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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에 찾아온 위기 (3) (110/130)

이브에 찾아온 위기 (3)

심통이 난 나루는 말하기를 포기해 버렸다. 이런 행동이 어린애 같다는 걸 알지만, 마음이 상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규연의 통화는 길어져만 갔다. 가게로 가는 내내 상대와 말을 주고받던 규연은 가끔 인상을 찌푸리기도 했고, 헛웃음을 치기도 했다.

딱 봐도 알 수 있었다. 안 좋은 일이 생겼구나, 예감한 나루는 묵묵히 창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봤다.

기대감에 부풀어 빨간 양말을 가방에 걸어 놓은 어린아이, 연인과 약속을 잡는 듯 행복하게 전화하고 있는 직장인. 다양한 사람들이 거리를 지나다녔다.

다들 행복해 보이네. 나만, 나만 뾰로통해.

나루는 전화 중인 규연을 슬쩍 훔쳐보고는 아예 눈을 감아 버렸다.

“도착했어, 통화가 좀 길어져서 어떡하지.”

“…….”

가게 앞에 도착하고 나서야 전화를 마친 규연은 나루에게 할 말이 있다는 눈치를 보냈다. 하지만 나루는 일부러 그 눈빛을 모르는 척, 외면하고 말았다.

탁!

차에서 내린 나루가 망설임 없이 가게 문을 열었다. 차라리 빨리 일이나 하고 싶었다. 규연의 옆에 있으면 자꾸만 못난 마음이 생겼고, 바깥에는 행복해 보이는 사람이 많아서 짜증이 났기 때문이다. 등을 보이고 걷는 나루의 행동에 몰래 머리를 헝클이던 규연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루는 달래야겠는데, 둘 사이는 어색하고, 섣불리 대화를 시도했다가 감정만 상할까 봐 쉬이 움직이기 어려웠다.

“나루 씨, 좋은 아침!”

“안녕하세요…!”

직원들과 인사를 주고받던 나루는 잽싸게 옷을 갈아입고, 몸을 본격적으로 혹사시켰다. 서연이 도맡아서 하던 포장지 정리도 대신 하고, 건후 대신 홀도 전부 닦아 놓고, 유리창까지 번쩍번쩍하게 만들어 놓았다.

“오늘 하루 힘들겠지만, 너무 무리하지 말고 합시다.”

“네, 사장님!”

“나루 씨도 대답해요.”

“…네.”

바쁘게 움직이는 나루를 안쓰럽게 바라보던 규연이 짧은 조회 시간을 이용해 걱정 섞인 말을 뱉었다. 다른 직원들은 다정한 규연의 어투에 놀라며 힘차게 대답했지만, 나루는 제 걱정인 줄도 모르고 고개만 대충 끄덕였다.

아이구, 아직도 화해를 못 했네. 어쩌면 좋아, 내일이 크리스마스인데!

곁눈질로 나루와 규연을 관찰하던 서연이 진심 가득한 마음으로 안타까워했다.

기분이 저 땅굴 속에 파묻혀 있어도 세상은 아무렇지 않게 돌아갔다. 크리스마스이브의 디저트 카페는 사람들로 종일 북적였다. 오픈 준비 때부터 지금까지 쉴 새 없이 움직인 나루는 혼이 빠지기 직전이었다. 이제 한 시간 지났는데, 사람들이 왜 이렇게 몰려드는 건지. 서울 한복판에 카페를 만든 규연이 원망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케이크 예약했는데요.”

“네, 성함 한번 말씀해 주시겠어요?”

“김유빈이요.”

“확인되셨어요! 초는 어떻게…….”

아침까지 싱숭생숭하던 마음도 잊을 만큼 바빠서였을까. 매장 내에 흐르는, 평소 즐겨 부르던 캐럴이 순간 나루에겐 그저 지나가는 소음으로만 들렸다.

“케이크 선물용으로 포장해 드릴게요!”

한정판으로 나온 케이크는 모양도 색도 한겨울의 크리스마스에 어울리게 예뻤다. 하얀 생크림 위에 쌓인 슈가 파우더, 그리고 여기저기 장식된 작은 트리 장식들. 화이트 크리스마스트리를 떠올리게 하는 케이크였다.

빨간 끈으로 케이크 상자를 묶던 나루는 아무도 몰래 미소 지었다. 규연과의 분위기는 영 별로였지만, 정수에게 케이크를 선물 받을 생각을 하니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하루에도 기분이 이랬다가 저랬다가, 감정이 제멋대로 요동쳤다. 원래 연애를 하면 다 이런 건가.

속으로 쓸데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계산을 마칠 때였다.

“서연 씨, 예약자 명단이 하나 더 있는데? 이게 뭐예요.”

“예약하신 분이 너무 많아서 나눴는데, 설마 제가 말씀 안 드렸었나요?”

“나 이런 소리는 못 들었지! 지금 보니까 족히 30명은 되시는데, 재료가 없어서 큰일이야!”

주방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파티시에인 정수가 급하게 뛰쳐나와 서연을 불렀다. 한 손에는 예약자 명단이 들려 있었는데, 아무래도 일이 단단히 꼬인 모양이었다.

서연은 그냥 실수도 아니고, 대형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1년 중 가장 중요하다는 크리스마스 이벤트에 막대한 차질이 생길 만한 실수였다.

이미 받은 예약자는 30명이 조금 넘었다. 하지만, 남아 있는 재료는 인원에 한참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바쁘지만 나름 평화롭게 흘러가던 매장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음장처럼 굳어 버렸다. 멀리서 이 사태를 지켜보던 규연은 심상치 않다는 걸 느끼고 인상을 찌푸리며 다가왔다.

“무슨 일인데.”

“사장님, 저, 정말 죄송해요. 그게, 제가 나눠 놓은 예약자 명단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바람에…….”

“못하는 바람에, 뭐.”

“한정판 케이크 예약 판매가 어려워질 것 같은….”

서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한숨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규연은 화를 꾹 눌러 참는 듯한 얼굴로 눈을 지그시 감았다. 상황의 심각성을 느낀 나루는 중간에 끼어 눈치만 볼 뿐,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규연이, 완전 화났다. 저 표정만 봐도 알아. 지금 손님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참고 있는 거야.

눈치 빠른 나루는 규연의 심정을 알아차리고 눈동자를 데구륵, 굴렸다. 지금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마카롱 포장 가능하죠?”

“어, 네. 예쁘게 포장해 드릴게요.”

얼어붙은 카운터에서 손님 응대를 하는 것이었다. 나루가 자연스레 일하는 사이, 규연은 무어라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사라져 버렸다.

얼핏 짜증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던 것 같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규연이 대놓고 서연을 혼내지 않았다는 거였다. 지금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딱 하나. 예약에 문제가 가지 않게 재료를 준비하는 것. 규연은 어떻게든 재료를 구하기 위해 여기저기 전화를 걸고 있었다.

왜 하필 상황은 최악일 때 더 최악으로 치닫는 걸까. 너무 싫다.

나루는 가면 갈수록 망해가는 제 처지에 눈썹을 늘어뜨렸다. 규연과의 화해는 무슨, 오히려 더 예민해지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슬쩍 고개를 돌려 뒤를 확인한 나루는 누군가와 전화로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규연을 발견하고 주먹을 쥐었다.

“무리라는 거 아는데, 급한 상황이니까 부탁드리는 겁니다. 하아, 오늘 저녁까지만 좀, 예? 제가 언제 싸우자고….”

무언가 단단히 마음에 안 드는 표정. 가득 찌푸려진 눈썹. 소리 없이 입 모양으로 내뱉어지는 욕설. 규연이 이렇게까지 열받은 모습은 또 오랜만이었다.

겉으로 아무렇지 않아 보이던 나루는 잔뜩 실망해 풀이 죽은 채였다. 정수에게 한정판 케이크를 받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나름 자신을 위로하고 있었는데, 다 물거품이 되고 만 것이다.

크리스마스이브도, 크리스마스도, 전혀 행복할 것 같지 않았다.

“주방팀, 오늘 세 배로 쳐줄 테니까 밤까지 수고 좀 해줘요.”

“재료는 어떻게 해결됐나요?”

“하, 모르겠는데, 빨라도 저녁 늦은 시간까지 구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일단 하던 대로 하고 있어 봐요. 나는 좀 나갔다 와야 하니까.”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온 규연이 성급한 공지를 알렸다. 주방팀은 야근 소식에도 불평하지 않고 수긍했다. 이렇게 규연의 야근마저 확정되었다. 재료를 빨리 구해 와도 저녁 늦은 시간이라니. 가게로 돌아와서 크리스마스 당일에 판매될 케이크를 준비하면 새벽에 돌아올지도 모른다.

휘적휘적 걸어간 규연은 제 외투와 차 키를 챙겨 나와 나루를 호출했다.

“잠깐 얘기 좀 하자.”

“어, 어…?”

얼떨결에 팔이 붙잡힌 나루는 규연이 이끄는 대로 끌려갔다. 늘 카페 뒤편을 고집하던 규연은 웬일로 주차장까지 나루를 데려왔다.

아침까지만 해도 어색하기 짝이 없었는데, 지금 분위기는 꼭 예전과 같았다.

나루와 시선을 마주한 규연은 제법 다정한 어투로 말을 걸어왔다.

“오늘, 집에 먼저 가 있어야 할 거 같아.”

“…….”

“일 최대한 빨리 끝내고 들어갈게. 혼자 둬서 미안해, 나루야.”

“응, 괜찮아. 이거 급한 일이잖아.”

나루 또한 짜증 내는 기색 없이 대답해 주었다. 현재 가게 사정이 비상이라는 걸 알면서, 개인적인 감정에 휩쓸려 애처럼 굴고 싶지는 않았다.

말로는 괜찮다고 했지만, 실은 마냥 괜찮지 않았다. 그토록 기대했던 크리스마스인데, 애인이 일 때문에 함께 있지 못한다니. 서운하지 않은 게 이상했다.

나도 이제 여기에 완벽히 적응한 어른이잖아. 심각한 상황에서 어리광 부리지 말자. 규연이도 곤란할 거야.

봐, 아침까지는 심드렁했는데, 진심으로 미안해서 나를 달래주고 있잖아.

나루의 눈동자가 규연의 얼굴을 샅샅이 훑고 지나갔다. 걱정 섞인 눈매와 유순히 풀어진 미간에는 단 1g의 짜증도 섞여 있지 않았다.

“연락할게. 시간 맞춰 퇴근해서 집에 가 있어. 춥게 있지 말고.”

“…응. 기다릴게.”

“…….”

나루의 대답을 들은 규연이 잠시 망설이다 말고 차에 올라탔다. 매끄러운 바닥과 타이어가 맞닿아 끼익,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루는 점점 멀어져 가는 차를 바라보며 힘없이 돌아섰다. 막상 규연을 보내고 나니 마음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워지는 느낌이었다.

가게로 돌아온 후, 나루는 넋을 놓고 일했다. 큰 문제가 터져서 그런지 직원들 분위기 또한 좋지 않았다. 늘 장난을 걸어오던 서연은 풀이 죽어 조용했고, 주방팀은 말할 것도 없었다.

“큼, 크음, 콜록!”

와중에 컨디션도 엉망이었다. 나루는 기침을 내뱉으며 목을 가다듬었다. 감기 기운이 슬슬 세게 올라오는 게, 코가 간지럽고 목이 칼칼했다.

일하기 싫다. 집에 가기도 싫다. 규연이는 보고 싶은데, 그냥, 다 싫다.

나루는 처음으로 일하기 싫다고 생각해봤다. 규연의 디저트 카페에서 일하며 뿌듯함과 보람을 느끼곤 했는데, 오늘은 모든 게 다 원망스러웠다.

“저기요, 저 와인도 포장해 달라니까요?”

“아, 아, 네! 죄송해요. 포장해 드릴게요!”

바쁜 가게 안은 나루에게 우울해할 틈을 주지 않았다. 손님의 목소리에 정신을 바짝 차린 나루는 퇴근 시간이 다가올 때까지 최선을 다해 제 할 일을 완수했다.

어느덧 해가 내려앉은 저녁 시간이 다가왔다. 나루는 유니폼을 벗고 나와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주방팀은 야근이었고, 서연은 실수한 게 미안해서 끝까지 남아, 가게 일을 돕겠다고 했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

“수고했어요, 나루 씨.”

서로 주고받는 인사말이 건조했다. 어쩌다 보니 홀로 퇴근하게 된 나루는 직원들 눈치를 살피며 가게 문을 닫고 나왔다.

차라리 나도 돕겠다고 할걸.

비척비척 걸음을 옮기다 문득 후회스러운 마음이 솟구쳤다. 규연이 없는 어두컴컴한 집에 돌아가야 하는 게 오늘따라 죽기보다 싫었다. 그럴 바에는 힘들어도 가게에 남아 일을 돕는 게 나을 듯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했을 땐 이미 늦은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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