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급하면 비틀리는 법 (5)
규연은 나루의 표정이 안 좋다는 걸 알고도 모르는 척했다. 나루가 진도를 나가지 못해 무작정 아쉬워하는 거라고 오해했기 때문이다.
힘들어서 축 늘어진 애를 데리고 무슨 짓을 하겠냐고.
규연의 나른한 시선이 나루의 몸 전체를 훑고 지나갔다. 추워서 덜덜 떨리는 몸, 울어서 시야가 어질거리는지 비틀거리는 다리. 게다가 뱃속도 물이 들어차서 탈이 났을지 모른다.
나루의 상태는 말도 아니었다. 당장이라도 침대에 눕혀 놓아야 할 만한 모습이었다.
“너 지금 상태 안 좋아. 안아서 옮겨 줄게, 이리 와.”
“아, 안 돼.”
“송나루.”
“나랑 섹스 안 해도 돼…?”
또 나왔다, 저 직설적인 화법. 각오하고 있던 규연은 나루의 순수한 눈망울과 어울리지 않는 언어 선택에 미간을 짚고 말았다. 나루는 직설적인 말을 대포처럼 쏘아댔다. 규연이 벗고 있는 제 모습에 꿈쩍도 하지 않는 거 같아서, 쓸데없이 마음이 착잡해진 모양이었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지금은 그럴 생각 없어.”
“……!”
황당해하던 규연이 딱 잘라 대답했다. 지금 같은 상황에 섹스를 안 해도 되냐니. 만신창이가 된 애인을 건드릴 사람이 몇이나 될까. 정신이 나가지 않은 이상, 할 수 없는 짓이었다. 규연의 말뜻은 그런 게 아니었는데, 제대로 착각한 나루가 충격이라도 받은 듯 손톱을 물어 뜯어댔다.
“사랑하잖아. 나 다리도 잘 벌릴게. 구멍도 안 다물리게 하, 할게, 응?”
“…야, 송나루. 너 말을 왜 그렇게 하냐.”
“뭐가…?”
“왜 그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냐고. 다리를 잘 벌린다니, 왜 너를 낮추면서까지…! 하아, 아니다.”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가 싸하게 가라앉았다. 나루는 제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도 몰랐다. 애초에 다리를 잘 벌린다느니, 구멍을 안 다물리게 한다느니, 하는 말들은 범현이 세뇌하듯 가르친 것이었다. 물론, 돌아온 반응은 싸늘하다 못해 찬바람이 쌩쌩 휘날렸다. 규연은 저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나루를 이해할 수 없었다. 확실히 애인 사이에서 오갈 법한 말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화가 머리끝까지 오르다가도, 규연은 금세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래, 표정을 봐. 뭣 모르고 하는 소리잖아. 송나루 과거사 뻔히 알면서, 괜히 화내지 말자.
침착하게 목소리를 가라앉힌 규연이 조심스레 말을 이어갔다.
“싫어서 안 하는 게 아니야. 지금 네 상태를 봐, 내가 건드릴 수 있나. 그러니까 일단―.”
“더, 더 안 말해도 돼…!”
진지한 대화가 이어지는가, 싶을 때 나루가 규연의 말을 툭 끊고 일어섰다. 더 듣고 있다가는 진짜 땅굴이라도 파고 들어갈 것 같아서 그만둔 것이다.
글썽이는 눈으로 욕조에서 나온 나루가 규연을 그대로 지나쳐 욕실 문을 닫고 나가 버렸다. 홀로 남은 규연은 욕조에 걸터앉아 깊은 한숨을 내뱉으며 마른세수를 반복할 뿐이었다. 대화가 이런 식으로 끝나다니, 욕실에 이유 모를 냉기가 맴돌았다. 규연은 앞이 캄캄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제발 이러지 마라, 송나루. 나도 괴로워 미치겠어. 함부로 건드리지도 못하게 만들어 놓고 저러면 어쩌자는 거야. 정말…….
달칵!
한참 고민하던 중, 욕실 불이 꺼져 주변이 온통 캄캄해졌다. 곧 욕실 밖으로 탁, 타닥, 하는 발소리가 들렸다. 이런 짓을 할 사람은 나루밖에 없었다.
심각하게 있던 규연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잇새로 피식,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미치겠네, 나를 쥐었다 폈다 마음대로 하는구나.
나루 때문에 심란하면서도, 또 나루가 귀여워 웃는 꼴이라니. 미친 사람 같았지만, 규연은 끝까지 웃음을 참아낼 수 없었다.
* * *
크리스마스는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데, 규연과 나루 사이에는 잔잔한 눈보라가 몰아쳤다. 따스하고, 포근하고, 행복한 크리스마스는 꿈도 꿀 수 없을 듯한 분위기였다.
욕실에서의 소동 이후, 나루는 툭하면 규연의 눈치를 살피곤 했다. 게다가 나루는 며칠 연속으로 악몽을 꾸는 중이었다. 울면서 깨는 나루의 모습을 볼 때마다, 규연의 속은 새카맣게 타들어 갔다.
“나루야, 붕어빵 먹고 갈까. 마침 저기 있는데.”
전보다 의기소침해진 나루를 달래는 건 당연히 규연의 몫이었다. 며칠 내내 나루를 신경 쓰느라 잠을 못 자서 그런가, 눈 밑이 오묘하게 퀭했다.
“봐, 네가 좋아하는 팥 붕어빵.”
“팥붕 말, 고….”
“팥 뭐?”
“팥붕 몰라…?”
오늘 규연은 일부러 차를 먼 곳에 세워 두고 카페까지 걸어가길 택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카페로 가는 길목 한구석에 붕어빵 파는 포장마차가 있었기 때문이다.
평소 나루가 붕어빵에 환장한다는 걸 아는 규연은 다정한 어투로 얼어붙은 마음을 살살 녹여냈다. 그러나 결과는 망함 그 자체. 나루는 대뜸 ‘팥붕’을 모르냐며 고개를 슬그머니 돌려 버렸다. 덕분에 규연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팥붕? 팥붕이 뭔데. 설마, 팥 붕어빵? 송나루 지금 내가 팥붕 못 알아들었다고 눈 피하는 거야? 하, 참.
차마 밖으로 꺼내지 못한 말을 속으로 삼킨 규연이 나루의 옆태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추워서 발그레해진 두 뺨, 입술 바로 아래까지 칭칭 둘러놓은 크림색 털목도리, 발목까지 퉁퉁하게 감싼 흰 롱패딩. 거기에 힘없어 보이는 두 눈. 동글동글한 눈매가 축 늘어져 있으니, 비에 젖은 강아지가 괜히 떠올랐다.
“하―.”
“…….”
“이걸 깨물 수도 없고 진짜.”
규연의 표정이 다시 느슨하게 풀어지며, 잇새로 헛웃음이 비집고 나왔다. 풀 죽어 있는 나루가 안쓰러운데, 그게 또 귀여워서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냥 귀여운 것도 아니고, 어이가 없게 귀엽네.
그새를 못 참은 규연이 나루의 말랑한 볼에 손가락을 콕, 찔러넣었다. 풀 죽은 사람에게 할 짓은 아니었지만, 동그란 얼굴을 보니 참을 수가 없었다.
“유규연, 찌르지 마.”
“이제 기분 풀자, 그땐 너 일부러 서운하게 하려고 그렇게 말한 게 아니야.”
“나도 그런 거 아닌데….”
중얼거리는 소리를 귀신같이 잡아낸 규연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시무룩하게 있던 게 그날 일 때문이 아니라니. 몰랐던 사실에 머릿속이 잠시 하얗게 번졌다.
나루는 규연이 다정하게 굴 때마다 가슴이 콕콕, 쑤시는 걸 느꼈다. 그날 이후, 범현의 악몽까지 꾸던 나루는 혹여라도 규연에게 사랑받지 못할까 봐 걱정을 안고 살았다. 그러다 보니 저절로 기분이 축 가라앉았는데, 규연이 평소보다 더 신경 쓰며 챙겨주니 진심으로 미안해지던 참이었다.
규연이는 항상 나한테 잘해 주려고 하는데, 나만 이래. 안 그러고 싶어도, 불안한 마음이 사라지지를 않아.
심란해진 나루가 은근슬쩍 규연의 시선을 피하며 앞서 걸었다.
포옥.
규연은 걸음을 빨리하려는 나루를 뒤에서 꼭 껴안아 주었다. 길거리에서 이게 무슨 애정 행각인가, 다른 사람들이 보면 놀랄 만했지만, 지금 그게 문제인가. 규연에게는 나루가 우선이었다.
“나루야, 그럼 뭐가 문제야. 괜찮으니까 말해 봐.”
“…섹스를 안 해도,”
“그거 말고.”
섹스를 안 해도, 규연이 너는 나를 계속 사랑할 거야? 물어보려던 말이 뚝, 잘려 나갔다.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놀란 나루가 눈을 휘둥그레 떴으나, 규연은 그 얼굴을 보고도 달래주지 않았다.
“내가 말했잖아, 지금은 할 생각 없다고.”
아무래도 오해가 있었던 모양이다. 규연은 나루가 단순히 호기심으로 섹스하길 원하는 줄로만 알았다. 심지어 이런 이야기를 밖에서 꺼내니, 빠르게 말을 잘라 차단한 것이었다. 생각보다 목소리가 더 냉정하게 튀어 나갔지만, 뒤늦게 해명하는 것도 이상하니 말을 굳이 덧붙이지 않았다. 덕분에 나루의 마음에 스크래치가 제대로 나 버렸다.
이렇게까지 얘기하면 마음이 더 조급해지잖아. 방금은 말투도 차가웠어….
더 얘기할 의지조차 잃은 나루가 금세 꼬리를 내리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딱딱하게 굳은 분위기는 자연스레 풀렸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긴장감이 존재하는 듯했다.
“하아아―.”
나루가 허공에 대고 입김을 내뱉었다. 새하얗게 터져 나온 입김은 바람을 타고 이상한 모양으로 일그러지더니 사라졌다.
마음을 얼추 가라앉힌 나루는 걷다 말고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그러자 규연이 따라 서며 물었다.
“붕어빵 먹고 싶은 거지.”
“…….”
“사 줄게.”
“…슈붕.”
“어, 그래. 슈붕.”
긴장을 뚫고 나눈 대화의 주제는 다름 아닌 붕어빵이었다. 규연은 이제 나루에 대해 모르는 게 없었다. 서운한 와중에 붕어빵 냄새는 나고, 막상 안 먹고 지나가자니 아쉽고. 모든 감정이 나루의 눈동자에 투명하게 비추었다.
저거 봐, 코 움직이고 있네.
나루는 좋은 냄새가 나면 코부터 킁킁거리고 보는 습관이 있다. 티 나지 않게 웃은 규연이 품속에서 지갑을 꺼내 들었다.
슈붕이면, 슈크림 붕어빵이겠지. 그런데 나 지금 뭐 하냐.
나루를 위해 움직이고 있지만, 규연은 이 상황이 그냥 웃겼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누군가를 위해 포장마차에 붕어빵을 사러 갈 일은 절대 없다고 생각했는데. 엄청난 자만이었다.
“슈붕 얼마 안 남았어.”
“알겠어, 금방 사 올게.”
“응.”
방금 막 포장마차에서 나온 사람이 슈크림 붕어빵을 베어 물었다. 나루는 기계 위에 남아 있는 붕어빵을 가만히 세어 보다가, 규연의 등을 소심하게 밀었다. 규연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포장마차로 다가갔다. 나루는 멀어져가는 규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언젠가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맞지, 예전에는 규연이가 저런 곳 진짜 싫어했었어. 저런 데서 사 먹지 말라고 그랬었지.
“…….”
나루의 시선이 한 곳에 집중되었다. 시원스레 뻗은 다리라든가, 넓은 어깨, 규연은 멀리서 봐도 눈에 확 띄었다.
저런 규연이가 나를 제일 먼저 생각해 주는데. 나를 생각해서 싫어하는 붕어빵까지 사다 주는데. 난 왜 자꾸 불안한 거지?
요즘에는 무슨 생각을 해도 결론이 다 같은 곳으로 튀었다.
“아니야, 그만 생각하자.”
고개를 도리도리 젓던 나루가 규연에게서 시선을 떼고 주변을 천천히 둘러봤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주변이 온통 반짝거렸다. 아직 낮인데 가게 앞에 놓인 크리스마스트리가 마구 빛났고, 여기저기서 캐럴이 울려 퍼졌다.
음음음, 음음음, 징글 벨 울려…….
속으로 캐럴을 따라 부르며 눈동자를 돌리던 나루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입술을 꼭 깨물었다. 시선이 향한 곳에는 소소하고 작은 악세사리 샵이 있었다.
‘크리스마스, 연인에게 소소한 행복을 선물하세요!’
투명한 진열대에 따듯한 문구가 쓰여 있었다. 아래에는 조금 투박하지만, 규연에게 잘 어울릴 만한 은색 팔찌가 진열되어 있었다.
크리스마스, 연인에게, 선물…….
나루는 한참 동안 그 은색 팔찌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느라 눈썹이 꿈틀거리는 줄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춥지, 이거 안고 있어.”
“이게 다 뭐야?”
“붕어빵 먹고 싶다고 했잖아.”
마침 돌아온 규연이 나루의 품에 하얀 봉지를 안겨 줬다. 따스한 온도에 자연스레 손을 녹이던 나루는 봉지 안을 확인하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규연이는 붕어를 대체 몇 마리나 잡아 온 거야……?
붕어빵이 흰 봉지가 터질 정도로 가득 담겨 있었다. 멍하니 붕어빵을 바라보던 나루는 저도 모르게 배시시, 웃어 버리고 말았다.
그래, 이런 걸 보면 규연이가 날 미워할 일은 없을 거야. 규연의 애정을 진심으로 깨달은 나루가 조금이나마 마음을 편히 먹었다.
“이제야 웃네, 붕어빵이 그렇게 좋아?”
“붕어빵이 좋은 거 아니야.”
“그럼.”
“규연이 네가 좋은 거야.”
아 맞다, 나 규연이랑 방금까지 분위기 안 좋았었지.
아차, 싶은 나루가 뒤늦게 표정을 갈무리했다. 규연은 드디어 풀려 가는 나루를 보며 한시름 놓았다. 나루는 굳이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품에 든 붕어빵 봉지가 유독 따듯했다.
옅게 쌓인 눈바닥 위로 네 개의 발자국이 나란히 이어졌다. 붕어빵을 입에 넣으며 걷던 나루는 다시금 뒤돌아 진열대를 응시했다.
그래, 크리스마스 선물 줘야지. 내 지갑에 얼마가 있더라…….
고민하는 눈이 아침과 다르게 온순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