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루의 해피 메리 크리스마스! (5)
규연은 당돌한 말에 두 손 두 발을 다 들고 말았다. 오랜만에 조금 놀려 줄 작정이었는데, 놀리기는 무슨. 오히려 나루에게 역으로 당하고 만 것이다. 못 말린다며 큭큭거리던 규연은 나루의 두 뺨을 아프지 않게 짓누르며 감싸 안았다.
“그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잘도 한다, 송나루.”
“…….”
“귀여워, 네가 제일 귀여우니까 삐친 표정 풀어.”
규연이 자꾸만 웃는 게 신경 쓰였는지, 눈썹을 일그러뜨린 나루가 훅 들어온 칭찬에 다시금 온순한 표정을 지었다. 볼이 눌려 톡 튀어나온 입술에 두어 번 입을 맞추던 규연은 손을 자연스레 뻗어 숨겨 놓았던 마지막 선물을 집어 들었다.
자그마한 네모 모양의 케이스. 겉이 검은색 벨벳 천으로 감싸져 있어 고급스러운 느낌을 풍겨냈다.
규연은 나루의 시선을 놓치지 않고 마주하며, 손에 든 케이스를 조심스럽게 열었다.
“손 내밀어 봐.”
“손.”
“쫙 펴야지.”
“……?”
규연의 앞에 내민 새하얀 손이 뻣뻣하게 펴졌다. 멀뚱히 눈을 깜빡이던 나루는 어딘가 분주한 규연의 행동에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어?
어어?
그거다. 반지. 반지다!
검은 케이스 안으로 은색 링 두 개가 반짝였다. 규연은 나루가 감탄하기도 전에 반지 하나를 꺼내었다.
“……!”
곧, 서늘한 느낌의 반지가 나루의 얇은 손가락에 느릿하게 끼워졌다. 빛을 받아 반지가 반짝일 때면, 나루의 두 눈 또한 별을 박아놓은 듯 초롱초롱해졌다.
언젠가, 꽃반지를 손에 끼우고 규연에게 고백했던 날이 떠올랐다. 꽃반지였어도 정말 정말 행복했는데, 내 손에 진짜 반지가 끼워졌어. 심지어 규연이랑 똑같은 반지.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을 한 나루가 제 손을 요리조리 뒤집어가며 반지를 확인했다. 앞에서 봐도, 뒤에서 봐도, 옆에서 봐도, 어디 흠잡을 곳 없이 예쁜 반지였다.
“그렇게 좋냐.”
“응, 좋아. 규연아, 나 이거 평생 끼고 있을래.”
“나도 끼워 줘야지.”
“결혼하는 거 같아….”
“하, 참.”
미세하게 떨리는 손으로 반지를 집어 든 나루가 규연의 굵직한 약지에 커플링을 꼬옥, 끼워 넣었다. 서로 반지를 나누어 가지는 것. 나루는 이런 장면을 본 적이 있었다.
결혼식. 결혼하면 이렇게 반지를 나눠 끼던데.
그러고 보니 꽃반지를 끼웠을 때도 결혼을 기대했던 기억이 있었다. 물론, 진짜 결혼은 아직 힘들겠지만, 나루는 커플링을 나눈 것만으로 평생을 약속한 기분을 느꼈다.
규연이 크리스마스 선물 최고!
성공적인 크리스마스 파티에 홀로 뿌듯해하던 나루가 주먹을 앙증맞게 쥐었다.
“아, 맞다!”
그러던 중, 까먹고 있던 일이 머릿속에 번뜩 떠올랐다.
며칠 전, 규연에게 줄 크리스마스 선물로 구매했던 팔찌. 싸우는 바람에 놀이터 바닥에 묻었던 그 팔찌!
순간 나루의 눈이 댕그랗게 커졌다. 차분하던 분위기는 어느새 정신없이 바뀌어 있었다.
“왜, 왜 일어서는 건데.”
“콜록! 너한테 줄 거 있어!”
“기침하면서 어딜 가려고. 너 아직 다 안 나았어, 송나루.”
“아니야, 오늘 줘야 해. 오늘 꼭 줘야 한단 말이야.”
크리스마스이기도 하니 그 팔찌를 당장 찾아와야 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나루가 파자마 위로 외투를 걸쳐 입기 시작하니, 황당해진 규연이 손을 잡아끌며 말렸다. 몸도 다 낫지 않았는데, 밖으로 나가는 걸 쉽게 허락할 리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루의 몸은 어떻게든 뛰쳐나갈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상체는 앞으로 기울었고, 다리는 제자리에서 구르며 현관까지 도달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하여간, 분위기가 조금 잡힌다, 싶을 때 우당탕탕 시끄러워지는 건 여전했다.
“놔, 규연아! 나 빨리 가야 해!”
“기다려 봐, 기다려. 좀. 옷이라도 제대로 입고 나가.”
“나 괜찮은데….”
“내가 안 괜찮아.”
밉지 않게 핀잔을 늘어놓은 규연이 드레스룸으로 들어가 롱패딩과 털목도리를 안고 나왔다. 모두 나루 전용이었다. 흰색 롱패딩에 연하늘색 털목도리까지 중무장하게 된 나루는 뒤뚱거리며 양말을 신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규연이 절대 내보내 주지 않을 기세라, 나루는 답지 않게 한 번에 말을 잘 들었다.
“이제 가자!”
“같이 가, 같이.”
준비가 끝나자마자 현관문을 연 나루는 발을 동동 구르며 엘리베이터 버튼을 연달아 눌러댔다. 그런다고 엘리베이터가 빨리 올라오는 것도 아닌데, 유독 다급한 게 평소와 달랐다.
<1층입니다. 문이 열립니다.>
1층에 도착한 나루는 곧바로 놀이터를 향해 달렸다. 덕분에 여유롭게 뒤따라오던 규연까지 걸음을 바삐 움직여야만 했다.
타다다닥.
저 멀리서부터 수상한 낌새를 눈치챈 나루가 누군가를 위협하듯 일부러 발소리를 내며 뛰었다. 제 나름대로 도둑을 쫓기 위해 위협을 가하는 거였다.
낑, 끼잉. 멍! 멍!
그렇게 막 놀이터 입구에 다다랐을 때였다. 나루는 허망하고도 반가운 얼굴로 위협을 멈추었다.
“너희들…….”
팔찌를 묻어 놓은 땅 앞에 나루의 소중한 친구인 강아지들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마치 밤마다 팔찌를 지키기라도 한 모양새로 말이다. 감동적인 상황에 눈물을 글썽이던 나루는 그 앞으로 다가가 제 친구들을 차례로 쓰다듬어 주었다.
“고마워, 고마워, 고마워. 나 없을 때 팔찌 지켜 줬어?”
멍! 멍멍!
‘응! 우리 친구잖아. 네 물건은 아무도 안 건드렸어!’
여러 번 나루의 고민 상담을 들어 주었던 강아지 한 마리가 헥헥거리며 웃었다. 나루는 고맙다는 뜻으로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이건 뭐, 내가 어떻게 봐야 하는 건지.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규연은 어처구니가 없어져 시선을 돌려 버렸다. 강아지들과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하는 나루가 신기하면서도 낯설어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뭐, 대충 저 개들한테 도움을 받은 것 같긴 한데.
한 걸음 조용히 물러난 규연은 나루가 강아지들과 마저 대화할 수 있도록 자리를 피해 주었다.
아니, 정확히는 자리를 피해 주려던 참이었다.
“야, 잠깐, 송나루!”
“응?”
잠시 눈을 돌리는 사이에 나루가 상상도 못 할 짓을 벌이고 있었다.
파바바밧.
손가락 끝을 야무지게 세우고, 눈 덮인 땅 위를 무작정 파내는 꼴이라니. 규연은 오랜만에 기겁했다. 마치 우유 없는 시리얼에 얼굴을 처박고 있던 그 시절의 나루를 마주한 느낌이었다.
“뭐 하는 거야, 손 다 까지게!”
“여기 밑에 있어. 내가 너한테 줄 거.”
“무슨 소리야, 다치니까 하지 마. 손가락 다 망가지잖아.”
“크응, 괜찮은데. 내가 꼭 찾아서 너한테 줄 거야.”
규연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나루가 코를 들이마시며 땅 파기를 다시 시작했다. 여러 사람이 와서 말려도 전혀 들어먹지 않을 기세여서, 규연은 말없이 나루의 옆에 쪼그려 앉았다.
이게 뭐 하는 거냐. 이게 맞는 거냐? 내가 지금, 놀이터에서, 쪼그려 앉아서, 어? 땅이나 파고 있는 게?
어마하게 밀려오는 자괴감에 괴로워하던 규연은 옆을 돌아보곤 한숨을 내쉬었다. 땅을 파고 있는 나루의 얼굴이 너무나 진지해서 마냥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 씨발. 모양새가 중요하겠냐. 송나루가 이러고 있는데, 뭔지 몰라도 빨리 찾고 집으로 데리고 들어가야지.
사악, 팍! 팍!
나루의 하찮은 힘으로 조금씩 파내어지던 흙덩이가 뭉텅이로 딸려 나왔다. 규연이 자신의 큰 손과 힘을 이용해 요령껏 땅을 파낸 것이었다.
“규연아, 너는 이런 거 하면 안 돼!”
“뭐가 안 돼. 그러는 너는 되고?”
“내가 숨겼으니까….”
“뭐 어떻게 하면 여기에 물건을, 아.”
툴툴거리면서도 열심히 땅을 파내던 규연이 말을 급히 멈췄다. 나루가 무슨 이유로 이런 곳에 물건을 숨긴 걸까, 하다가 저번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서로 감정이 비틀어져 싸웠던 날. 급하게 뛰쳐나간 나루를 놀이터로 잡으러 온 적이 있었다. 그땐 그냥 화만 났는데, 이제야 나루가 뭘 하고 있었는지 알게 된 것이다. 미안한 마음이 든 규연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고 물건을 찾는 데 집중했다.
파바박.
구멍이 조금 더 깊어지자, 힘을 낸 나루가 강아지의 습성을 살려 손을 빠르게 움직였다. 힘은 약해도 땅 파는 걸 어찌나 잘하는지, 감탄사가 나올 지경이었다.
“찾았다!”
“뭔데 그게?”
“규연이한테 주려고 산 크리스마스 선물.”
2분 정도가 지났을 즈음, 흙더미 사이에서 무언가 반짝 빛을 냈다. 나루는 익숙한 체인을 손으로 끄집어내며 기뻐했다. 규연이 궁금해하며 기웃거리자, 아예 등을 돌린 나루가 시선을 차단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규연이한테 흙 묻은 팔찌를 줄 수는 없어!
“호오오, 후우!”
팔찌 체인 사이에 끼인 흙까지 꼼꼼하게 불어 없앤 나루가 패딩 소매로 겉을 깔끔히 닦아냈다.
규연은 꼬물거리는 뒷모습을 바라보다 슬며시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어이가 없는데, 또 선물을 주겠다면서 저러고 있는 게 사랑스럽기도 하고. 여러 감정이 교차했다.
“너희들도 이거 지키느라 고생 많았다. 내 말 알아듣나.”
왕왕!
나루가 팔찌를 닦으며 광을 내는 사이, 규연이 멀뚱히 앉아 있는 강아지들을 차례로 쓰다듬어 주었다. 강아지들에게 말을 거는 게 낯설고 어색했지만, 또 나루와는 말이 통하고, 힘들 때마다 친구처럼 옆에 있어 주었다니 고마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알아듣는대. 고맙대.”
“아, 그러냐.”
“응, 응.”
무심하게 강아지들의 대답을 통역해 준 나루가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규연은 멋쩍게 목 언저리를 긁적이다가도, 제 발치에서 헥헥거리고 있는 강아지들을 귀엽다는 듯 바라보았다.
꼬질꼬질한 게 귀엽네. 저 흰 강아지는 꼭 송나루 귀랑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쓸데없는 생각을 반복하고 있었을까. 손에 든 팔찌를 탁탁, 쳐내며 마무리한 나루가 해맑게 뒤돌아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