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급하면 비틀리는 법 (7)
식탁 위의 공기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규연의 까칠한 반응에 당황하던 나루는 곧 입술을 축 늘어뜨렸다.
나를 그렇게밖에 안 보냐니. 유규연 너무해. 그냥 술 마시자고, 그 말 하려고 했던 건데. 예민하게 굴고….
규연의 말 한마디에 나루의 설움이 북받쳐 올랐다. 낮부터 마음이 심란했어도, 늘 자신을 생각해 주는 규연을 위해 참고 참았는데. 이런 취급을 받으니 서럽다 못해 짜증이 났다. 하지만 규연은 이런 나루의 감정을 헤아리지 못하고 한숨 섞인 목소리를 내뱉었다.
“난 네가 졸라서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는 거 싫어.”
“나 그 말 하려고 했던 거 아니거든? 너무해 진짜로.”
의자를 박차고 일어난 나루가 제 밥그릇을 챙겨 싱크대에 처박아두었다. 나루의 외침에 멍해진 규연은 부엌을 떠나는 뒷모습만 바라볼 뿐, 차마 나루를 붙잡지 못했다.
콰앙!
일부러 문을 세게 닫은 나루가 씩씩거리며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서랍을 뒤져 아까 숨겨둔 팔찌를 꺼내 손에 꼭 쥐었다. 손바닥 위로 닿는 서늘한 팔찌의 느낌에 잠시 흠칫하던 나루는 망설이지 않고 창문을 열었다.
드륵, 하고 열린 창문 사이로 찬 겨울바람이 매섭게 흘러들었다.
“이걸 산 내가 바보 같아. 유규연한테 절대 안 줄 거야.”
비집고 나오려는 눈물을 억지로 삼켜낸 나루가 손에 쥔 팔찌를 그대로 내던졌다. 짤랑거리는 소리를 내며 창문 밖으로 날아간 팔찌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어…….”
팔찌를 던지고 나서야 이성을 되찾은 나루가 창문 밖으로 고개를 쏙 내밀었다. 찬바람을 맞아서 볼과 귀가 빨갛게 얼어붙었지만, 나루는 밖을 내다보는 데 집중했다.
아니, 정확히는 자신이 내던진 팔찌를 애타게 찾았다. 없어, 없다. 진짜 던져서 사라졌어. 규연이한테 주려고 했던 팔찌가….
순간의 감정에 휩쓸리는 게 제일 무서운 거라고 하던데. 그 말을 나루는 다시금 실감했다.
“아니야, 나도 몰라. 신경 쓰지 마. 규연이한테 선물 같은 거 안 줄 거야. 안 줄 건데….”
나루의 눈시울이 금세 붉어지더니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져 내렸다. 신경 쓰지 않겠다는 말과 다르게 몸은 외투를 성급히 껴입고 있었다.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꾹꾹 눌러 삼킨 나루는 소매로 눈가를 벅벅 닦아냈다.
덜컥!
우두커니 서 있던 다리가 방을 나서자마자 빠르게 교차하며 뜀박질을 시작했다. 정신없이 신발을 신은 나루는 규연에게 나간다는 언질도 않고 현관문을 열었다.
“나루, 송나루!”
식탁을 정리하던 규연은 도어락 닫히는 소리에 놀라 나루의 이름부터 부르고 봤다. 하지만 나루는 이미 집을 나선 뒤였다.
“갑자기 어딜 뛰어나가는 거야…!”
나루가 가출이라도 하는 줄 알고 놀란 규연이 재빠르게 외투를 챙겼다.
한편, 집에서 나온 나루는 엘리베이터도 타지 않고 계단을 뛰어 내려왔다.
“팔찌, 내가 이쯤에 던졌는데.”
외투도 제대로 잠그지 않은 채, 아파트 화단 근처를 돌아다니던 나루가 핸드폰 손전등을 켜 바닥을 꼼꼼히 살폈다.
“팔찌…!”
운이 좋았던 걸까. 나루는 손쉽게 팔찌를 찾아냈다. 은으로 만들어진 팔찌라 그런지 손전등을 비추니 어둠 속에서도 반짝이며 빛난 덕이었다.
화단 근처로 뛰어가 팔찌를 주워 든 나루는 주변을 살피고 놀이터 쪽으로 장소를 옮겼다. 이대로 팔찌를 가지고 올라갔다가는 규연에게 들킬 게 뻔했다. 게다가 지금은 이 팔찌를 다시 서랍에 소중히 숨기고 싶지도 않았다.
“여긴 오랜만이네, 안녕….”
왕왕!
놀이터 구석진 곳으로 들어온 나루가 벤치 아래에 있던 길 강아지에게 자연스레 인사를 건넸다.
그러고 나서 나루는 맨손으로 거친 모래를 파내기 시작했다. 겨울이라 땅이 얼어붙어 딱딱했는데, 나루는 아랑곳하지 않고 손을 움직였다.
손톱 끝은 흙이 끼어 꼬질꼬질해졌고, 손가락 마디가 거친 모래에 닿아 새빨갛게 까져도 묵묵히 땅을 팠다.
왕왕!
‘손 아파. 그만해. 왜 그래?’
나루의 친구이기도 한 길 강아지가 걱정된다는 듯 짖으며 소매를 이로 잡아끌었다.
“숨길 게 있어서 그래.”
포근한 손짓으로 강아지를 밀어낸 나루가 얕게 파내어진 구덩이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 정도면, 다른 사람이 못 건드리겠지.
짤랑.
규연에게 선물할 팔찌가 구덩이 속에 떨어졌다. 나루는 파 놓았던 흙을 다시 그 위로 덮어 꼼꼼히 위장시켜 놓았다.
좋았어, 팔찌 냄새는 기억했으니까 괜찮아.
“에휴….”
팔찌를 묻고 나서야 진정한 나루가 그대로 놀이터 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그러자, 여기저기 숨어 있던 강아지들이 나루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오랜만에 열리는 강아지 정모였다. 강아지들에게 둘러싸인 나루는 자연스레 제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달밤에 고민 상담이라니, 왠지 더 서러워졌다.
손가락 끝으로 흙을 매만지던 나루가 무릎에 얼굴을 폭, 묻고는 웅얼거리기 시작했다.
“있잖아, 너희 크리스마스 알아?”
왕! 왕왕!
작은 질문에 꼬리를 흔들며 기다리던 강아지 한 마리가 해맑게 대답했다.
‘알아! 인간들이 좋아하는 날. 다들 이때 사랑을 나눈대!’
대답을 들은 나루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져만 갔다. 인간들이 좋아하고, 저들끼리 사랑을 나누는 날. 그래, 크리스마스는 그런 날인데.
“맞아, 그런데 나는 사랑 못 나눠. 나만.”
삐죽 튀어나온 입술은 물론이고,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듯한 나루의 표정에 강아지들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오랜 시간 친구로 있어 준 강아지가 나루의 팔에 머리를 문질렀다. 꼬질꼬질하지만 부드러운 갈색 털이 다정하고 귀여워서, 나루는 잠시나마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리고 또다시 이야기가 이어졌다.
“나는 오늘 서운한 마음도 숨기고, 규연이한테 잘해 주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나한테 막 짜증을 내. 선 긋는 것처럼. 있지, 갑자기 화내는 건 애인 사이 같지 않아. 그냥 주인님 같아….”
왕! 끼이잉.
속상한 마음을 털어내니 가만히 들어 주던 강아지 한 마리가 심심찮은 질문과 위로를 건넸다.
‘속상했겠다. 그런데 왜 서운해?’
왜 서운하냐는 질문에 나루의 말문이 턱, 막혀 버렸다.
“나는 섹스가 무서워. 그래서… 규연이한테 사랑을 못 받을까 봐 너무너무 불안해. 그런데 그걸 떠나서. 규연이가 나한테 자꾸 선을 긋는 거 같잖아.”
한참 동안 이어지던 정적이 깨지고, 나루의 차분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거짓 하나 없이 속마음을 그대로 토해내자, 이야기를 들어 주던 강아지들이 난처한 듯 고개를 기우뚱거렸다. 나루는 멀뚱히 앉아 있는 강아지들을 앞에 둔 채, 혼자만의 생각에 빠졌다.
섹스는, 사랑하면 해야 하는 거라고 그랬는데. 무서워하기도 전에 규연이가 날 거부했어. 왜지? …나, 정말 규연이한테 하나뿐인 애인이 맞는 건가?
이건, 전 주인이 하던 짓이랑 비슷했다. 사랑하면 얌전히 대 줘야 한다고 그랬으면서, 막상 직접적으로 하는 건 더럽다던 범현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리는 듯했다.
걱정이 커질수록 의심이 늘어갔다. 여태 규연과 진짜 애인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쌓인 감정이 터지니 사고가 정상적으로 되지 않았다.
나루가 한참 땅굴을 파고 들어갈 때였다. 아파트 단지를 정신없이 돌아다니던 규연이 놀이터로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송나루!”
“…….”
“날도 추운데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왜 갑자기 뛰쳐나간 건데, 사람 자꾸 걱정시킬래?”
규연은 놀이터에 쭈그려 앉아 강아지들과 정모를 열고 있는 나루를 발견하곤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작은 몸을 단번에 일으켜 잔소리를 퍼부어댔다.
잠깐 사이에 이곳저곳을 돌아다닌 건지 코가 묘하게 빨개져 있었다. 챙겨 입은 외투 또한 지퍼가 제대로 올라가 있지 않았다. 나루는 속상한 듯 말을 쏟아내는 규연을 묵묵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자 규연이 답답하다는 듯 대답을 재촉했다.
“여기서 뭐 하고 있었던 거냐고, 응?”
“…….”
나루는 대답할 수 없었다.
네가 나한테 짜증 낸 게 밉고 서러워서, 선물로 주려고 했던 팔찌를 던졌고, 그런데 또 던지고 보니 더 서러워져서 주우러 나왔다는 이야기를 어떻게 할까.
입을 꼭 다문 채 눈동자만 굴리고 있으니 규연이 다시금 한숨을 입 밖으로 내쉬었다. 옅은 한숨 소리와 함께 허공에 퍼지는 입김을 가만히 바라보던 나루는 왠지 서글퍼지는 기분을 느꼈다.
아니야, 걱정해서 그러는 거겠지. 내가 갑자기 뛰쳐나와서. 규연이는 나를 좋아하니까, 그러니까.
아니, 좋아하면 이렇게 행동 안 해. 나한테 짜증 내고, 내 이야기 끝까지 안 듣고, 다른 사람한테는 쉽게 하는 스킨십도…….
나루의 안에서 두 개의 감정이 대립했다.
“…왜 나한테 짜증 내?”
“짜증 안 냈어. 그냥 걱정돼서,”
“아까는 냈잖아. 내 얘기 다 안 들어 보고.”
“그건 네가 또 같은 말을 하려는 줄 알고, 미안해.”
끝내는 서러운 감정이 튀어나오고야 말았다. 말끝이 파르르, 떨리는 게 고스란히 느껴질 정도였다. 규연은 뒤늦게 나루의 감정을 깨닫고 사과를 건넸다. 나지막한 목소리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이미 마음이 상한 나루에게 사과가 제대로 들릴 리 없었다. 입을 축 늘어뜨린 채 울음을 참던 나루는 이렇게 된 김에 다시 질문을 던졌다.
“왜 나한테 선 그어? 나는 애인이 아니야? 나, 나랑은 더러워서 안 하고 싶어? 난, 나는 무서워도 너랑 사랑하는 거 좋은데, 규연이 너는?”
폭탄처럼 쏟아지는 질문에 규연의 얼굴이 황당함으로 물들었다가 가라앉았다. 눈썹을 찌푸리고 나루를 내려다보던 규연은 솔직하게 이야기해야 할지, 이대로 참아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1초, 3초, 6초…….
시간이 흘러가면 흘러갈수록 나루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규연은 결국 솔직한 이유를 말해 주었다.
“네가 소중해서 그래. 그리고 네가 수인이라는 게, 좀 걸려. 괜히 너 괴롭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안 좋아.”
혹여나, 나루가 들으면 불편해하지는 않을까 꽁꽁 숨기던 말이었다. 규연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루의 반응을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나루는 규연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소중해서는 그렇다 쳐도, 수인이라 걸린다는 게 묘했다.
내가 수인이라서, 그래서 안 된다는 거야?
오해는 겉잡지 못할 정도로 커졌다. 규연의 말뜻은 단순히 나루가 수인이라서 싫다는 게 아니었는데, 나루는 들리는 대로 단순하게만 생각했다.
나루의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지고, 동공이 빠르게 흔들렸다. 나루는 걱정 가득한 규연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다가도 삐딱한 대답을 내놓았다.
“나도 내가 이런 존재인 거 싫어.”
“송나루, 내 말뜻은 그런 게 아니야. 이건 내 양심상의 문제야. 저번부터 왜 자꾸 말을 그렇게 하냐. 듣는 사람 속상하라고 그래?”
“…….”
저도 모르게 화내듯 언성을 높인 규연이 급히 목소리를 가라앉혔다. 저번부터 나루가 본인 스스로를 낮추어 말하는 게 속상해서 욱하고 만 것이다.
모든 상황이 규연의 의도와 다르게 흘러갔다. 어쩌면 부드럽게 풀릴 수 있었던 둘 사이는 전보다 더 싸늘하게 얼어붙어만 갔다.
나루는 커진 목소리에 어깨를 움찔, 떨고 한 걸음 물러섰다. 규연이 제게 진심으로 화를 내는 게 처음이라 당황스럽기도 했고, 무엇보다 상처가 컸다.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 같은 게 느낌이 썩 좋진 않았다.
한참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서 있던 나루는 입술을 오물거리다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반박하고 싶지만, 자신도 똑같이 짜증 낸 게 있기에 참는 거였다.
사악.
운동화 바닥이 모래에 쓸리며 빙글, 돌았다. 말없이 뒤돌아선 나루는 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대화가 애매하게 끝난 상황에서 침묵이라니. 분위기가 더욱 가라앉을 수밖에 없었다.
규연은 조용히 나루의 옆에 붙어 걸었다. 알 수 없는 감정에 눈썹이 꿈틀거렸지만, 급한 와중에 챙겨 온 목도리를 나루에게 둘러주는 걸 잊지 않았다.
다시 집까지 올라오는 길은 고요했다. 들리는 건 엘리베이터 안내음이 전부였다.
<문이 닫힙니다.>
현관문 앞까지 도착한 나루는 비밀번호를 누르려다 말고 규연을 올려다보았다. 촉촉해진 눈동자가 얼마나 측은해 보이던지, 규연은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지고 말았다.
“송나루라고 하지 마. 나루라고 해.”
“…알겠어, 나루라고 불러 줄게.”
“…….”
덜컥!
나긋한 말투에 화가 누그러진 걸까. 문을 연 나루가 신발을 벗어두고 잠시 서 있었다. 규연은 재빨리 따라 들어와 나루의 팔을 잡아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