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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급하면 비틀리는 법 (3) (103/130)

조급하면 비틀리는 법 (3)

규연은 나루의 볼을 붙잡아 고개를 들어 올렸다. 동시에 두 시선이 정통으로 마주쳤지만, 나루는 마음이 상했다는 걸 티 내며 다른 곳을 응시했다.

“갑자기 그런 질문은 왜 한 거야. 나 좀 봐, 나루야.”

“나는 그냥…….”

“안 들려, 다시 말해 줘.”

“아니야, 나 일하러 갈래.”

말끝을 흐리던 나루가 됐다며 규연에게서 떨어졌다. 방금까지 좋아하냐는 둥 알 수 없는 질문을 던졌으면서, 이제는 또 미련 없이 돌아서는 게 이상했다.

규연은 나루의 팔을 잡아끌어 입을 맞춰 주었다. 부드러운 입술이 맞닿고, 벌려진 틈 사이로 질척한 혀가 섞여들었다. 능숙한 솜씨에 꼼짝없이 서서 입을 벌려 주던 나루는 턱, 막혀오는 숨을 참지 못하고 규연을 살짝 밀쳐냈다.

역시, 난 이렇게만 해 줘도 충분해. 기분 좋고, 아프지도 않고. 키스 한 번에 나루의 불안정하던 표정이 잠잠해졌다.

“서운하게 했으면 미안한데, 지금은 직장이니까. 응?”

“흐, 하아…….”

“내 말, 무슨 뜻인지 이해했지.”

“으, 응.”

허리를 낮춰 나루의 눈높이에 맞춘 규연이 다정한 말투로 타일렀다. 숨을 몰아쉬느라 정신이 혼미해진 나루는 동영상 내용을 까먹은 지 오래였다.

얼굴을 벌겋게 물들인 채 홀까지 달려 나온 나루가 멍하니 서서 마들렌을 포장하다가, 마침 지나가던 건후를 붙잡아 세웠다.

“도건후!”

“엉?”

“오늘 나랑 만나.”

“야, 잠시만, 규연이 형이 들으면 오해해.”

“나랑 만나자.”

“야, 쉿! 알겠으니까 좀, 누가 보면 바람피우는 줄 알겠네!”

연애 중이고, 육체적 관계에 대해 깊이 아는 사람. 나루는 문득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혼자 고민하기보다, 경험자인 건후에게 궁금한 것을 물어보는 게 낫지 않을까. 고민을 위해 만나자고 한 것뿐인데, 건후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입막음을 했다.

규연이 화장실에 있다는 걸 알게 된 건후는 진심으로 안도했다. 나루는 건후의 상태 따위 신경 쓰지 않고, 제 할 말만 밀어붙였다.

“해야 할 얘기가 있어.”

“여기서 하면 안 되는 얘기?”

“응, 중요해.”

“어, 그래. 정말 중요해 보이긴 하다.”

나루의 진지한 모습에 건후가 약속을 받아들였다. 용건이 끝나고 나서는 각자 할 일에 충실히 임했다. 나루는 특히 더 열심히 일했다.

규연이한테 약속 들키지 않으려면 열심히 해야지.

테이블을 박박 문지르며 닦는 손길이 오늘따라 야무졌다.

“저것 봐라. 나 몰래 또 무슨 짓을 벌이려고.”

벽 뒤에 등을 기대고 선 규연이 헛웃음을 쳤다. 나루가 카운터로 돌아와 건후를 붙잡고, 두 사람이 몰래 약속을 잡는 것까지. 전부 빠지지 않고 목격했기 때문이다.

규연은 부러 모르는 척하고 넘겼다. 일찍이 나루를 붙잡아 놓는 것보다, 건후와 둘이서 뭘 하려는 작정인지 직접 볼 생각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루는 퇴근 시간을 하염없이 기다리며 일에 전념했다.

* * *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어서 그런지, 가게에 유독 손님이 많았다. 나루는 베레모가 비뚤어진 것도 모르고 일에 집중했다.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났을까. 퇴근할 때가 다가왔다. 나루는 규연의 눈치를 슬금슬금 살피며 속으로 연습했던 문장을 읊었다.

“규연아, 나 오늘 따로 갈게.”

“왜, 같이 가.”

“아니야, 나 오늘은 일이 있어.”

“무슨 일.”

“그냥, 마감도 돕고, 또, 주문 들어온 거 포장도 조금 남았고…….”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거짓말을 하는 게 수준급이었다. 규연은 나루의 거짓말에 어처구니가 없다가도, 모르는 척 능글맞게 굴었다.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하니 나루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위기를 느낀 나루는 손가락까지 펴 가며 제가 해야 할 ‘가짜’ 일들을 나열했다.

애쓴다, 송나루.

알 수 없는 눈으로 나루를 바라보던 규연은 집에 따로 가는 것을 순순히 허락해 주었다.

“알겠어, 그럼 오늘은 따로 가.”

“응!”

“신나 보인다?”

“아니, 나 슬퍼. 규연이랑 같이 못 가서 되게 슬퍼.”

뭐가 그렇게 신나는지 해맑게 대답한 나루가 잽싸게 표정을 갈무리했다. 그리고는 규연이 붙잡을세라 카운터로 후다닥, 달려가 버렸다.

규연은 별말 없이 집에 갈 준비를 마쳤다. 평소였다면 나루를 붙잡고 어딜 가는 거냐며 집착했을 규연이 웬일로 평온했다.

“나 먼저 갈게. 마무리 잘하고.”

“네, 들어가세요!”

직원들의 인사를 마지막으로 규연이 가게를 빠져나갔다. 나루는 통창으로 규연의 차가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고, 곧장 뛰쳐나와 퇴근 준비를 했다.

서연이 의아한 눈으로 쳐다봤지만, 나루는 급하다는 듯 건후의 팔을 잡아끌기 바빴다.

“빨리, 빨리!”

“아, 기다려. 간다고. 가.”

“안녕히 계세요. 내일 봐요!”

“저도 갈게요.”

성급히 인사한 나루가 서연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뒤따라 나온 건후도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사장님은 혼자 가고, 나루 씨는 건후 씨랑 퇴근하고? 이게 무슨 상황이래. 웃으며 인사를 받아주던 서연이 눈을 게슴츠레 뜨고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

나루는 가게를 나오자마자 건후의 팔을 잡아 최대한 멀리 떨어진 카페로 향했다.

규연이 잘 오지 않을 법한 프랜차이즈 카페. 나루는 계획이라도 한 듯 카페 문을 열고 들어왔다.

퇴근 시간대의 카페는 꽤 북적였다. 사람이 워낙 많아서 사이에 섞여 있으면 티가 잘 나지 않을 듯했다.

주문을 마치고 돌아온 나루는 주변을 빙 둘러보고 자리에 앉았다.

“너 오늘 이상하다. 왜 그래?”

“내가 고민이 있어서.”

“어, 뭐. 말해 봐. 그런데 해결은 못 해 준다?”

“커, 커피 나오면 말할게.”

지잉. 지잉.

마침 진동벨이 울렸다. 나루는 벌떡 일어나 카운터로 달려갔다. 오늘따라 정신이 산만한 게, 어딘가 불안한 강아지를 떠올리게끔 했다.

무신경하게 나루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리던 건후는 누군가를 발견하고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

나루가 앉은 자리의 바로 뒤편에 규연이 떡하니 앉아 있었다. 모자를 눌러 써서 못 알아볼 뻔했으나, 저 분위기와 길게 뻗은 다리는 분명 규연의 것이었다.

송나루는 이걸 왜 못 알아챈 거지?

의아해하던 건후가 규연을 부르기 위해 입을 열었을 때였다.

“맛있겠다. 이거 초콜릿 내가 먹어도 돼?”

“어, 어, 너 다 먹든가….”

“어디 봐?”

“아아악! 야, 송나루, 빨리 고민 말해. 뭔데. 나 바빠. 진심으로 바빠.”

마침 나루가 쟁반을 들고 돌아왔다. 바로 뒤에 제 애인이 있는 줄도 모르고 컵케이크 위에 올라간 초콜릿이나 탐내는 나루가 천진난만해 보였다.

건후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아, 송나루한테 사장님이 듣고 있다는 걸 말하면 나는 죽겠구나.

나루의 어깨 너머로 규연의 살벌한 얼굴이 보일 때마다 건후가 식은땀을 흘렸다.

“응? 내 뒤에 뭐 있어?”

“어어어, 아니야. 아니라고. 고민부터 말해.”

뒤돌아보려는 나루를 겨우 막아낸 건후가 어서 고민을 말하라며 재촉했다. 그러자, 포크를 내려놓은 나루가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를 꺼냈다.

“그, 그런 짓, 을 안 하는 건 사랑하지 않아서야?”

“…뭐?”

“사랑하면 해야 하는 거, 그러니까, 진도 나가는….”

“야, 송나루, 잠시만. 이 손은 놓고 얘기하자.”

내 목숨이 위험해. 네 바로 뒤에서 규연이 형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다고.

차마 내뱉지 못한 말을 억지로 삼킨 건후가 나루의 손을 떨쳐냈다. 간절함에 건후를 붙잡았던 나루는 볼을 긁적이며 떨어졌다. 건후는 지금 고민이고 뭐고,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루가 꽤 심각해 보였으나, 더 심각한 건 제 상황이었다.

“어, 음, 다 때가 있는 거겠지.”

“그게 무슨 대답이야. 나는 심각하단 말이야.”

식은땀을 줄줄 흘리다 못해 눈동자까지 떨어대던 건후가 애매한 대답을 내놓았다. 자기가 뭐라고 말하는지도 모르는 모양새였다. 홀로 심각해진 나루는 입술을 삐죽이며 건후를 들들 볶아댔다.

“하, 하하, 뭐가 그렇게 심각한데.”

“나 규연이랑 섹스해야 할 거 같은데, 그건 또 조금 무섭기도….”

“허어업!”

푸우우웁!

아무렇게나 내뱉은 말에 파격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건후는 그대로 입을 틀어막았다. 뒤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규연도 적잖게 놀랐는지, 마시던 음료를 뿜어 버렸다. 여기서 멀쩡한 사람은 오직 나루뿐이었다.

송나루 저게 밖에서 못 하는 말이 없어……!

당황한 규연이 옷에 묻은 음료를 티슈로 털어내며 나루의 동그란 뒤통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설마, 송나루가 진도 나가는 걸 신경 쓰고 있을 줄이야.

규연의 마음이 순식간에 어지러워졌다. 황당한 것도 없지 않아 있었지만, 막상 애인이 저런 고민을 한다고 생각하니 심란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내가 쟤 강아지로 바뀐 모습을 본 적이 있는데 어떻게 막 건드려. 괜히 양심에 찔리고, 몹쓸 짓 하는 것 같고, 아 모르겠다.

건후는 시무룩해진 나루를 한 번 쳐다보고, 그 뒤에서 심란해하고 있는 규연을 다시 쳐다보았다.

이 커플 정말…….

피곤하다.

“원래 사람마다 다 성향도 다르고, 연애하는 스타일도 다른 거야. 그러니까 진도 나가는 속도에도 차이가 있는 거고.”

깊은 한숨을 내쉬던 건후가 처음으로 진지한 답을 내놓았다. 나루는 그 말을 이해하면서도 서운하게 생각했다.

맞아, 다 다를 수 있는 건데. 그런 건데. 그래도…….

“야, 그리고 무엇보다 네가 준비되어 있어야지. 뭐 아무 때나 하냐.”

“나는 항상 준비됐는데.”

“…아무튼, 이런 걸로 너무 고민하지 마. 그렇게 조급하면 대놓고 유혹을, 아니다, 송나루, 나 바쁘니까 여기까지 하자.”

‘유혹’이라는 단어를 내뱉은 건후는 뜨겁게 느껴지는 시선에 재빨리 말을 바꾸었다. 눈치가 보여서 서둘러 이 자리를 벗어나고픈 마음이었다. 건후는 어리둥절하게 앉아 있는 나루를 홀로 두고 먼저 일어섰다.

“진짜 가?”

“어, 어엉, 가야지. 내일 보자.”

“…잘 가.”

자리에서 벗어난 건후가 규연을 향해 눈인사를 건네고 카페를 나섰다. 나루는 끝까지 규연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고 홀로 생각을 이어갔다.

방금 도건후가 유혹이라고 했어. 내가 유혹이라는 걸 해야 가능한 건가. 원래 그런 식으로 사랑 나눌 땐 옷부터 벗으면 되는 거잖아. 시키는 대로 엎드리고…. 그런데 유혹은 어떻게 하는 건데. 이건 드라마에서도 본 적이 없는데…….

대뜸 핸드폰을 꺼낸 나루가 이것저것 검색하기 시작했다. 규연은 그런 나루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뭐가 저렇게 필사적일까. 미치고 돌아 버리겠네.

보다 못한 규연이 일어나 나루에게 살며시 다가갔다.

똑똑. 테이블 위를 두어 번 두드리니 집중하던 나루가 고개를 휙, 들어 올렸다.

“어, 규연이?”

“집에 안 오고 여기서 뭐 해. 지나가다 들렀어.”

“이런 곳 안 오잖아….”

규연을 발견한 나루가 놀라다가도 경계 태세를 갖췄다. 이럴 때만 야무진 게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규연은 자연스레 나루의 팔을 잡아끌었다.

여기서 더 이상한 생각을 하기 전에 집으로 데리고 가자. 이게 규연의 생각이었다. 나루는 의심을 거두어내지 못한 채 규연에게 끌려 나와야만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 규연이 나루를 떠보았다.

“카페에서 뭐 했어.”

“응? 아무것도 안 했어. 그냥 컵케이크 먹고 싶어서 갔어.”

“아, 그래?”

가면 갈수록 거짓말 실력이 느는 듯한 느낌이었다. 규연은 거짓이라는 걸 알면서 그냥 넘어갔다. 이런 문제로 고민하는 애인에게 거짓말을 했다며 몰아붙이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규연은 문득 나루의 얼굴을 훑어보았다. 새하얀 볼에 동그란 눈, 야무진 듯 앙증맞은 입술까지. 자세히 보니 더 강아지 같았다.

그래, 나도 이런 짓 저런 짓 다 하고 싶다 이거야. 그런데.

“으응? 왜?”

“…아니다.”

저런 순진한 눈으로 날 쳐다보면 아무 짓도 못 하겠다고.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집으로 들어온 규연은 잠깐 쉬겠다며 제 방으로 향했다.

“규연아, 아프면 안 돼.”

“안 아파, 괜찮아. 한 삼십 분만.”

“응. 나도 잠깐 다른 거 해야겠다.”

규연을 방으로 들여보낸 나루는 욕실로 직행했다. 손에 든 핸드폰에는 사전 화면이 떠 있었다.

[유혹]

성적인 목적을 갖고 이성을 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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