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루의 해피 메리 크리스마스! (6)
“규연아, 내 크리스마스 선물!”
“이런 건 언제 샀어.”
“저번에 샀는데, 규연이가 열받게 해서 창문 밖으로 던졌었어. 그래도 고장 안 났어! 괜찮아.”
“아…….”
열받아서 창문 밖으로 내던졌다는 말을 이렇게 화사하게 해도 되는 건가. 잠시 멈칫, 하던 규연은 제 손목을 감싸는 팔찌의 느낌에 다시금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값비싼 명품도 아니고, 자신이 즐겨 찾던 디자인도 아닌 평범한 팔찌였지만, 규연은 나루가 준 이 팔찌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마음에 들어? 응?”
“어, 마음에 들어. 예쁘네.”
“그러면 평생 하고 다녀야 해.”
“알겠어, 평생 하고 다닐게.”
귀여운 요구에 웃음을 흘리던 규연이 나루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밤이라 그런지 손목에 찬 팔찌가 유난히 반짝이며 빛났다. 규연은 뿌듯한 얼굴로 팔찌를 바라보다가, 제 가까이에 다가와 있는 나루를 힘껏 끌어안았다.
포옥.
패딩에 둘러싸인 자그마한 몸이 규연의 품에 쏙 들어왔다. 옅은 숨소리가 안에 갇혀 색색거리자 무언가의 안정감마저 느껴졌다. 습관처럼 얼굴을 묻으려던 나루는 번뜩, 정신을 차리고 멀어졌다.
맞아, 나 아파. 감기 걸렸지. 규연이한테 감기라도 옮으면 큰일이야. 규연이는 절대 아프면 안 돼. 응, 안 돼. 절대, 절대로 안 돼.
시끄러운 속마음을 숨기며 떨어진 나루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떨어지니, 기분 좋게 안고 있던 규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어디 가.”
“아니야. 안지 말자.”
“붙을 땐 언제고, 이제는 또 피하는 거야? 송나루, 밀당 그만해. 사람 피 말릴 일 있냐.”
“사람 피를 어떻게 말려?”
“…….”
그래, 이래야 송나루지. 이렇게 엉뚱해야 송나루답지.
착잡함에 투정 섞인 말을 내뱉은 규연이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나루에게는 밀당을 하고 있다는 투정보다, 사람 피를 대체 어떻게 말린다는 건지가 더 궁금한 모양이었다.
어이가 없는데, 저런 점이 또 귀엽단 말이야. 내가 호구지. 내가 호구야.
규연이 속으로 온갖 생각을 하는 동안, 나루는 순진한 낯으로 그런 규연을 올려다보는 중이었다.
곧, 규연의 외투 끝자락이 팽팽하게 잡아당겨졌다.
“응? 규연아, 사람 피를 어떻게 말리냐니까. 내가 규연이 피 말려?”
“아니, 아니다.”
“왜, 나 궁금한데.”
“그냥 안아 줘.”
“그건 싫어. 안 돼.”
또 한 번의 거절이었다. 나루의 단호한 대답에 말문이 막힌 규연은 진심으로 마음이 상했다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 나루는 규연에게서 한 발자국 더 떨어져 섰다. 그리고는 스킨십을 아예 허용하지 않겠다며 손으로 엑스 자를 그렸다. 어처구니없는 행동이었다.
“내가 또 뭐 서운하게 한 거 있어?”
“아니, 없어.”
“그런데 왜 안 된다고 해.”
“나 아파. 감기 걸렸잖아. 옮으면 규연이도 아플 테니까.”
입술을 삐죽 내민 나루가 속상한 어투로 중얼거렸다. 지금 누구보다 스킨십을 원하는 사람은 규연이 아닌 나루였다.
여태 어색했던 분위기도 깨졌고, 어젯밤에는 그토록 바라던 섹스까지 했는데. 하필 감기 때문에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는 상황이라니! 말도 안 됐다.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잠시 멍해져 있던 규연은 헛웃음을 흘려보냈다.
감기가 옮을까 봐 피한 거라고? 참 나.
“괜찮아.”
“아니, 안 되는, 으웅!”
막무가내로 다가온 규연이 나루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잡아끌어 품에 안았다. 동시에 두 입술이 미지근하게 맞닿았다. 놀란 나루가 딱 붙은 몸을 치워내 보려고 했으나, 규연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규연의 높은 콧대가 나루의 말랑한 볼에 닿았다. 고개를 비틀 때마다 스치는 느낌이 간지러워서 슬쩍 웃음을 흘리면, 규연 또한 입꼬리를 올리는 게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으, 으읏.”
“송나루, 키스할 때는 입을 더 벌려.”
“하, 유규연 야해. 규연이 야해. 나 숨도, 못, 으읍!”
중간에 입술을 뗀 규연이 나루에게 숨 쉴 틈을 만들어 주었다. 질척하게 닿아 있던 입술이 멀어지자 발갛게 달아오른 나루의 얼굴이 드러났다.
번들거리는 입술, 살짝 물기가 고인 맑은 눈동자. 어느 곳 하나 자극적이지 않은 부분이 없었다.
침착하게 마음을 다스리려던 규연은 참지 못하고 또다시 입술을 맞대었다. 수다스럽게 말을 터뜨리던 나루는 어쩔 수 없이 입술 사이를 벌려야만 했다.
춥, 츄읍, 하고 질척이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규연은 젤리처럼 말랑거리는 입술을 살짝 물기도 하고, 혀끝으로 훑어 보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나루의 어깨가 움찔거려서 건드리는 맛이 있었다. 놀이터에서의 키스라니. 설마, 밖에서 이런 짓까지 할 줄은 몰랐는데.
속으로 현실을 자각한 규연은 적당히 마무리하고 들어가야겠다며 나루의 입술에 두어 번 짧게 입을 맞추었다.
“으응…!”
“읏, 야!”
“더, 더 해. 더 하자. 규연아.”
“여기 밖이야, 잠깐, 송나루.”
“으웃, 으….”
키스를 끝낼 때마다 입 맞춰 주던 습관 때문인지, 나루가 무언가를 눈치채고 규연의 몸에 매달려왔다. 이왕 닿은 거, 자기가 만족할 때까지 하려는 작정이었다. 나루는 자신을 떼어내려는 규연을 밀어붙이며 일부러 입술을 여러 번 부딪혔다.
쪽, 쪽, 쪼옥.
차마 깊게 이어지지 못한 입맞춤에 아쉬워하고 있으니, 규연이 이때를 노려 몸을 완전히 떼어 놓았다.
“유규연 뭐 해. 나는 이제 시작인데.”
“나루야, 송나루? 여기 밖이라니까.”
“그래서 뭐! 아무도 없잖아!”
“아무도 없긴 무슨, 네 친구들이라던 강아지들이, 뭐냐?”
강아지 핑계를 대며 집으로 들어가려는 규연의 계획이 무참히 실패했다. 자신만만하게 아래를 가리켰건만, 분명 방금까지 앉아 있던 강아지들이 다 어디로 사라지고 없었다.
누가 송나루 친구들 아니랄까 봐. 이럴 때만 죽이 잘 맞아요. 아오.
황당해진 규연이 바닥을 보며 눈을 깜빡이자, 나루가 강제로 얼굴을 틀었다. 키 차이가 나는데도 야무지게 까치발을 들고 서서 두 팔을 쭉, 내뻗고 규연의 뺨을 움켜쥔 게 앙증맞았다.
“그럼 들어가서 하는,”
“나 규연이 사랑해. 규연아 메리 크리스마스!”
“…그래, 나도 사랑해. 메리 크리스마스.”
“응, 규연아. 이제 허리를 숙여. 나 피 마르는 거 보고 싶어?”
“지금 뭐라는, 야, 송나루!”
무작정 메리 크리스마스를 외친 나루가 예고 없이 돌진했다. 이번에는 가볍게 하고 떨어지는 입맞춤이 아니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배우는 게 유독 빠르다, 했었다. 나루가 아까 배운 말을 적절히 사용하며 규연을 꾀어냈다. 규연이 해 주던 키스를 기억하고 어색하게나마 혀를 움직이는 게 발칙하기까지 했다.
“으응, 흣.”
“윽….”
입술은 살짝만 깨물어야 하는 건데, 송곳니로 콕 깨물어 놓지를 않나. 꼭 강아지가 핥는 것처럼 입술 위를 간지럽히지를 않나. 실력이 영 서툴렀다. 그래도, 규연은 나루가 해 주는 키스가 좋았다. 자신이 나루의 모든 처음을 갖게 된 것 같아서, 벅차오르는 느낌까지 들었다.
“규, 규연아.”
“어, 왜.”
“키스할, 때는, 입술을 더 벌려야 하는 거야.”
“하, 참…….”
나루의 말 한마디에 웃음이 실실 새어 나왔다. 나긋한 시선으로 아래를 내려다본 규연은 진지한 나루의 얼굴을 발견하고 다시 키스를 이어나가 주었다.
고개가 비틀리며 혀가 더 깊숙이 얽혀들었다. 규연의 움직임에 버겁게나마 따라가던 나루는 금세 숨이 차는 걸 느끼고 어깨를 툭, 툭, 쳤다.
그러나, 규연은 봐주지 않고 행위를 이어갔다. 끝으로 입천장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니 주먹 쥐고 있던 손이 스륵, 풀려 떨어졌다.
“으, 흐읏!”
규연은 어떻게 해야 나루가 좋아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여린 살을 간지럽히듯 지나치면 아니나 다를까, 몸을 크게 움찔거렸다.
아, 존나 귀여워. 송나루 미쳤나. 얘는 왜 봐도 봐도 귀엽냐. 질리지가 않냐고, 왜.
속으로 주접 섞인 말을 되뇌던 규연이 나루의 애를 태우듯 혀를 느슨하게 움직였다.
“하, 하아…….”
“이제 그만.”
“응, 그만…. 나 힘들어.”
입술을 떼어내자 나루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볼도, 코끝도, 귀까지 온통 빨갛게 물든 게 많이 추운 모양이었다.
멍해진 얼굴로 허공에 흩어지는 입김을 바라보던 나루는 그대로 규연의 품에 몸을 맡기듯 안겨들었다.
“들어가자. 너 추워.”
“응. 들어가.”
“다음에는, 오늘 가기로 했던 호텔 꼭 데려갈게.”
“…나도 규연이 데려갈 거야.”
목도리를 고쳐 매주던 규연이 나루의 볼을 장난스레 꼬집었다. 그러자 순순히 꼬집혀 준 나루가 규연의 손목에서 찰랑이는 팔찌를 매만졌다.
두 사람은 또 하나의 약속을 했다. 다음에는 꼭 크리스마스에 못 간 호텔에 가기로 말이다.
거기서는 둘이서 나란히 와인도 마셔 보고, 따듯한 욕조에 몸을 담그자고.
기대에 부푼 나루는 들뜬 걸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다음에도, 그다음에도, 또 그다음에도, 규연이랑 같이 있을 거야.”
“제발 그래 줘라.”
잡은 손을 앞뒤로 흔들던 나루가 해맑게 이야기했다. 그저 지나가듯 중얼거린 말이었지만, 규연은 사소한 것 하나 놓치지 않고 다정히 대답해 줬다.
규연이는 최고야. 다정해. 친절해. 내 천사!
대충 툭툭 내뱉는 행동과 말투였으나, 규연은 나루에게 언제나 천사 같은 애인이었다.
고요한 밤, 쏟아져 내리는 함박눈 사이로 사이좋은 두 사람의 모습이 멀어져갔다.
우여곡절이 많았던 12월.
두 사람만의 크리스마스는 따스하고 행복하게 마무리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