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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에 찾아온 위기 (4) (111/130)

이브에 찾아온 위기 (4)

집 가는 길, 번쩍거리는 조명 속을 거닐던 나루는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얗게 쌓여서 낭만적인 눈, 여기저기 설치된 크리스마스트리, 빨갛고 노란 조명들.

그 사이로 보이는 커플, 그리고 누구보다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는 가족들.

나는 가족도 없고, 규연이도 옆에 없는데….

밝은 사람들 사이에 섞여 걷고 있자니 기분이 한층 더 침울해졌다. 나루는 발걸음을 조금 더 빨리하며 속도를 높였다. 눈도 좋아하고, 사람도 좋아하지만, 오늘만큼은 아무것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나저나 규연이는 연락한다면서 연락도 안 해. 나 퇴근했는데.

핸드폰 화면이 밝아졌다 꺼지기를 반복했다. 나루는 연락 한 통 와 있지 않은 잠금화면을 바라보곤 핸드폰을 아예 주머니 속에 처박아 놓았다.

<1층입니다.>

잠깐 걸어온 거 같은데 벌써 집 앞이었다. 엘리베이터에 오른 나루는 거울로 제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하루 사이 초췌해진 얼굴이 영 별로였다. 근심 걱정에 눈 밑이 새카맸고, 입술은 바싹 말라 있었다.

못났어. 짜증 나.

아까 보았던 행복한 커플들과 반대되는 모습이었다.

<문이 열립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나루는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려다 손을 멈췄다. 발치에 웬 상자 하나가 도착해 있었기 때문이다. 검은색 쇼핑백에 금색으로 쓰인 영어까지, 꽤 고급지고 우아한 디자인의 택배물이었다.

아, 규연이가 와인 온다고 했었지.

나루는 상자의 정체를 단번에 알아냈다. 규연이 오늘 배송될 거라고 말해 준 와인이었다. 슬며시 상자를 집어 든 나루가 현관문을 열었다.

덜컹.

평수가 넓은 집은 사람이 없으면 냉기가 더욱 잘 돌았다. 오늘도 그랬다. 나루는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몸이 부르르, 떨리는 걸 느꼈다.

온기도 없고, 텅 비어서 씁쓸하기만 한 집. 나루는 이 느낌이 싫었다. 무섭지는 않았지만, 피부로 닿는 공기가 꼭 예전에 지내던 지하실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패딩 점퍼를 제 방에 벗어 놓은 나루가 거실로 나와 웅크려 앉았다. 분명 규연이 따듯하게 있으라고 했으나, 나루는 말을 듣지 않았다. 거실 불을 꺼 놓는 건 물론이고, 보일러 또한 작동시키지 않았다.

달칵. 쪼르르륵.

대신, 규연이 주문했던 와인을 꺼내 컵에 따랐다. 붉은빛의 액체가 흰색 머그컵에 멋없이 따라졌다.

“으윽, 켈록!”

나루는 안주도 하나 없이 와인을 들이켰다. 목구멍 너머로 텁텁함을 남기며 흘러 들어간 액체는 위를 화끈거리게 했다. 감기 기운에 목이 많이 약해진 걸까. 기침이 낮보다 더 심해졌다.

아랑곳하지 않고 컵을 기울인 나루가 남아 있던 와인을 모조리 삼켜냈다. 홀로 씁쓸할 거라면, 차라리 취하는 게 나을 듯해서였다.

정신이 몽롱해지기 시작하니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나루는 탁자 위에 놓인 눈사람 모양 무드등 하나를 밝히고, 생각에 계속해서 꼬리를 이어 붙였다.

규연이가 나랑 자지 않는 건, 내가 싫어서가 아니랬지. 나를 소중하게 대해 주는 거래어. 나는 그거에, 마음이 상해서 멋대로 굴어 버렸고…….

여태 규연과 겪었던 상황들, 그리고 감정들이 머릿속에 차곡차곡 정리되었다. 자꾸만 서운함만 느끼던 나루는 점차 이성을 되찾았다. 그러고 나니 규연이 자신을 위해 해 줬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내가 원하는 건 뭐든 들어주고, 내가 짜증을 내도 다 받아주는 규연이.

그에 비해서 나는…?

늘 받기만 했지, 뭘 제대로 해 준 적이 없네.

그런 주제에 감정만 상했던 거야….

규연은 늘 나루에게 최선을 다했다. 나루도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어느새 서운함은 가시고, 미안한 마음만이 남았다. 나루는 제 감정만을 생각해 규연에게 서운함을 느꼈던 게 진심으로 미안해졌다. 중요한 건, 머리로는 아는데 이미 일이 꼬여서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모른다는 거였다. 차라리 크게 싸웠다면 이렇게까지 걱정하지 않았을 텐데. 애매한 상황이 유지되고 있어 더 어려웠다.

나루는 우선 규연에게 전화를 해 보기로 했다.

PM11:00

핸드폰 화면으로 시계가 나타났다. 잠시 혼자만의 고민에 빠져 있었을 뿐인데, 시간이 이렇게나 흐른 게 놀라웠다. 저녁 늦게 돌아온다던 규연은 이 밤까지 감감무소식이었다. 나루는 서둘러 규연의 번호를 누르고, 전화를 걸었다.

Trrrr…….

통화 연결음이 한참 울렸다. 나루는 인내심을 가지고 끝까지 기다렸다.

<전화를 받지 않아 음성사서함으로….>

첫 번째 전화 연결은 실패로 돌아갔다.

규연이가 많이 바쁜 걸까. 아니면, 일이 잘 풀리지 않은 건가.

걱정하며 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던 나루가 용기를 내서 다시 한번 전화 연결 버튼을 눌렀다.

Trrrrr….

이번에도 연결음이 길게 이어졌다.

달칵.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를 때 즈음, 수화기 너머의 소리가 들려왔다. 나루는 귀 가까이 핸드폰을 가져다 대고 조심스레 목소리를 내었다.

“여보세요?”

최대한 상냥하고, 다정하고, 나긋한 말투였다. 남은 건 규연의 대답이 돌아오길 기다리는 것인데.

뚜― 뚜― 뚜―.

나루의 기대와 다르게 핸드폰에서는 딱딱한 기계음이 일정하게 울렸다. 상대가 일부러 전화를 끊었을 때 들리는 소리였다.

끊었다. 규연이가, 내 전화를 받았는데, 그냥 끊어 버렸다.

그럴 리가 없는데…….

규연이 일부러 전화를 끊다니. 한 번도 없던 일이었다. 당황스러운 얼굴로 입술만 뻐끔거리던 나루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굴다가, 곧장 눈물을 떨궜다.

닭똥 같은 눈물이 커다란 눈동자에서 떨어져 카펫을 적셨다. 소매로 제 눈가를 닦아낸 나루는 조용히 울음을 삼켰다.

규연이도 마음이 많이 상했구나. 아까 나한테 다정하게 대해 줘서 괜찮은 줄로만 알았는데, 그랬는데.

사실 그게 아니었던 걸까.

발끝부터 얼굴까지 열기가 확 달아오르는 느낌이었다. 전화 한번 거절당한 것뿐인데, 이상하게 민망하고 창피한 기분이 들었다.

“…크응.”

입술 끝이 축 늘어지고, 턱에 호두 같은 주름이 잡혔다. 나루는 먹먹해진 코를 킁, 들이마시곤 핸드폰 화면을 빤히 바라봤다. 

창피해도, 규연이한테 전화 거절당한 게 슬퍼도, 다시 걸어보자. 실수일 수도, 있으니까…….

덜덜 떨리던 손가락 끝이 또다시 전화 연결 버튼을 눌렀다. 벌써 세 번째로 거는 전화였다.

<전화기가 꺼져 있어….>

실수일지도 모른다는 자그마한 희망이 대차게 짓밟혔다. 이번에는 그나마 가던 전화 연결음마저 들리지 않았다. 

방금까지 멀쩡히 전화가 걸렸는데, 아예 전원이 꺼져 있다니.

“윽, 흐윽, 으.”

나루의 흉부가 가쁘게 들썩였다. 그와 동시에 진정되어 있던 숨소리도 점차 거칠어졌다. 한 방울씩 떨어져 내리던 눈물은 어느새 흐르는 물줄기처럼 줄줄 쏟아져 나왔다.

처음으로 규연에게 외면당했다. 무슨 짓을 해도 예쁨만 받아서 몰랐는데, 이런 취급을 받아 보니 설움이 북받쳤다.

순간, 파묻혀 있던 기억이 수면 위로 떠 올랐다. 지하실에 갇혀 지냈을 때, 언젠가 범현에게 철저히 외면당했던 적이 있었다. 성고문에 가까운 행위를 처음 당하고 난 후, 몸도 마음도 지쳤을 즈음이었다.

‘아가, 사랑받는 건 싫고, 나한테 어리광은 부리고 싶은 거니.’

‘하, 하지만 그거 너무 무, 무섭고, 여기 혼자 있기 싫,’

‘왜 그렇게 이기적일까.’

콰앙! 나루를 ‘이기적’이라고 말한 범현은 철창을 굳게 닫은 채, 돌아오지 않았다. 울며불며 매달려 봐도, 잘못했다고 빌어도, 그는 나루를 며칠 내내 투명 인간 취급하며 외면했다. 규연과의 육체적 관계가 조급한 와중에 섹스하는 건 무섭고, 어리광은 부리고 싶은 것. 지금 나루의 상태가 딱 그랬다.

규연이도 이런 내가 이기적이라고 생각해서, 그래서 날 외면하려는 걸까.

한 번 비틀어진 생각은 취기를 타고 끝도 없이 꺾여져 나갔다.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은 나루는 차오르는 감정을 감당하지 못하고 울음을 빵, 터뜨려 버렸다.

“흐븝, 끄, 허어엉. 규연아, 흐, 흐엉.”

처량한 울음소리가 넓은 거실에 웅웅 메아리치듯 울렸다. 한참 동안 아이처럼 울어대던 나루는 고개를 들고 와인병을 집었다.

콸콸콸.

컵 안으로 액체가 쉴 새 없이 쏟아져 내렸다. 힘 조절을 하지 못해서 탁자 여기저기에 붉은빛 액체가 튀었으나, 나루의 눈에 이게 보일 리 만무했다. 나루는 와인으로 가득 찬 컵을 기울여 그대로 제 입에 직행했다. 꼴깍, 꼴깍, 목구멍 너머로 흘러드는 액체의 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렸다.

“콜록! 흐, 흐으.”

붉어진 입술을 대충 손등으로 훔쳐낸 나루가 허공을 멍하니 응시했다. 그 많은 양의 와인을 한꺼번에 들이킨 탓에 두 뺨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초점이 나가 벙찐 동공이 시계를 확인했다.

PM11:45

허무맹랑하고 씁쓸했던 크리스마스이브가 지나가는 중이었다. 15분 후면 크리스마스였다. 나루가 생각하던 크리스마스 풍경은 이런 게 아니었다. 규연과 근사한 케이크를 나눠 먹으며 자정을 맞이할 줄로만 알았는데.

이대로는 안 돼. 규연이가 날 외면하면, 안 돼….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지.

그래, 빌어야 해. 잘못했다고, 무릎 꿇고 있어야 해. 이러면, 용서받을 수 있었으니까….

자리에서 일어선 나루는 와인 병을 품에 꼭 안아 들고 현관 앞으로 향했다. 간혹 발이 꼬여 걸음이 비틀거렸지만, 전혀 개의치 않고 걷는 데 집중했다.

운동화 한 켤레가 뒤엉켜 있는 신발장. 나루는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마치 지하실에 갇혀 지냈던 그 시절처럼.

나루는 규연을 하염없이 기다렸다. 술에 취해 나른해진 몸이 멋대로 기울어지고, 딸꾹질도 나왔으나, 무릎 꿇은 자세는 절대 흐트러지지 않았다.

“앞이 핑 돌아…….”

눈을 크게 끔뻑이던 나루는 세상이 핑 도는 걸 느끼고 정신을 다잡았다. 취한 와중에 이성을 붙잡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그때, 나루가 문득 과거의 일을 떠올렸다.

언젠가 한번, 규연과 술을 마셨을 때였나. 나루는 제 주량을 모르고 소주를 막 들이부었다. 규연은 그런 나루를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았었다.

왜 지금 이 기억이 나는 거지.

나루는 찬 손으로 제 뺨을 매만졌다. 아니나 다를까, 취기가 오른 얼굴은 불타는 고구마처럼 뜨거웠다.

술을 깨야 해. 규연이는 내가 술 취한 거 안 좋아하니까. 비약을 거친 나루는 고개를 양옆으로 휘저어 보고, 허벅지를 세게 꼬집기도 했다. 술을 깨기 위해 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때린다고 해서 정신이 말끔히 돌아오는 건 아니었다.

시원한 곳에 있으면, 괜찮아질까.

본능적으로 발부터 움직인 나루가 신발도 신지 않은 채 현관문을 열었다. 아까보다 걷는 모양새가 굼뜬 게, 확실히 취한 듯했다. 이 와중에 와인 병을 품속에 꼭 껴안고 놓지 않는 게 우스웠다.

문을 닫고 나온 나루는 벽에 미끄러지듯 주저앉았다. 무릎이 얼음장 같은 대리석 바닥에 닿자, 그나마 정신이 돌아오는 느낌이 들었다.

“콜록! 큽.”

자그마한 몸이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감기 기운이 있는 데다가 추운 곳에 무방비하게 앉아 있으니 무리가 따르는 게 당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루는 집으로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멍한 두 눈동자는 굳게 닫힌 엘리베이터를 바라보느라 바빴다. 약간의 집착과 안쓰러움, 그리고 넘칠 듯한 애정이 뒤섞인 눈은 주인을 기다리는 강아지와 다를 바 없었다.

크리스마스까지 남은 시간, 10분.

나루는 규연이 자신을 버리지 않기를 간절히 빌었다.

* * *

불 꺼진 매장 안. 규연은 어렵사리 구해 온 재료 상자를 들고 돌아왔다. 갑작스레 재료를 구하느라 골치가 아팠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이 답 없는 상황을 해결할 수 있게 되어 다행이었다.

지잉. 지잉. 상자 여러 개를 쌓아 들고 오던 규연은 뒤늦게야 제 핸드폰이 울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화면에는 나루의 이름이 반짝이고 있었다.

툭! 짐을 들고 있는 상태로 무리해서 전화를 받은 규연은 그만 핸드폰을 놓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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