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브에 찾아온 위기 (2) (109/130)

이브에 찾아온 위기 (2)

똑, 딱, 똑, 딱. 초침이 일정하지만, 빠르게 흘러간다. 나루는 정신없이 쏟아지는 일에 허우적거리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예전에는 늘 퇴근 시간이 기다려졌는데, 이상하게 오늘은 반갑지 않았다.

집에 갈 때, 규연이랑 또 어색하겠지. 서로 말도 잘 안 하고. 무엇보다, 규연이 오늘도 상태 안 좋아 보여. 분명히 싸울 거야.

곁눈질로 규연을 살피던 나루가 초록빛의 포장용 끈을 창고에 내동댕이쳤다. 한창 사랑하기 바쁠 시기에 이게 무슨 고역인가. 설움이 예고도 없이 울컥, 울컥, 치솟았다.

“짜증 나, 개짜증…….”

나루가 할 수 있는 건 홀로 짜증을 해소하는 것밖에 없었다. 던져 봤자 팔랑이기만 하는 끈은 안 그래도 예민해진 신경을 괜히 더 자극했다.

퇴근 시간을 앞두고 창고를 정리하러 들어온 나루는 한숨만 연신 쉬어대고, 손을 움직이지 않았다. 오늘 하루 어떻게 일을 한 건지 신기할 정도였다.

집에 따로 가야 하나. 아니, 그냥 용기 내서 말 걸어 볼까. 사실 어제는 감정이 격해졌었다고, 서운한 마음도 컸다고, 그래도 이해해 보려고 노력은 했다고….

평소였다면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내뱉었겠지만, 이상하게 지금은 그게 되지 않아 답답했다. 이런 경험이 처음이라 그런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맞지, 최범현 그 사람이랑 살 때는 그냥 내가 전부 잘못한 거여서 빌었으니까. 싸운다는 게 뭔지도 몰랐어.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지? 비는 건 내가 잘못했을 때만 해야 하는 거야. 지금 내가 무릎을 꿇으면, 규연이가 당황스러울 거고. 아니, 그래도 지금 상황에서는 무릎을 꿇는 게 맞는 건가.

연애 어려워. 연애는 정말 어렵다. 좋은데, 너무 어려워….

똑똑.

“나루 씨, 집에 안 가요?”

“어, 이거 정리하고 가려고 했어요.”

“정리 안 해도 돼요. 내일 크리스마스이브라 많이 바쁠 테니까, 최대한 체력 아껴요!”

나루가 좌절하고 있는 사이, 눈치 빠른 서연이 나타났다. 서연은 창고 정리 따위 됐다며 나루를 서둘러 퇴근시켰다. 부추기는 행동이나 말투가 왠지 평소보다 더 과장되어 있었다. 

나루는 밖으로 나오고 나서야 서연이 왜 이렇게 호들갑을 떨었는지 깨달았다.

“어머, 사장님. 퇴근하세요? 나루 씨, 얼른 가요.”

“…저, 저는.”

“잘 가요! 내일 봐요!”

“그, 그, 네…!”

카운터 앞에 규연이 떡하니 서 있었다. 퇴근 준비를 마친 건지, 외투까지 말끔히 입은 게 태가 나 보였다. 나루는 서연에게 등 떠밀려 옷을 대충 갈아입고 나와 섰다. 어정쩡한 자세가 어이없이 우스웠다.

서연이 나루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 해맑은 표정과 달리 나루의 표정은 녹아내린 아이스크림 같았다.

“가자.”

“응.”

규연과 나루 사이에 무미건조한 대화가 오갔다. 얼핏 그 소리를 들은 서연은 둘 사이를 안타까워하며 발을 굴렀다. 건후가 옆에서 말리지 않았더라면, 또 커플 사이에 끼어 오지랖을 부릴 뻔했다.

친구 같은 직원들을 뒤로하고 나온 나루는 오랜만에 규연의 등을 바라보며 걸었다.

여전히 넓고 듬직해 보이는 등. 가만히 뒤태를 감상하던 나루는 발을 빠르게 움직여 규연과 보폭을 맞추었다. 옅게 쌓인 눈 위를 반쯤 뛰듯이 걷자 뽀득, 뽀득, 하는 운동화 소리가 났다. 규연은 소리만으로 나루의 행동을 알아채고 알아서 걸음을 늦춰 주었다.

“조금 기다려, 차 가지고 나올게.”

“나 걸어갈까?”

“…….”

“규연이 네가 싫어할까 봐….”

“그런 소리 하지 마.”

온종일 무덤덤하던 규연의 목소리가 잠깐이나마 유하게 풀어졌다. 말투는 어딘가 여전히 딱딱했지만, 무섭지 않았다.

짧은 대답과 함께 사라진 규연이 곧 차를 끌고 나타났다. 나루는 얌전히 조수석에 올랐다. 문을 닫고, 앞만 바라보고 있으니 규연이 말을 걸었다.

“안전벨트 매.”

“…….”

꺼낸 말은 안전벨트를 매라는 게 다였다. 나루는 자이로드롭에서 뚝, 떨어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저 사소한 말일 뿐인데, 왜 서운한 마음이 드는 건지.

안전벨트는 늘 규연이가 해 줬는데. 싸웠다고 이것도 안 해 주고. 아니, 정확히 싸운 게 아닐지도 모르는데. 너무해.

느릿하게 손을 움직인 나루가 안전벨트를 맸다. 탈칵, 하는 소리가 들리자 규연이 부드럽게 액셀을 밟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은 숨 막힐 정도로 고요했다. 나루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규연에게 대화를 시도하지 못했다. 묵직하게 내려앉은 분위기가 부담스럽고, 어색하고, 또 익숙하지 않아서, 쉬이 입을 열 수 없었다.

그건 규연 또한 마찬가지였다. 어젯밤, 나루에게 한 행동이 미안해서 최대한 다정하게 굴었었다. 그러나, 나루 혼자 자러 들어가는 모습에 저도 모르게 감정이 상하고 말았다. 조금 더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다는 걸 아는데도, 이상하게 말이 까칠하게 튀어나왔다.

상한 감정은 아침, 그리고 지금까지 지속되었다. 대화를 하고 싶어도, 나루가 불편해하는 게 보여서 마음대로 말을 걸 수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두 사람은 집까지 오는 데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남들이 보면 답답하다며 가슴을 칠 만한 행동들이었다.

탁!

차에서 내린 나루는 잠그지 못한 패딩을 여미며 발을 동동 굴렀다.

“엣취! 으엣, 치!”

“왜 지퍼도 안 올리고, 감기 걸리잖아.”

“깜빡해, 서, 흐엣치!”

“얼른 들어가.”

찬바람을 맞은 탓일까. 앙증맞은 재채기가 여러 번 튀어나왔다. 나루는 코를 훌쩍이며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그리고 또다시 정적. 정적, 계속해서 정적이 이어졌다.

규연은 살가운 듯 나루를 챙기다가도 금세 건조하게 굴었다. 대놓고 쌀쌀맞지 않아 다행이었지만, 가슴 한편이 씁쓸해졌다.

덜컹.

집으로 돌아온 나루는 곧장 욕실로 향했다. 뜨거운 물에 몸을 푹 담그고 있다가, 두꺼운 이불을 덮고 잠들면 감기 기운이 그대로 사라질 것 같았다.

“내일 일 힘들지도 몰라, 몸 상태 안 좋으면 말해.”

“아니야. 나 괜찮아.”

“…알겠어, 푹 쉬어.”

“응?”

“푹 자라고. 이불 꼭 덮고.”

욕실 문을 살짝 연 규연이 나루를 걱정했다. 기침을 내뱉던 게 신경이 쓰인 모양이었다. 괜찮다며 고개를 휘젓던 나루는 푹 자라는 말에 입술을 축, 늘어뜨렸다.

오늘도 따로 자는 건가? 오늘은, 같이 자도 될 거 같은데…….

아쉬움에 입술을 오물거리던 나루가 같이 자자며 운을 떼려던 참이었다.

달칵.

타이밍은 꼭 이럴 때만 빗나갔다. 말을 건네기도 전에 문이 먼저 닫혀 버렸다. 나루는 어쩔 수 없이 오늘도 혼자 잠들기로 했다.

바로 내일이 크리스마스이브인데. 규연이랑 언제까지 이런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 거지. 나도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찰방, 찰방, 하는 물소리가 욕실 전체에 울렸다. 의미 없이 물장난을 치던 나루는 한참이 지난 후에야 욕실에서 빠져나왔다.

규연이는 자려나. 그냥 몰래 들어가서 같이 자 버릴까. 아니야, 그러기엔 지금 너무 어색해. 이건 예전의 내가 아니야.

나는, 나는 규연이가 뭐라 해도 당당하게 행동할 자신이 있었는데! 그랬는데!

왜, 지금은 못 하는 거야…….

시무룩해진 나루가 규연의 방 앞에서 서성이다 말고 제 방으로 돌아왔다.

풀썩.

침대에 엎어지니 뒤늦게 피로가 몰려들었다. 나루는 머리카락을 말리지도 못한 채 잠들어 버렸다.

이날, 나루는 행복한 꿈을 꿨다. 크리스마스이브, 깔끔히 화해한 규연과 손을 맞잡고 불빛들이 반짝이는 거리를 걷는 꿈이었다. 꿈속의 나루는 뿌듯하게 일을 마치고, 이른 저녁부터 규연과 함께 크리스마스 파티를 준비했다. 근사한 호텔에서 와인도 따고, 귀여운 눈사람 사탕이 올라간 케이크도 나누어 먹고, 끝으로는 부드럽고 달콤한 키스를 나누었다.

잠에 취한 나루는 무의식중에 생각했다.

내일은 이럴 수 있을 거야. 크리스마스이브고, 또 크리스마스도 다가오는 날이니까. 규연이랑 전처럼 사이좋게 돌아갈 수 있을 거야.

보채지 않고도 여느 연인처럼 자연스레 스킨십하고, 마냥 행복하기만 한 크리스마스이브가 되겠지.

크리스마스에는 어떨까. 둘이서만 맞이하는 크리스마스. 사실 너무 기대 돼.

나루는 작은 희망을 품고, 슬며시 미소 지었다.

* * *

희뿌연 구름 사이로 태양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하는 아침. 하늘은 크리스마스이브를 기념하듯 새하얀 눈송이를 흩날렸다.

일찍이 일어나 출근 준비를 마친 나루는 규연의 방 앞에 등을 기대고 앉아 꾸벅꾸벅 졸았다. 잔다고 잤는데, 이상하게 피로가 쌓이는 게 몸이 묵직했다.

덜컥.

마침 일어난 규연이 방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그러자, 졸고 있던 나루가 눈을 번쩍 뜨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애정을 갈구하는 동그란 눈동자를 마주한 규연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허리를 숙였다. 눈높이가 맞춰지자 두 시선이 맞물렸다.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

“규연이 네가 아직 안 일어나서….”

“금방 씻고 올게. 소파에 가 있어.”

“응…!”

규연이 준비를 서두르기 시작했다. 나루는 시키는 대로 소파에 앉아 잠시나마 잠을 청했다. 푹신한 쿠션 위로 엉덩이를 붙이고 앉으니 몸이 나른하게 풀어졌다.

두 사람은 늘 먹던 아침도 건너뛰었다. 시간이 조금 여유로웠으나, 아침 식사를 챙길 상황이 아니었다.

준비를 마친 규연은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며 잠든 나루를 발견하고 조금 더 자도록 두었다. 오늘 일이 많이 고될 텐데, 조금이라도 더 쉬게 하고 싶었다.

“으음…….”

이십 분 정도가 지났을까. 눈을 뜬 나루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침 안 먹는 건가? 크리스마스이브 바쁘다고 해서 일부러 같이 아침 먹으려고 일찍 일어난 거였는데.

혹시나, 싶어 부엌으로 가 본 나루는 실망하며 입술을 쭈욱 내밀었다.

“일어났어? 가자.”

“벌써?”

“오늘은 조금 일찍 가야지. 배고프면 차에서 이거 먹고.”

“…….”

외투를 챙겨 입고 나온 규연이 어서 나가자며 고갯짓을 했다. 동시에 나루의 오른손 위로 단백질 바 하나가 쥐어졌다.

가게가 바쁘다는 걸 아는데, 조금 실망스럽다.

나루의 기분이 심해까지 가라앉았다. 손에 쥔 단백질 바 하나가 괜히 초라하게 느껴져서였을까. 아침부터 감정이 들쑥날쑥 난리도 아니었다.

함께 집을 나서서 차에 탄 두 사람은 말없이 안전벨트를 맸다. 나루는 그렇게 고집하던 안전벨트를 스스로 매고, 창밖만 바라봤다. 부드럽게 핸들을 돌리던 규연은 그런 나루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밤사이 심란한 마음을 좀 가라앉힌 건지, 목소리 톤이 차분해져 있었다.

“왜 안 먹어. 배고플 텐데.”

“…괜찮아. 이따가 정수 형이 케이크 하나 남겨 준다고 했어.”

어제 오후, 같은 직원인 정수가 규연과 함께 크리스마를 즐기라며 한정판 케이크를 남겨 주겠다고 말했었다. 잠깐 잊고 있었는데, 그 말을 떠올리니 기분이 미미하게 나아지는 것 같았다.

“우리 오늘 저번에 말했던 것처럼, 아, 아니야.”

말을 끝내자마자 무언가를 망설이던 나루는 크리스마스 계획을 이야기하려다 멈칫했다. 호텔 이야기를 꺼냈다가 규연이 오해하는 바람에 속상했던 일이 아직 생생했다. 지레 겁먹은 나루가 말을 잇지 못하자, 규연의 눈썹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왜, 계속 말해 줘.”

“그게, 이따 일 끝나면―,”

“잠시만.”

기껏 용기 내서 운을 띄웠건만, 타이밍 나쁘게 전화가 걸려 왔다. 규연은 미안하다는 듯 손짓하고, 전화를 받는 데 집중했다. 이상하게 타이밍도 안 맞고, 되는 일이 없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