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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급하면 비틀리는 법 (6) (106/130)

조급하면 비틀리는 법 (6)

크리스마스가 임박한 디저트 카페는 전쟁터나 마찬가지였다. 손님들은 몰라도, 직원들에게는 그랬다.

“나루 씨, 케이크 예약 좀 받아줘요!”

“네!”

예약자 명단에 글씨를 막 휘갈긴 나루가 친절한 영업용 미소를 지었다. 바빠서 뭐라고 쓰는지도 모르지만, 손님에게는 친절한 게 제법 프로 같았다.

“나루, 입 벌려 봐.”

“아아.”

“먹으면서 해.”

포장지를 정리하던 나루의 입에 마카롱 하나가 쏘옥, 들어왔다. 정신없이 일하는 나루가 안쓰러워 규연이 틈틈이 간식을 챙겨 준 것이었다. 케이크 개수를 확인하던 서연은 닭살스러운 모습에 두 팔을 쓸어내렸다. 싫다는 티를 내면서도 끝까지 구경하는 게 우스웠다.

규연은 직원들 몫의 간식까지 챙겨준 후, 제 할 일을 하러 떠났다. 잠깐 나가야 할 일이 있는지, 짐을 챙긴 규연이 늦을 수도 있다는 신호를 보냈다. 나루는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여 주고 말았다.

문제는 규연이 없는 이 시점부터 시작됐다.

“쿠키는 선물용으로 포장해 드릴까요?”

“네, 네, 그렇게 해 줘요. 어 여보세요?”

카운터에 선 나루가 쿠키를 포장하기 시작했다. 크리스마스 선물용은 포장이 꽤 복잡해서 잠깐의 시간이 소요되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의도치 않게 이런저런 소리가 들려왔다.

으음, 오늘은 전화하는 손님. 목소리가 안 좋아. 화나셨나?

쿠키 포장을 부탁한 손님이 아까부터 전화기를 붙들고 놓지 않았다. 자세히 들어 보니 친구에게 고민을 털어놓고 있는 듯했다.

“아니 그러니까, 난 아직 거기까지 진도 뺄 생각이 없는데, 안 한다고 말하면 헤어질 기세잖아.”

왠지 나랑 비슷할 것 같은 이 대화!

손님의 앙칼진 목소리에 반응한 나루가 귀를 쫑긋 세우고, 포장하는 손을 더 느릿하게 움직였다.

“곧 크리스마스이기도 하고, 그땐 꼭 해야 할 거 같은데. 미치겠다, 정말.”

꼭 해야 한다는 건, 내가 생각하는 그런 게 맞겠지?

전화 엿듣기에 집중한 나루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여전히 손은 손님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꾸물거리고 있었다.

“그래, 난 좀 무섭단 말이야. 저번에는 싫다고 밀어내니까, 아예 손도 안 대더라? 싫다고 할 때마다 정이 떨어진다나 뭐라나.”

투둑.

들으면 들을수록 나루의 표정이 사색에 잠겨갔다. 그러다가 끝내 손에 든 쿠키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어떡해. 저 사람이 말하는 거. 내 상황이랑 묘하게 겹치는 부분이 있어.

“뭐예요?”

“어머! 이게 무슨, 아,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금방 새 걸로 포장해 드릴게요!”

“나 참.”

넋 나간 나루의 모습에 달려온 서연이 재빠르게 뒷수습하기 시작했다. 미안한 마음에 우물쭈물하던 나루는 그만 고개를 푹 숙여 버렸다.

이런 실수까지 하는 내가 싫다. 누가 그랬는데, 연애하면 감정이 내 마음대로 안 된다고.

아까는 괜찮았는데, 이런 얘기를 들으니까 또 신경 쓰여.

“나루 씨, 잠깐만 쉬다 와요.”

“아, 아니에요.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아냐 아냐, 나 정말 괜찮으니까 5분만 쉬다 와요. 나도 아까 쉬었어요. 빨리!”

“…감사합니다.”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한 나루가 떨어진 쿠키를 말끔히 치워 놓은 채, 밖으로 빠져나왔다. 쌀쌀한 바람을 맞고 있으니 나갔던 정신이 조금이나마 돌아오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정신이 돌아오자 생각이 더 많아졌다.

“후우우.”

볼을 빵빵하게 부풀린 나루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구경하던 나루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익숙한 번호를 꾹꾹, 눌렀다.

[규여니]

화면 속으로 익숙한 이름이 반짝였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전화 연결 버튼을 누른 나루가 조심스레 핸드폰을 제 귓가에 가져다 댔다.

-여보세요. 송나루? 나루야 왜.

“…뭐 해?”

-일하고 있어. 지금 좀 복잡해져서 피곤하다. 왜 전화했어?

“아니야. 그냥 쉬는 시간이라서.”

-많이 힘들면 일찍 들어가도 돼. 나 오늘 가게로 못 갈지도 몰라.

“아니야, 안 힘들어. 이따 봐!”

전화가 성급하게 끊겼다. 나루는 핸드폰을 제 주머니에 넣어 놓고 심호흡했다.

휴, 하마터면 규연이한테 이유도 없이 투덜거릴 뻔했다.

전화 너머로 들린 규연의 목소리가 유독 피곤해 보였다. 일이라면 한정판 케이크에 들어갈 재료를 보러 간 것일 텐데, 무언가 단단히 꼬인 모양이었다.

나루는 이제 공과 사를 조금이나마 구분할 줄 알았다. 규연이가 일하고 있을 때는 사적인 감정으로 방해하지 않기. 새로 생긴 나루의 철칙이었다.

지잉. 지잉.

넣어 두었던 핸드폰이 다시 진동음을 울렸다. 발신인은 서연이었다.

“어, 저 금방 들어갈게요!”

-어어, 아니에요. 나루 씨, 우리 잠깐 베이커리 브레이크 타임 가지기로 했으니까, 한 20분만 더 쉬다가 와요.

귓가로 서연의 목소리가 따닥따닥 들어와 박혔다. 그 야무진 말투를 멍하니 듣고 있던 나루가 미안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래도, 저 계속 쉬었는데…….”

-20분 딱 쉬고 들어와서 주방 좀 도와줘요. 나는 그때 잠깐 쉴게요. 됐지?

“…네!”

전화는 간단하게 끊겼다. 나루에게는 20분의 휴식 시간이 추가로 주어졌다. 서연이 센스 있게 시간을 분배해 줘서 부담 없이 휴식을 즐길 수 있을 듯했다.

이제 뭐 하지…….

순식간에 시간이 붕 떠 버린 나루는 괜히 가게 앞을 서성이다가 우뚝, 멈춰 섰다.

맞다, 팔찌. 크리스마스 선물!

규연과 출근할 때 보았던 팔찌가 눈에 아른거렸다. 언제 사러 가야 하나 기회를 보고 있었는데, 지금 가는 게 딱 알맞을 것 같았다.

투명한 진열대 위에서 반짝이던 은색 팔찌. 규연이한테 잘 어울릴 거야.

곧장 뒤돌아선 나루는 거침없이 걸어 아담한 소품샵 문을 열어젖혔다. 연인끼리 나누는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니. 꼭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로맨틱한 장면이 떠올랐다.

방금까지 꽁해 있던 나루의 표정이 어느새 환하게 바뀌었다. 미미하게 올라간 입꼬리에서 숨겨지지 않는 행복이 묻어 났다.

* * *

오후 시간은 더 빠르게 흘렀다. 겨울이라 해가 빨리 져서 그런 걸까. 투명한 통창 밖으로 입김을 뿜으며 퇴근하는 직장인들이 적지 않게 보였다.

“수고하셨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안녕, 나루 씨. 내일 봐요!”

드디어 퇴근이다. 퇴근. 신나는 퇴근 시간.

마음속으로 출처 모를 노래를 흥얼거리던 나루가 가게 문을 열고 나왔다. 규연이 퇴근할 시간까지 돌아오지 않았지만, 괜찮았다.

스윽.

나루가 빵빵한 패딩 앞주머니를 손으로 쓸었다. 두툼한 패딩 위로 각진 상자 하나가 만져졌다. 상자 안에 든 것은 아까 크리스마스 선물로 산 팔찌였다. 나루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크리스마스까지 선물을 숨겨야 한다는 게 곤란하면서도 왜 이리 즐거운지, 입꼬리가 내려오지 않았다.

“으, 춥다. 얼른 보일러 틀어야지.”

집까지는 금방이었다. 걸어가는지 날아가는지 모르고 막 움직이다 보니 현관문 앞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오니 캄캄한 집안이 나루를 반겼다. 보일러가 켜지지 않아 공기까지 서늘한 게 기분이 이상했다. 하지만 나루는 익숙하게 버튼을 눌러 보일러를 켜고, 제 방으로 달려갔다.

“팔찌는 여기에 숨겨야겠다.”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한 일은 팔찌를 숨기는 것이었다. 책상 서랍 맨 마지막 칸, 열어도 눈에 보이지 않을 만한 구석 자리. 무언가를 숨기기에 적합한 장소였다. 자그마한 상자를 구석에 소중히 모셔놓은 나루는 그제야 제 할 일을 시작했다.

씻기 위해 욕실로 들어온 나루는 따듯한 물을 틀어 놓고 고민에 빠졌다.

내가 저 팔찌를 규연이한테 주면서, 조심스럽게 내 지금 상황을 말하면? 사실, 너한테 사랑받고 싶고, 섹스도 아무렇지 않게 하고 싶은데, 무섭다고. 그래도 너는 나를 사랑해 줄 거냐고….

요즘 나루의 고민은 단 하나였다. 규연과의 관계. 생각을 안 하려고 해도 혼자 있으면 자꾸만 생각이 그리로 향했다. 찰박이는 물소리와 함께 나루의 등이 동그랗게 말렸다. 욕조에 앉아 무릎을 끌어안은 나루는 애써 고개를 저었다.

“이러다 보면 또 분위기가 안 좋아질지도 몰라. 그나저나 규연이는 언제 오지.”

그러고 보니 규연의 귀가가 늦어졌다. 욕조에 가만히 앉아 있던 나루는 벌떡, 일어서서 씻는 걸 서둘렀다.

쏴아아아.

샤워기를 틀어 온몸을 뽀득하게 씻어내니 기분이 괜히 새로웠다. 뽀송한 상태로 나온 나루는 옷을 갈아입자마자 거실 소파에 늘어졌다. TV를 봐도, 창문 밖을 구경해도, 시계를 뚫어지게 쳐다봐도, 규연은 오지 않았다.

전화해 볼까.

끝내 연락을 취해 보기로 한 나루가 핸드폰을 들었을 때였다.

지잉. 지잉.

오늘따라 전화 진동음이 여러 번 울렸다. 화면을 확인한 나루는 의외의 인물에 눈을 댕그랗게 떴다.

“여보세요?”

-나루, 잘 지내?

“규민이 형……?”

-하하, 내 목소리 알아듣네. 곧 크리스마스인데 뭐 해. 나루, 우리 규연이랑 데이트 약속 잡았나.

핸드폰 너머로 능글맞은 목소리가 웅웅 울렸다.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규민이었다. 안부 차 전화를 걸었는지, 나루를 대하는 게 유난히 반가워 보였다.

“아, 데이트, 네!”

-좋겠네, 나루. 형이랑도 만나 줘.

“좋아요.”

-좋아? 하하, 다행이네. 그나저나 규연이가 미리 크리스마스 데이트까지 잡고, 많이 발전했다.

“어떻게 발전해요…?”

무난하게 흘러가던 대화가 순식간에 흥미로워졌다. 나루는 규연의 과거가 궁금하다는 듯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규민이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가볍게 대꾸했다.

-규연이야 뭐, 애인이 있다 해도 항상 가볍게 만나는 것 같았으니까. 무슨 느낌인지 대충 예상이 가려나?

“가볍게….”

-누구한테 이렇게 마음 주는 건 네가 처음이라 서툴 거야. 그러니까, 우리 나루가 규연이 좀 잘 봐줘.

규민은 제가 무슨 실수를 했는지 깨닫지 못했다. 다른 사람과는 가볍게 만나왔을 테지만, 마음을 준 게 나루가 처음이라는 건 규민 나름대로 제 동생을 감싸면서 나루의 기분을 해치지 않으려고 한 말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나루에게는 규민의 말이 마냥 좋게 들리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랑은 가볍게 만났구나. 그런데 규민이 형 말투가 조금, 의미심장했어. 규연이는, 전에 만났던 사람들과 몸을 섞었던 걸까. 또다시 의심이 돋아났다. 나루는 애써 긍정적인 쪽으로 생각을 전환했다.

그래도 누구에게 마음을 주는 건 내가 처음이랬어. 규민의 말을 곱씹던 나루가 입꼬리를 빙글 올렸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 남은 섭섭한 감정은 어찌 지워낼 수 없었다.

그러던 중, 갑작스레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타이밍은 왜 늘 이런 건지. 하필 이럴 때 규연이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저, 지금 규연이가 와서, 전화를,”

-어, 나루야. 다음에 또 전화해?

“네!”

황급히 전화를 끊은 나루가 거실로 들어오는 발소리에 집중했다. 어딘가 지친, 느릿한 발소리.

“거실에 있었네. 안 추워?”

“그, 어, 보일러 틀었어.”

집으로 돌아온 규연은 어딘가 핼쑥해 보였다. 애써 다정한 말투를 내뱉고 있었으나, 나루는 알 수 있었다. 규연이 많이 피곤해하고 있다는 것을.

“오늘은 내가 저녁 만들게!”

규민에게 들은 게 있어 마음이 편치 않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나루는 규연의 등을 떠밀어 욕실로 들여보내곤 부엌으로 향했다. 간단한 저녁이라도 만들어 먹으면서 크리스마스 데이트 얘기를 나누면 피로가 풀리지 않을까.

규연이 씻는 사이, 나루는 인터넷을 뒤져가며 자신이 만들 수 있는 요리를 완성했다.

“네가 다 했어?”

“응, 계란찜이랑 고기 볶았어. 이거 봐. 당근도 넣었다.”

“맛있겠네. 고생했어.”

칭찬해 주는 말투가 미묘하게 무미건조했다. 나루는 식탁에 음식을 나르며 규연의 눈치를 살폈다.

규연이 기분이 많이 다운되어 있구나.

식사 시간이 평소보다 조용히 흘렀다. 규연은 간혹 핸드폰 화면을 확인하며 인상을 찌푸리다가도, 나루가 눈동자를 굴릴 때마다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반쯤 억지로 밥을 퍼먹던 나루가 분위기 전환을 시도했다.

“저번에, 크리스마스 때 이것저것 한다고 했잖아.”

“응, 그랬었지.”

주제는 자연스레 크리스마스로 넘어갔다. 나루는 규연과 하고 싶었던 일을 떠올렸다. 드라마에서 보면 연인끼리 와인이라는 걸 마시던데, 분위기가 꽤 좋아 보여서 꼭 따라 해 보고 싶었다.

살짝 들뜬 나루가 해맑은 얼굴로 입술을 떼었다.

“우리, 호텔에 가면 아무래도 같이….”

“넌 나를 그렇게밖에 안 보냐.”

“어?”

함께 술을 마셔 보자는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았는데, 규연이 신경질 섞인 목소리로 말을 끊어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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