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브에 찾아온 위기 (1)
대체 놀이터에서 뭘 한 건지, 손이 엉망이었다. 흙먼지에, 손톱에는 모래가 가득 껴서 당장 씻어내야 할 듯했다. 나루가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규연은 제가 나서서 손을 씻겨 주었다. 나름 나루의 기분을 풀어 주려는 행동이었다.
쏴아아아.
세면대에서 물이 쏟아져 나왔다. 벽에 붙은 커다란 거울에는 어색해진 규연과 나루의 모습이 비쳐 보였다.
“손 줘.”
“…….”
적당한 온도의 물에 손을 가져다 댄 규연이 비누 거품을 내어 손톱 사이사이를 부드럽게 닦아내 주었다. 그 다정한 손길에 다시 한번 마음이 흔들린 나루는 홀로 혼란스러워하는 중이었다.
규연이가 나한테 한 말이 속상한데, 또 이러니까 이해하고 싶어져. 이상해. 연인 관계면 이런 감정을 느끼기도 하는 걸까.
두 손이 깨끗해지는 사이, 고민하던 나루는 오늘 하루 어떻게든 규연의 마음을 이해해 봐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제 가서 자자. 시간 늦었어.”
“…나 오늘은 혼자 잘래.”
“하아…….”
규연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또 다른 오해가 생겨 버렸다.
혼자 자겠다는 나루의 말에 규연이 대놓고 한숨을 터뜨렸다. 오늘로 벌써 심장이 두 번이나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루는 땅바닥에 고개를 처박은 채 규연과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내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고집을 부리는 건가.
나루를 살펴보며 생각하던 규연은 서운해지려는 마음을 애써 다잡고 대답했다.
“알겠어. 그렇게 해.”
“…….”
나지막하게 대답한 규연이 슬리퍼 끄는 소리를 내며 멀어졌다.
달칵.
그리고 곧,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욕실 앞에 혼자 남게 된 나루는 울먹이며 꾹 닫힌 문을 바라봤다.
난 그냥, 나쁜 의도 없이 혼자 자겠다고 한 건데….
매정한 규연의 태도가 낯설면서도 서러웠다. 꼭, 이 집에 처음 온 날이 떠올랐다. 온통 낯설고, 규연은 무섭고, 벌벌 떨기만 하던 그때가.
소심한 발걸음으로 제 방까지 들어온 나루는 침대에 맥없이 쓰러져 누웠다. 벽지를 멍하니 바라보며 생각 정리를 하려고 해도, 복잡해지기만 할 뿐이었다. 밀려드는 씁쓸함에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쓴 나루가 참고 있던 눈물을 툭, 흘려보냈다.
이거, 싸운 건가. 서로 엄청 소리 지른 건 아닌데, 이상하게 싸운 기분이 들어.
“흐읍…….”
규연을 이해할 틈도 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한 번 터진 눈물은 그칠 줄 모르고 흘러댔다. 나루는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입을 꾹 틀어막은 채, 조용히 울었다.
그렇게 크리스마스 나흘 전의 밤이 쓸쓸히 지나갔다.
크리스마스이브가 코앞까지 다가와도 직원들은 편히 약속을 잡을 수 없었다. 가장 바쁜 시기인지라, 일이 쉴 새 없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오늘은 유독 삭막한 공기가 맴돌았다. 다들 한정판 케이크 준비에 바빠서 그런 걸까.
“포장지 좀 채워 줘.”
“네.”
서연은 그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제 옆에서 대화를 나누는 규연과 나루를 관찰하던 그녀는 슬쩍 뒤로 빠졌다.
콕콕.
설거지 중인 건후를 손끝으로 찌른 서연이 일방적인 귓속말을 시작했다.
“나루 씨랑 사장님, 분위기 이상하죠.”
“뭐, 오늘 좀 이상하긴 하네요.”
“아무래도 싸운 모양이에요. 나루 씨는 기운이 하나도 없고, 사장님은 웬일로 여기 와서 닭살 안 떨고. 틀림없어.”
“어제까지 괜찮았는데 이상하네요.”
서연의 촉은 날카롭고 또 예리했다. 건후는 그럴듯한 이야기에 무신경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곁눈질로 나루와 규연의 상태를 살폈다.
서로 이야기는 하지만, 평소와 달리 친근하게 굴지 않는 태도. 심지어 눈도 잘 안 마주친다.
“제대로 싸운 것 같은데, 왜 하필 크리스마스 다가올 때 싸웠대. 어떡할까요?”
“우리가 뭐 할 수 있는 게….”
“있죠. 건후 씨는 나루 씨한테 무슨 일 있냐고 물어봐요. 나는 사장님을 맡을 테니까.”
싸움 구경할 생각에 신이 난 걸까, 아니면 정말 두 사람이 걱정된 걸까. 서연의 오지랖이 이럴 때 발동됐다.
건후에게 지시를 내린 서연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떨어져 규연의 동선을 체크했다. 혼자 남았을 때 다가가 연애 상담을 유도할 생각이었다. 반면, 건후는 제 할 일을 느릿하게 마쳐 놓고서야 나루에게 다가섰다.
“너 오늘 무슨 일 있어?”
“…없는데.”
“이게 없는 얼굴이냐.”
“…….”
“으휴, 한가할 때 빨리 말해 봐. 들어줄게.”
툭툭 내뱉었지만, 건후는 내심 나루가 제게 고민을 털어놓길 바랐다. 워낙 기가 센 애라 걱정하지 않았는데, 가까이서 보니 얼굴이 꽤 상해 있었기 때문이다. 울었는지 눈가는 퉁퉁 부었고, 다크서클도 내려와 있고, 입술도 퍼석하니 보는 사람이 다 안쓰러웠다.
나루는 매장 안을 쭉 둘러보며 한가하다는 걸 확인한 후에야 침을 삼켰다.
“나가서 얘기하고 싶지.”
“응.”
“오케이, 나가서 얘기해.”
눈치 빠른 건후는 나루를 끌고 카페 뒤편으로 나왔다.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날씨가 추워져서 얇은 차림으로 있는 게 부담스러웠지만, 최대한 나루의 이야기에 집중해 보기로 했다.
덜컹.
문을 닫고 나온 나루는 춥지도 않은지 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건후는 그 옆에 서서 앞치마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넣고 기다렸다.
“내가 소중한데, 왜 나랑은 안 해?”
“…네 고민 들을 때마다 놀라는 거 알긴 해?”
“…….”
저번에 그 고민인가. 건후는 대뜸 튀어나온 나루의 질문에 당황하다가도 안정을 되찾았다.
진도에 관한 싸움이라. 연인 사이에서 충분히 벌어질 수 있을 만한 트러블이었다. 다만, 나루는 이런 문제를 겪는 게 생소해 보였다.
연인 사이에 끼는 게 가장 힘들다던데, 어쩌다 걸려 버렸구나. 잠시 좌절에 빠진 건후는 최선을 다해 정석적인 답을 전해 주었다.
“말 그대로 네가 너무 소중해서, 아껴 주고 싶은 거겠지.”
“내가 싫어서, 그래서 그렇게 얘기한 거면?”
이것만큼 올바른 답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나루에게서 예상치 못한 말이 돌아왔다. 건후는 할 말을 잃은 채 두 눈을 끔뻑였다. 나루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고민을 말해 보아도 해결되는 건 없었다. 둘만의 문제라서 그런 걸까. 속이 꽉 막힌 듯 조여왔다.
멋쩍게 서서 목 언저리를 긁적이던 건후는 나루의 뒤통수를 거칠게 쓰다듬어 주었다. 제 나름의 위로였다.
“송나루, 기운 내. 어? 규연이 형이 너 진짜 좋아해서 그러는 거야.”
“나도 알아…….”
“알아? 그럼 됐네. 너무 성급할 필요 없고.”
“…크리스마스에는 다 사랑한다며.”
건후는 이번에도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드디어 위로할 구멍을 찾았나, 싶었는데 더 큰 벽이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다.
그래, 크리스마스에는 보통 다, 응, 그렇지. 규연이 형도 이상하네. 대체 무슨 이유로 송나루를 이렇게 밀어내는 거지.
급기야 궁금증을 품은 건후가 나루의 옆에 같이 쪼그려 앉아 머리를 기울였다.
덜컹!
조용히 고민을 이어갈 때쯤, 뒷문이 열리더니 주방팀 직원이 다 죽어가는 얼굴로 두 사람을 불렀다.
“손님 들이닥친다, 아이고. 나 죽네.”
“들어갈게요!”
“갑니다, 가요.”
죽는다는 한마디에 벌떡, 일어선 나루가 잽싸게 가게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건후는 심란함이 묻어 나는 뒤통수를 바라보며 혀를 찼다.
규연이 형이랑 관계가 괜찮아져야 할 텐데. 으이고. 이러다 우리 다 새우 등 터지는 거 아니야?
그럴듯한 걱정이었다. 건후는 건들거리는 걸음으로 나루에게 다가가 어깨를 두어 번 토닥였다.
“꼭 화해해라. 꼭이야.”
“…….”
건후의 진지한 얼굴에 입술을 삐죽 내민 나루가 고개를 돌려 버렸다.
냉전이 이어지다 보니 나루의 마음에도 한기가 돌았다.
화해고 뭐고, 크리스마스 싫다.
크리스마스 따위, 정말 싫었다.
한편, 재료를 체크하는 척하며 괜히 서랍 이곳저곳을 뒤적이던 서연은 규연에게 자연스레 접근했다. 규연은 눈에 잘 띄지 않는 구석 테이블에서 노트북으로 무언가를 작업하고 있었다. 뿌듯할 정도로 바쁘게 움직이는 손과 달리, 얼굴은 똥이라도 씹은 사람처럼 불쾌해 보여서 위기감이 다 느껴졌다. 하지만 서연은 짬이 찰 대로 찬 베테랑 직원이었다. 규연의 똥 씹은 표정에는 이미 면역이 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슬금슬금, 규연의 옆자리에 착석한 서연은 테이블 위를 조심스럽게 노크했다.
“왜.”
“사장님, 오늘 뭐 기분 안 좋은 일 있으세요?”
“딱히 없는데.”
“있으신 것 같은데요….”
“일 안 해?”
악덕 사장 같으니라고. 요즘 나루 씨한테 하는 행동 보고 많이 사람 됐다고 생각했는데, 개뿔이다. 개싸가지.
속으로 규연의 욕을 한 바가지 늘어놓던 서연이 찌푸려지는 표정을 애써 다잡고 환하게 웃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해맑은 미소. 나루에게 배운 미소였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던데, 규연은 아무렇지 않게 뱉을 사람이었다. 왜 여기 와서 쓸데없는 짓을 하냐는 듯, 눈으로 욕하는 게 대놓고 느껴졌다.
“사장님, 혹시 나루 씨랑 싸우셨어요?”
“…….”
“제가 조금 도와드려요…?”
“도와주긴 뭘 도와줘. 가서 일이나 하라니까 짬 차서 혼자 농땡이나 피우고.”
도저히 말이 통하지 않았다. 새삼스럽게 재수 없는 규연의 성격에, 괜히 나섰다가 쓴소리만 듣게 된 서연이 울상을 지으며 일어섰다. 둘 사이에서 고통받지 않으려고 한 짓이었는데, 스스로 고통받게 된 셈이었다.
저 싸가지. 나루 씨한테 절대 용서하지 말라고 바람 넣어 버릴까 보다.
규연 몰래 주먹을 꽉 쥔 서연이 별다른 말 없이 카운터로 복귀했다. 마침 카운터에서 포장 작업을 이어가던 건후가 돌아온 서연을 안쓰러운 표정으로 반겨 주었다. 안 봐도 결과는 뻔하다는 듯 구는 게, 규연의 성격을 잘 아는 사람다웠다.
“사장님 짜증 내죠?”
“짜증이 뭐예요. 아주 난리 난리를.”
“푸흡, 그럴 줄 알았어요. 그냥 내버려 두죠, 뭐. 커플 사이에 흔히 있는 싸움 같은데.”
씩씩거리는 서연을 보며 웃던 건후가 체념한 말투로 이야기했다. 커플 사이의 문제는 절대 타인이 해결해줄 수 없었다. 괜히 도와줬다가는 방금처럼 욕이나 들을 수도 있고, 그냥 가만히 있는 게 최선이었다. 서연도 그걸 아는지 더 오지랖을 부리지 않았다. 건후의 말에 격하게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이던 그녀는 야무지게 팔짱을 끼고 중얼거렸다.
“그래요. 어떻게 되는지 두고 볼 거예요. 사실 아무리 저렇게 찬바람 날려도 저 두 사람 안 헤어질 거 같거든요. 저만 이렇게 느끼는 거 아니죠?”
“맞아요. 저도 그렇게 느껴요. 원래 커플이 그런 거잖아요. 붙었다 떨어졌다가, 싸웠다 말았다.”
“에휴, 나도 싸울 남자 친구 좀 있으면 좋겠다.”
대화 주제는 자연스레 서연의 미래 남자 친구 이야기로 넘어갔다. 바쁘지만, 직원들끼리 나름 단란한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었다. 그사이에 섞이지 못하는 건, 오직 나루와 규연뿐이었다. 우중충한 낯빛으로 걸레질을 하던 나루는 시계를 바라보았다가, 시선 끝에 걸리는 규연을 슬쩍 훑었다.
마찬가지로 어두운 안색에 좋지 못한 표정. 규연 또한 나루와 상태가 비슷했다.
나루는 대화를 시도하려다 말고 규연을 등졌다. 아까 건후와 짧게 얘기를 나눈 후로 마음이 더 심란해져서, 쉽게 규연의 곁에 다가가기 어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