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루의 해피 메리 크리스마스! (4)
미쳤나, 유규연. 송나루 지금 아프다. 원한다고 해 주면 더 아파. 일단 자게 두고, 그렇게 하고….
잠깐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나루의 간절한 눈빛이 끊이지 않고 날아왔다. 초롱초롱하고, 별처럼 반짝이는 부담스러운 눈빛.
“자고 일어나서 상태 괜찮아지면, 그때 파티하자. 어? 눈 감아.”
“그러면, 같이 자….”
“알겠어, 네 옆에서 같이 잘게.”
끝내 넘어가지 않은 규연이 다정스레 나루를 달랬다. 제 작전이 먹히지 않는다는 걸 알아챈 나루는 규연의 옷 끄트머리를 잡아끌며 함께 잠들기를 요청했다. 이런 것 정도는 얼마든지 해 줄 수 있었다. 규연은 먹은 그릇을 치우고 돌아와 침대에 누워, 나루의 몸을 품속에 포옥 껴안았다.
새액, 새액, 옅은 숨소리가 품 안에서 웅웅 울렸다. 가만히 잠드는가, 싶던 나루는 대뜸 고개를 들어 규연의 귀에 속삭였다.
“규연아, 이제 우리 많이 해.”
“뭘?”
의미심장한 목소리에 위기를 감지한 규연이 조금 거리를 두며 대답했다.
“섹스. 많이 해. 입으로도 할 수 있대. 나 입 크게 벌릴 수 있어.”
“…자자, 송나루.”
“규연이 거는 크니까,”
“이게 진짜. 그딴 건 또 언제 검색해 본 거야.”
아니나 다를까, 나루의 끈질김이 다시 발동되었다. 애써 모르는 척하며 재우려고 했는데, 나루는 포기를 모르고 부끄러운 말들을 내뱉었다.
어처구니없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던 규연이 나루의 눈꺼풀을 손바닥으로 덮어 주며 등을 토닥였다. 맑게 뜨인 눈이 지나치게 순수해서, 계속 쳐다보고 있자니 괴로웠다.
그 뒤로도 한참을 보채던 나루는 제풀에 지쳐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
“송나루, 자?”
“…….”
드디어 자네.
나루가 완전히 잠들었다는 걸 확인한 규연은 그제야 한시름을 놓았다. 그리고는 곧장 방을 빠져나와 부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 뭐부터 해야 하냐.”
어쨌든 오늘은 크리스마스였다. 커플들의 파티와도 같은 크리스마스.
나루는 이전부터 크리스마스에 대한 환상을 품어 왔다. 그걸 잘 아는 규연이기에 이날을 시시하게 넘길 수 없었다.
어디 데리고 나가기에는 몸이 아프고,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하자니 나루가 서운해할 것 같고.
결국 내린 결론은, 집에서 간단히 크리스마스 파티를 즐기는 것이었다.
규연은 어제 새벽에 주문시킨 파티용품들을 모아 거실로 끌어 왔다. 뭐부터 손대야 할지가 고민이었으나, 일단 아무거나 시작하다 보니 시간이 금세 흘렀다.
쉬익, 하는 바람 소리와 함께 빨간색 풍선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풍선을 불던 규연은 문득 TV 속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헛웃음을 쳤다.
예전 같았으면 이런 건 구질구질하다고 질색했을 텐데, 나 왜 이러고 있냐.
어색한 행동에 스스로 어이가 없다가도, 방에서 자고 있을 나루를 생각하니 손이 저절로 움직였다.
두 시간 정도가 흘렀을까. 규연이 애를 쓴 덕분에 거실이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한껏 꾸며졌다.
벽에는 초록색과 빨간색 풍선이 알록달록하게 붙어 있었고, 나루가 좋아할 만한 반짝이는 장식도 한가득 달아 놓았다.
규연이 준비한 건 이게 끝이 아니었다. 거실에 놓인 탁자 위로 화려한 모양의 크리스마스 케이크가 놓였다. 그 옆에는 나루가 좋아하는 마카롱과 각종 디저트가 한가득 쌓였다.
“이건 뭐, 크리스마스 파티가 아니라 송나루를 위한 파티인데.”
말은 퉁명스럽게 하면서도 뿌듯하게 미소 지은 규연이 마지막으로 준비한 선물을 챙겨 적당한 곳에 숨겨 놓았다.
시간이 정신없이 흘러가는 동안, 나루는 행복한 꿈에 빠져 있다가 눈을 떴다.
“규연아…?”
습관적으로 옆자리를 매만지던 나루가 규연이 없다는 걸 깨닫고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부스럭, 탁.
나루의 귀가 쫑긋거렸다.
거실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 뭐지.
호기심을 가득 품은 나루가 조심스레 문 쪽으로 다가가 귀를 가져다 댔다. 밖에서는 규연이 무언가를 하고 있는 건지 자잘한 소음이 끊이지 않았다.
덜컥!
결국, 궁금함을 참지 못한 나루가 문을 열어젖혔다. 마침 방으로 향하던 규연은 나루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놀라 가슴을 쓸어내렸다.
“규연아!”
“몸은 좀 어때, 열은 안 나고?”
“이거 다 뭐야? 풍선, 이거 반짝이는 거 신기해. 예쁘다. 이거 규연이가 한 거야? 저거 케이크도 있네? 하얀색 생크림 맛있겠다. 규연이가 만들었어?”
규연이 나루의 몸 걱정을 하는 사이, 수많은 질문이 폭탄처럼 쏟아져 나왔다. 나루는 규연의 말 따위 들리지 않는 듯 행동하며 거실을 둘러보기 바빴다.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파티 분위기. 나루는 깨자마자 최상의 기분을 맛보았다.
신이 나서 그런지 발걸음이 절로 동동거리고, 엉덩이가 씰룩거렸다. 어제 규연과 격한 행위를 이어가느라 허리가 아플 법도 한데, 나루는 꿋꿋하게 참으며 제 신난 감정을 표출했다.
“들떠서는.”
“왜? 규연아, 이거 최고다. 나 이거 사진 찍어서 자랑할래. 그래도 돼?”
“일단 진정해 봐. 열 있는지부터 좀 보고.”
“열 안 나. 나 괜찮아. 크리스마스 파티하면 괜찮아.”
쪽, 쪽, 쪼옥.
잔뜩 들떠서 헤실거리던 나루가 벅차오르는 감정을 참지 못하고 규연에게 달려들어 입 맞췄다. 귀엽고 앙증맞은 뽀뽀 소리에 규연이 힘 풀린 웃음을 내뱉자, 나루 또한 행복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행복하다! 해피 해피 크리스마스! 규연이랑 화해도 하고! 크리스마스 파티도 하고! 귀여운 케이크도 먹고!
나루는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방방 뛰어댔다. 아마, 강아지의 모습이었다면 꼬리가 프로펠러처럼 빙빙 돌아갔을지도 모른다.
나루의 이마 위로 손을 올려 보던 규연은 열이 내렸다는 걸 확인한 후에야 안심했다.
“일단 앉아 봐.”
“응.”
“케이크만 보지 말고.”
“응.”
“내가 보이긴 해?”
“응.”
하나도 안 보고 있으면서, 참 나. 어이가 없어요.
규연이 케이크에 푹 빠진 나루를 여러 번 불러 보았으나, 고정된 시선은 어째서인지 떼어지지 않았다.
그 모습이 천진난만해서 마냥 웃던 규연은 불을 끄고, 케이크 위의 촛불을 환하게 켰다. 어두컴컴한 거실 사이로 붉은빛 촛불이 일렁였다. 고요하고도 어딘가 로맨틱하기까지 한 분위기에 나루의 두 뺨이 복숭아처럼 물들었다.
TV 드라마에서 보던 장면. 나도 규연이랑 할 수 있다.
“촛불 끌 땐 소원 비는 거라고 하던데. 소원 빌어, 나루야.”
“소원? 소원 빌면 이루어져?”
“뭐, 그렇겠지.”
“으음, 알겠어.”
규연이 나름 낭만적인 이야기를 건넸다. 나루는 소원을 골똘히 고민하다가, 눈을 질끈 감고 두 손을 모았다. 그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규연은 나루 몰래 사진을 두어 장 찍어 놓았다. 딱 봐도 이런 식으로 파티를 즐기고, 케이크 위의 초를 부는 게 처음인 듯해서 기록을 남겨 준 것이었다.
“으음, 규연이랑 매일 같이 있게 해 주세요. 그래서 매일 출근도 같이 하고, 그리고 집에 오면 매일 섹스도 하게 해 주세요. 유규연이 나랑 안 싸우게 해 주세요.”
“욕심도 많네. 소원을 몇 개나 비는 거야.”
“그리고, 규연이가 나 평생 안 버리게 해 주세요.”
“…….”
줄줄이 이어지는 소원에 허탈한 웃음을 흘리던 규연이 나루의 마지막 말에 침묵을 유지했다.
‘규연이가 나 평생 안 버리게 해 주세요.’
설마, 나루가 아직도 저런 생각을 품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규연은 무언가의 안쓰러움과 충격에 휩싸여 작은 한숨을 내뱉었다.
“송나루, 나 너 안 버린다니까.”
“응? 나는 그냥.”
“내가 뭐라고 너를 버리겠냐. 그리고, 애인 관계에서는 버린다는 말 안 써. 이거 명심해.”
“…….”
“알겠어?”
“…나 규연이 네가 정말 좋아. 진짜야.”
규연이 잘못된 점을 정확히 짚어 줬다. 애인 관계에서는 ‘버린다’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그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뜬 나루는 알겠다는 대답 대신 규연의 품을 파고들었다. 솔직한 고백에 불편했던 규연의 마음이 눈 녹듯 사라져 버렸다.
“나도 좋아, 그러니까 초부터 불어.”
“후우우, 후! 후우! 후우우우!”
“야, 그만, 송나루, 그만.”
“후우우!”
초 끄기에 신난 나루가 입바람을 세게 불었다.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후후, 불어대고 나서야 만족했는지 꺼진 초를 손으로 쏙 뽑아냈다.
다시 불을 켜고 돌아온 규연은 나루의 꼴을 발견하고 이마를 짚었다.
잠깐 불 켜는 사이에 이게 뭔.
“야, 너 그거…!”
“규연아, 너도 먹을래?”
환하게 웃던 나루가 생크림 묻은 손을 흔들어 보였다. 케이크가 진심으로 먹고 싶었던 걸까. 손에 묻은 생크림을 입으로 가져간 나루가 눈동자를 반짝였다.
“맛있어….”
“케이크 다 망가졌네. 너 사진 찍어서 자랑한다며.”
“…….”
케이크를 맛보느라 반쯤 정신이 나가 있던 나루는 그제야 자랑하기로 했던 걸 떠올리고 돌처럼 굳어 버렸다.
아, 맞다. 제일 중요한 거. 사진.
규연이 애써 준비한 케이크를 카메라에 담지 못해 속상해진 나루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대놓고 ‘나 속상해요’ 하는 표정을 짓는 게 쓸데없이 귀여웠다.
타이밍을 보던 규연은 이때를 틈타 미리 준비해 두었던 크리스마스 선물을 건넸다. 작은 앨범 하나가 탁자 위로 놓이자, 나루가 금세 호기심을 갖고 규연을 바라봤다.
“뭐야?”
“크리스마스 선물.”
“나한테 주는 거야?”
“당연한 소리를. 일단 열어 봐.”
누군가에게 선물을 주는 게 어색했던 규연은 저답지 않게 쑥스러워하며 턱짓했다. 나루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앨범의 첫 페이지를 넘겼다.
연하늘색으로 된 표지를 넘기니 익숙한 장면들이 나루의 두 눈에 가득 담겼다.
출근길에 나루가 멋대로 찍었던 커플 셀카, 카페에서 규연이 찍어 준 나루의 동그란 얼굴, 집에서 누워 있다가 찍어 본 부스스한 모습.
여태까지 나루와 규연이 함께 찍었던 사진들이 앨범에 고스란히 붙여져 있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앨범 보기에 집중하던 나루는 생긋, 미소 지었다.
이걸, 규연이가 하나하나 붙인 거구나. 나를 위해서. 나한테 의미 있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려고.
소소할지도 모르는 앨범 하나에 나루의 마음이 따스해졌다.
“마음에 들어?”
“응, 완전히! 이거 너무 귀여워.”
“참 나.”
“언제 찍었지? 귀엽다, 그치.”
조심스레 반응을 살피던 규연이 질문을 던지자, 나루가 사진 하나를 가리키며 감탄했다.
규연에게 볼이 붙잡혀 눌린 호빵처럼 찍힌 사진. 나루는 제 얼굴을 보고 스스로 귀엽다며 칭찬하는 중이었다. 어이가 없어진 규연이 허탈한 소리를 내었지만, 나루는 뭐가 잘못되었는지조차 몰랐다.
“내가 귀엽다 귀엽다, 하니까 이제 본인도 귀여운 걸 아네.”
“응? 아아….”
“…….”
“맞아, 알아. 나 옛날에도 할머니들이 귀엽다고 많이 했다. 나는 강아지니까.”
“…….”
“똥강아지. 사람들이 똥강아지가 제일 귀여운 거래.”
뻔뻔한 얼굴을 한 나루가 또박또박 이야기했다.
아, 어떡하지. 보통 이런 말 스스로 하는 인간들 보면 그냥 재수 없었는데. 얘는 대체…….
그 태도에 규연의 웃음보가 터져 버렸다. 차마 크게 티 내며 웃을 수가 없어서 고개를 푹 숙인 규연은 한참 동안 소리를 죽인 채 어깨를 들썩였다.
“그래, 그게 제일 귀엽긴 해. 똥강아지. 그런데 너는 사람이잖아.”
“그래서…?”
“뭐?”
“그래서, 나 안 귀여워? 똥강아지도, 사람도, 전부 나인데.”
이게 아니더라도, 규연이는 내 애인이니까 내가 제일 귀여워야 하는데.
대답 끝으로 나루의 혼잣말이 중얼거리듯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