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루의 해피 메리 크리스마스! (1)
짐부터 내려놓고 전화를 받을걸. 시멘트 바닥에 떨어진 핸드폰은 처참히 깨져 도저히 쓸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이런 씨발.”
순식간에 규연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집에 혼자 있을 나루가 안 그래도 걱정되는데, 이런 상황에 핸드폰까지 고장 나다니 그저 착잡했다.
조그마하던 걱정이 굴려진 눈덩이처럼 커져 버렸다. 규연의 머릿속으로 홀로 쓸쓸히 집에 있을 나루의 모습이 그려졌다. 한참 전부터 스킨십 관련한 일로 어색해져 있었는데, 크리스마스까지 매정하게 군 건 아닐까. 마음이 좋지 않아 표정이 절로 일그러졌다.
“내일 예약자들 수량 맞춰서 준비해 줘요. 끝나면 바로 퇴근하시고, 택시비는 따로 보내드릴게요. 영수증 제출해 줘요.”
“네, 사장님. 얼른 들어가 보세요. 보니까 그, 나루 씨 퇴근할 때 얼굴이 안 좋더라고요.”
“…아, 고마워요.”
우선, 일부터 끝내기로 한 규연이 주방 팀에 재료를 전달해 줬다. 그러자, 눈치를 살피던 정수가 슬쩍 나루의 소식을 전했다. 그 말에 반쯤 넋을 놓은 규연이 고맙다는 대답을 남기곤, 서둘러 가게를 벗어났다.
“지금 고맙다고 한 거야?”
“저런 표정은 또 처음 보네.”
저들끼리 남은 직원들은 통창 너머로 보이는 규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언제나 날카롭던 인상이 탁하게 풀어진 게 신기한데, 잘 하지도 않는 말까지 내뱉는 게 규연답지 않았다.
직원들이 자신을 이상하게 생각하거나 말거나, 앞만 보고 달려온 규연은 시간을 확인하며 운전석에 올랐다.
“왜 시간이….”
빠르게 한다고 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자정이 다 되어가고 있는 시간에 당황한 규연은 액셀을 거칠게 밟았다.
“하아…….”
다행히 늦은 시간이라 도로에 차가 많지 않았다. 서울 한복판에서 액셀을 마구 밟던 규연은 멀리로 집이 보일 때 즈음 한숨을 내쉬었다. 며칠 내내 나루와 어색한 관계가 유지되고 있는 게 마음에 턱, 걸렸기 때문이다.
내 딴에는 나루를 배려하고 싶었던 건데. 그날, 괜히 예민해져서 죄 없는 애한테 소리까지 지르고.
못났다, 유규연. 미친놈.
애인이 돼서 잘해 줘도 모자랄 판에, 스킨십 문제로 이러고 있으니…. …나 진짜 미친 새끼네.
바쁜 일이 해결되고 나니 죄책감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주차장에 차를 대놓고서, 잠시 핸들에 머리를 박고 있던 규연이 정신을 퍼뜩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지금은 멍청하게 자책이나 할 때가 아니었다. 크리스마스까지 남은 시간은 5분 정도. 어서 나루에게 가 봐야 했다.
차 문을 닫고 내린 규연이 엘리베이터를 급하게 잡았다. 초조한 마음에 버튼을 여러 번 눌렀던 것도 같았다.
<문이 열립니다.>
빨리 좀 올라가라.
오늘따라 엘리베이터 올라가는 속도가 거북이처럼 느리게 느껴졌다. 규연은 한층 한층 높아질 때마다 시간을 확인했다.
크리스마스까지 4분 전. 이미 많이 늦었을지도 모르지만, 이 이상 송나루를 실망하게 하지 말자.
<문이 열립니다.>
묵묵히 다짐한 규연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성큼, 발을 내디뎠다.
“송나루!”
현관문까지 얼마 안 되는 거리를 뛰어가려고 했을 때였다. 규연이 두 눈을 크게 뜬 채 나루의 이름을 외쳤다.
현관문 옆, 와인 병을 소중하게 껴안은 나루가 쪼그려 앉아 떨고 있었다. 왜소한 몸으로 덜덜 떠는 게 너무나 안쓰러워 보여, 규연은 곧장 나루의 몸을 붙잡아 일으켜 세웠다. 얇은 티셔츠 위로 만져지는 어깨가 유독 앙상했다. 몸은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얼굴은 새빨간 게, 눈물로 범벅되어 있었다.
“나루야,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 몸 차갑잖아, 울었어? 내가 너무 늦었지.”
“…….”
속사포로 쏟아지는 걱정에 나루가 두 눈을 끔뻑거렸다. 따스한 말투, 사랑이 담긴 시선. 낮까지의 어색함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제야 안심한 나루는 차마 대답도 못 꺼낸 채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려보냈다.
퉁퉁 부어 빨갛게 된 눈가로 뜨거운 물줄기가 투둑, 떨어졌다. 맑은 눈동자는 오직 규연만을 간절하게 바라보는 중이었다.
규연은 나루의 시선을 이겨내지 못하고 두 팔을 벌려 작은 몸을 힘껏 끌어안아 주었다. 두꺼운 외투 위로 나루의 찬 몸이 느껴질 때마다 규연은 속이 뜯겨 나가는 기분을 느꼈다.
품에 안긴 나루는 넓은 가슴팍에 조용히 얼굴을 묻었다. 머리카락이 옷감에 닿아 부스스, 흩어질 때마다 괜히 기분이 좋아져서 일부러 머리를 비벼댔다. 작은 움직임도 예리하게 포착해낸 규연이 나루의 뒤통수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입은 웃고 있지만, 규연의 눈에는 온갖 심란한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제 애인을 이렇게 추운 날, 밖에서 기다리게 했다는 것. 스킨십 문제로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들고, 끝내는 나루를 서운하게 만든 것. 그저 모든 게 미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혼자 있게 해서 내가 미,”
“규, 규연아, 잘못했어. 내가 잘못했어. 무릎도, 꿇고, 내가 열심히 빌게. 나 버, 버리지 마.”
규연이 막 사과하려던 때, 나루가 말을 가로채며 빌기 시작했다. 파리하게 떨리는 손으로 규연의 외투 끝자락을 붙잡은 채 급하게 무릎을 꿇는 행동이나, 눈물을 훌쩍거리는 얼굴이 겁에 질린 사람 같았다.
나루의 처절한 모습은 규연을 충격에 빠뜨리기 충분했다. 당황한 듯 굳어 있던 규연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나루를 급히 일으켜 세웠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송나루. 네가 왜 빌어, 무릎은 또 왜 꿇는 거고!”
“저, 전화도 끊고, 네가 나 버릴까 봐, 그럴까 봐. 흐으, 버리지 마.”
“내가 널 왜 버려. 넌 왜 아직도…!”
나를 주인으로 생각하는 건데. 차마 내뱉지 못한 말을 참아낸 규연이 작게 한숨 쉬었다. 지금 나루의 상태는 제정신이라고 하기 어려웠다. 며칠 동안 악몽을 꾸더니, 결국 트라우마에 빠진 듯했다. 규연은 나루를 괜히 혼자 두었다며 자책했다. 오늘만큼은 옆에 있었어야 하는 건데, 이렇게까지 힘들어하는 나루를 보니 진심으로 속이 쓰렸다.
“나루야.”
“으, 응. 규연아, 내가 잘못,”
“내가 얘기했잖아. 너랑 나는, 주종 관계가 아니라 동등한 애인 사이라고.”
“…….”
주종 관계가 아닌, 동등한 애인 사이. 규연이 다시금 관계를 바로잡아 주며 나루를 품에 안았다. 멍한 얼굴로 안긴 나루는 지금 상황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만 깜빡일 뿐이었다. 그러자, 규연이 차근차근 이야기하며 나루를 달래기 시작했다.
“난 너 안 버려. 전화는, 실수로 못 받은 거였고. 그러니까 나한테 무릎 꿇고 빌지 않아도 돼. 이러지 마. 응?”
“…애인 사이. 실수….”
규연의 다정한 태도에 나루가 몽롱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제야 안심한 건지, 떨리던 몸이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두어 번 정도 등을 토닥여 주던 규연은 무언가 축축한 느낌에 정신을 차리고 나루의 상태를 자세히 살폈다.
그러고 보니, 나루가 아까 술병을 들고 있었는데.
“옷 다 젖었네. 이러다 진짜 감기 걸려, 들어가서 씻자.”
안으면서 술병이 흔들리기라도 한 건지, 나루의 옷과 규연의 외투에 붉은빛 와인이 묻어 푹 젖어 있었다. 다급해진 규연은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며 문부터 열었다. 안 그래도 추운 곳에 앉아 있던 나루가 심한 감기에라도 걸릴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나루의 어깨를 살포시 감싼 규연이 집 안으로 발을 들였다. 걱정에 물들어 있던 규연의 얼굴은 곧, 처참하게 바뀌고 말았다.
온통 캄캄한 집안은 물론이고, 보일러를 틀지 않아 냉기가 감도는 방바닥까지. 나루 혼자 퇴근해서 여태까지 이 집 안에 있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규연의 동공이 한참 떨리고 있을 때였다. 침묵하고 있던 나루가 외투 끄트머리를 티 나지 않게 잡아당겼다.
“규연아, 나 이제 너한테 막 서운해하지 않을게. 너랑 자는 것도, 조급하게 생각 안 할게. 안 그럴 테니까, 계속 내 옆에 있어 주면 안 돼…?”
소심하게 터져 나온 목소리에 울음기가 섞여 있었다. 규연은 그런 나루를 내려다보며 제 얼굴을 여러 번 쓸어내렸다.
죄책감, 죄책감, 그리고 또 드는 죄책감.
울상을 짓고 있으나, 어딘가 체념한 듯한 나루의 눈이 충격적이었다. 착잡함에 대답하지 못하던 규연은 마음을 한 번 다잡은 후, 나루와 눈높이를 맞췄다.
“네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해도 돼. 서운해도 참지 마. 그런 걸로 널 미워하는 일 없을 거니까. 그리고….”
“…….”
“네가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난 계속 네 곁에 있을 거야.”
규연의 다짐 같은 말이 끝나고, 잠시 정적이 맴돌았다. 나루는 규연의 입에서 나온 소리를 곱씹으며 눈을 점차 크게 떴다.
진짜? 진짜 내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해도 날 미워하지 않아? 계속 내 옆에 있을 거야?
하고 싶은 질문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그러나, 나루는 말을 아끼고, 고개를 양옆으로 도리도리 저어 보였다.
“아니야. 나 다른 거 안 바랄게, 규연아.”
“어째서,”
“그냥, 키스 한 번만 해 주면 안 돼? 나는 너랑 이런 거, 하고 싶어. 그 뒤는 조금, 조, 조금 무섭지만, 사랑하는 사이에는 다 하는, 거랬어. 너는 나랑 하는 게 아직, 싫어…?”
생각지 못한 대답에 규연이 진심 가득히 속상해할 즈음이었다. 나루는 마지막으로 제 애정과 조급한 마음을 드러냈다.
훌쩍. 코를 훌쩍인 나루가 어느새 눈물을 뚝, 그치고 눈을 다부지게 떴다. 그 모습이 꼭 사랑을 원하며 불안에 떠는 강아지 같았다. 애정 짙은 표정으로 나루를 바라보던 규연은 망설임 없이 거리를 좁혀 왔다. 성큼, 가까워진 사이에 알게 모르게 당황한 나루가 뒷걸음질 치려고 하자, 규연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벽으로 몰며 동그란 뒤통수를 제 손으로 휘감아 당겼다.
츕, 츠읍, 질척하고 민망한 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나루는 짙게 닿아온 입술에 두 눈을 질끈 감고, 제 나름 규연을 따라 하며 혀를 부디쳤다.
“읏, 으응.”
규연이 이렇게까지 깊게 키스한 적이 있었던가. 가만히 생각해 보던 나루는 당황스러운 감정에 빠져 템포를 놓치고 말았다. 규연은 이때를 노렸다는 듯, 뜨겁고 예민한 입천장을 야릇하게 쓸고 지나갔다. 덕분에 나루는 몸을 움찔, 떨며 입술 새로 신음을 흘려보내야만 했다.
“으, 흐읍.”
“숨 쉬고, 입 더 벌려 봐.”
키스는 어려웠다. 숨을 참고, 코로만 내쉬어야 한다는 게 특히 그랬다. 숨이 막혀 규연의 어깨를 툭툭, 친 나루는 겨우 쉴 시간을 얻어냈다.
하아, 하, 달뜬 숨소리를 두어 번 정도 내뱉었을 때였을까.
규연의 인내심이 바닥나고야 말았다. 술에 취해 빨갛게 물들인 볼, 물기 젖은 눈, 야하게 벌어진 입술. 숨을 쉬겠다고 흉부를 들썩이는 나루의 모습마저 큰 자극으로 다가왔다.
“아, 규, 규연, 으읏!”
아직 숨을 다 내쉬지 못했는데, 나루는 규연의 손에 이끌려 다시 입술을 맞대어야만 했다.
붉고 도톰한 혀가 넘어와 입 안 이곳저곳을 간지럽히고 지나갔다. 입천장을 쓸어내릴 땐 온몸이 저릿했고, 볼 쪽의 여린 살을 건드릴 땐 눈물이 찔끔 터져 나왔다.
나루가 호흡을 길게 이어가지 못할 때면, 규연은 고개를 비틀어 숨 쉴 틈을 만들어 주곤 다시 끈질기게 혀를 얽혀왔다. 가벼운 입맞춤과는 확연히 다른 키스였다.
규연이가 날 진심으로 좋아한다는 게 느껴져. 주인이 아니라, 정말 애인으로 좋아한다는 게.
나루는 문득 건후가 조언했던 말을 떠올렸다.
‘네가 너무 소중해서, 아껴 주고 싶은 거겠지.’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의심하고 있었던 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소중하게 대해 준다는 게 이런 걸까. 나한테 닿아올 때마다 규연이의 진심이 느껴지잖아. 사랑받는 기분이야. 이 상태라면, 이런 섹스라면 무섭지 않을지도 몰라….
며칠 내내 앓았던 악몽이 모두 잊히는 듯했다. 범현과의 기억을 떠올리며 불안에 떨었던 감정 또한 말끔히 지워졌다. 방금까지만 해도 트라우마에 범벅되어 빠져나오지 못할 거 같았는데, 참 신기했다.
다정하게 맞닿아온 규연의 체온이 안정적이어서, 조심스럽지만 깊게 파고드는 행위 자체에 사랑이 묻어 있어서, 파도처럼 일렁이던 마음이 순식간에 잔잔히 가라앉았다.
이렇게 마음을 정리하니 속이 한결 편안해졌다. 규연에게 서운했던 감정들도 전부 가루가 되어 사라진 뒤였다. 조심스레 눈을 뜬 나루는 규연의 입술 위로 쪽, 하고 입맞춤하며 떨어졌다.
나루의 얼굴이 방금과 달리 환해져 있었다. 규연은 애매하게 끊긴 키스에 아쉬워하는 눈치였지만, 나루는 전혀 그런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가쁜 숨을 내쉬며 호흡을 안정시킨 나루는 규연에게 다른 의미의 폭탄 발언을 내던졌다.
“나 이제 괜찮아, 규연아. 하나도 안 서운해. 네 마음이 어떤지 알았어.”
“…….”
“주인이 아니라, 진짜 애인으로 사랑하는 거. 나 이제 안 조급해. 안 그럴 거야. 그, 으음, 씻고 올게. 오, 옷이 다 젖은 줄 몰랐어.”
“어디 가.”
“…응?”
어색하게나마 눈웃음을 짓던 나루가 막 뒤돌아 발걸음을 떼었다. 하지만 몸은 의지대로 욕실까지 향할 수 없었다.
규연은 나른해진 눈으로 나루의 뒷모습을 쫓다가 팔을 확, 잡아채 제 쪽으로 끌었다. 욕망 가득한 눈빛. 규연은 당장이라도 나루를 안을 수 있는 상태였다. 타이밍은 왜 항상 엇갈리는가. 나루는 규연이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 줄도 모르고 해맑게 씻을 생각만 할 뿐이었다.
“씻지 마.”
“규연이 네가 일단 씻으라고 했,”
규연의 단호한 말투에 멍하니 서 있던 나루가 반박했다. 물론 나루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송나루. 나루야.”
“어, 규, 규연아, 왜 그래….”
“나 사랑해?”
“으응.”
“나도, 너 사랑해.”
“으읍, 흐으….”
규연의 진지한 물음에 나루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 사랑해. 규연이 완전 사랑해. 순수한 감정으로 대답한 거였지만, 정작 규연의 목적은 순수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