모르는 제 애인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걸어가는 날, 으음, 흐웅응.”
“신나냐, 걷는 거 되게 좋아하네.”
“응, 나는 걷는 게 좋아. 산책하는 거 같아.”
“…아, 산책.”
이건 생각지도 못한 대답인데. 존나 귀엽네.
속마음으로 나루를 귀여워하는 건 이제 일상이 되어 버렸다. 물론, 이런 속마음과 달리 겉모습은 평소처럼 무심하고 쿨해 보였다.
나루는 제 애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걷는 데 집중했다.
처음 보는 사람들, 이제 막 피어난 꽃들의 향기, 살랑이며 부는 봄바람, 바닥에 떨어진 벚꽃잎들. 따스한 봄의 거리는 나루가 좋아하는 것투성이었다.
벚꽃 날리는 거 좋아. 사람들 구경하는 거 재미있어. 향기로운 냄새 나는 것도 기분 좋아. 그리고 무엇보다, 규연이가 내 옆에 있어!
반쯤 뛰듯이 걷던 나루는 문득 머릿속에 떠오른 장면에 발걸음을 우뚝, 멈춰 섰다.
그래, 지금 다 완벽하고 너무 너무 좋은데…. 아쉬운 게 딱 하나 있었어.
그건 바로 붕어빵. 내가 제일 좋아하고 사랑하는 간식.
“송나루, 왜 그래.”
“…….”
“방금까지 신나 있더니, 왜.”
“봄이 오면….”
꼬르르륵.
새벽같이 일어나 아침을 챙겨 먹은 배에서 알림 소리가 울렸다. 이런 나루를 의아하게 바라보던 규연은 익숙하게 허리를 숙여 자그마한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
그래, 무슨 대단한 소리를 하는지 보자.
심각한 표정으로 나루에게 가까이 다가갔건만, 정작 나루가 내뱉은 말은.
“붕어빵을 못 먹어.”
“…….”
“봄이 오면, 붕어빵 파는 사장님이 사라져. 그래서, 붕어빵을 먹을 수가 없어.”
“…….”
고작 붕어빵을 먹을 수 없다는 게 다였다. 짜게 식은 규연과 달리 나루는 심각한 걸 넘어 절망에 빠져 있었다.
얘가 붕어빵을 이렇게나 좋아했었나. 겨울이 오면 출근길에 몇 개씩 먹곤 했지만, 이렇게 슬퍼할 줄은 몰랐는데. 그나저나 어이가 없네.
“하, 대신 봄에는 뭐 다른 걸 팔겠지.”
“…다른 거?”
붕어빵 하나에 울고 웃는 나루를 하찮게 바라봤으면서, 규연은 제법 희망찬 대답을 내놓았다. 맞는 말이긴 했다. 겨울 장사가 가면, 봄 장사가 오겠지.
그 말에 기운을 차린 나루가 잽싸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데굴데굴 굴러가는 눈동자가 어찌나 바쁘던지, 정작 앞에 서 있는 규연을 완전히 돌 취급하고 있었다. 묘하게 기분이 상한 규연이 나루의 시선을 제 쪽으로 돌리려 했을 때였다.
“야, 송나루.”
“나 저거. 저거 사 먹을래.”
“내 말 들려?”
“솜, 사, 탕. 그래, 저거.”
“…….”
송나루 눈 돌아있을 때 말한 내가 미친놈이지. 내가 미친놈이야.
나루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 웬 솜사탕 뭉치들이 보였다. 공원과 근접한 곳이라 그런지, 모양이 아기자기한 솜사탕을 파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붕어빵은 잠시 잊은 나루가 알록달록한 색감에 홀려 솜사탕 기계 가까이 다가갔다.
“요즘엔 신기하게도 나오네.”
“난 이거.”
“기다려.”
강아지 모양의 솜사탕을 발견한 규연이 신기하다는 양 중얼거리며 지갑을 꺼냈다. 기다리라는 말에 얌전해진 나루는 막 만들어지고 있는 솜사탕을 빤히 응시하는 중이었다.
기계 안에 막대를 넣고 휘휘 돌리면 기다란 실들이 와서 막 붙는구나. 신기해. 이런 거 처음 봐!
“이거 하나 주세요.”
“청년들이 참 귀엽네. 자, 여기요.”
“…….”
“아휴, 둘 다 잘생겼다. 인물이 아주 최고야.”
천 원짜리 몇 장을 건네고 솜사탕을 받던 규연은 부끄러움에 고개를 푹 숙였다. 나루 대신 솜사탕을 산 것뿐인데, 아무것도 아닌 일에 왜 이렇게 민망해지는 건지. 그러고 보니 솜사탕 기계 옆에 유독 아이들이 많았다. 이 사이에서 강아지 모양 솜사탕을 들고 있으려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받아.”
“…너, 너가 들래?”
“먹고 싶다면서.”
“어, 으응, 나는 저기 가서 먹을게.”
송나루 이게 진짜. 애들 있으니까 창피해서 지금 나한테…!
뒤늦게 나루의 계략을 알아챈 규연이 못 말린다며 걸음을 서둘렀다.
아이들 사이에 껴서 정신없이 솜사탕을 구경할 땐 언제고, 나루는 눈치를 살피며 규연에게 솜사탕을 맡겼다.
붕어빵 파는 곳에서는 안 이랬는데. 여긴 유독 아이들이 많아. 응. 그렇군. 이건 애기들만 먹는 거였어.
성큼 걸어가는 규연의 뒤를 설렁설렁 쫓아온 나루가 손을 쭉 뻗었다. 이쯤이면 거리도 꽤나 멀어졌고, 솜사탕을 받아도 괜찮을 듯했다.
“나 이제 줘도 돼.”
“자꾸 약은 짓만 골라서 하지.”
“약은 게, 뭐더라….”
“또 모르는 척한다. 네가 외국인이야?”
“오오와, 이거 진짜 맛있어! 입에서 없어져! 규연아, 신기해!”
“…그래, 맛있다면 됐다.”
솜사탕을 넘겨받자마자 나루가 입을 크게 벌려 퐁신한 실뭉치를 베어 물었다. 입 안에 들어가자마자 사르르, 녹아 사라지는 게 얼마나 재미있고 신기한지. 나루는 색다른 경험에 여러 번씩이나 솜사탕을 베어 물며 감탄했다.
규연은 나루에게 잔소리를 하면서도 입가에 띤 미소를 지워내지 못했다. 이제는 현실 세계에 익숙해져서 강아지 같은 모습이 많이 사라졌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가끔 순수한 면을 보여줄 때마다 심장이 쿡쿡 쑤셨다.
송나루는 변함없이 귀엽다. 가만히 있어도, 강아지처럼 굴어도. 다른 사람이 보기에 모자라 보여도.
나는 아니까, 얘한테는 아직 이 모든 게 처음이라는 걸.
“달고 맛있어. 그리고 이거 이렇게 뜯어져. 뭉치면 작아진다, 와….”
“먹는 거야, 가지고 노는 거야.”
“신기하잖아. 이거 봐, 크게 뭉쳤어.”
“그걸 그렇게 크게 뭉치면 대체 어떻게 먹, 우븝!”
“이렇게 먹어.”
솜사탕을 크게 뜯어내 동그랗게 뭉친 나루가 핀잔을 늘어놓는 규연의 입에 그것을 무작정 쑤셔 넣었다. 덕분에 규연은 무지막지한 설탕 덩어리를 한꺼번에 삼켜야만 했다. 미치도록 달달한 맛에 인상을 찌푸린 규연이 나루의 머리카락을 장난스레 헤집었다.
“이게 멋대로.”
“맛있지.”
“달아, 이렇게 말고 조금씩 뜯어 먹어.”
“아아, 그렇게 먹으면 많이 달구나. 이제 알겠다!”
“…….”
엉뚱한 건지, 영악한 건지 헷갈리게 하는 것도 여전하고. 참. 내 애인이지만 대단해.
체념하듯 가라앉은 규연의 눈동자에 마냥 해맑은 나루의 얼굴이 비쳐 보였다.
조금씩 뜯어 먹으니까 맛있다! 그런데 이건 애기들만 먹는 거니까. 앞으로 못 사 먹어. 아껴 먹어야지.
규연에게 솜사탕이 먹고 싶다고 하면 얼마든지 사 줄 텐데, 나루는 아이들이나 먹을 법한 간식이라는 정의를 내리고 아쉬워했다.
행복한 얼굴로 솜사탕을 먹는 나루와 그 모습을 사랑스럽게 여기며 바라보는 규연. 두 사람은 어느새 완벽한 커플의 분위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게다가 기분 좋은 바람과 함께 떨어지는 벚꽃까지 맞고 있으니, 청춘이 따로 없었다.
그저 평소와 같은 출근길을 걸어왔을 뿐인데, 이렇게나 많은 행복이 따르다니.
나루는 두 입꼬리를 싱글벙글 올린 채 가게 문을 열었다.
딸랑-
봄과 유난히 잘 어울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오늘도 즐거운 출근! 조금만 참으면 규연이랑 신나는 휴가!
한껏 업된 발걸음으로 들어온 나루는 가장 먼저 보이는 서연에게 손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나루 씨, 좋은 아침! 사장님도 안녕하세요!”
가게 문을 열자마자 심드렁한 얼굴로 변한 규연이 직원들에게 손을 들어 올리며 대충 인사를 건넸다. 나루는 한 명도 빠짐없이 인사하고야 말겠다는 마음가짐으로 매장 이곳저곳을 정신없이 들쑤시고 다녔다. 파티시에들에게도, 서연에게도 인사를 마쳤으니 남은 건, 구석에서 청소를 하고 있는 건후 뿐이었다.
찰싹!
장난스레 다가간 나루는 건후의 등을 손바닥으로 내려치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 좋은 아침이야.”
“어, 좋은 아침.”
“응, 그런데 너 왜 여기서, 어?”
그렇게 건후와도 상쾌한 아침 인사를 끝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나루의 밝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