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급하면 비틀리는 법 (1)
처음으로 맞이한 한겨울. 통창 너머로 새하얀 눈송이가 흩날렸다. 소리 없이 조용히 쏟아져 내린 첫눈은 온 세상을 하얗게 뒤덮고 있었다.
침대에 퍼져 있던 나루는 눈이 내린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아채고 거실로 호다닥, 달려 나갔다. 한껏 신난 발이 유독 가볍게 움직였다.
거실 통창에 얼굴을 딱 붙이고 선 나루는 한참 동안 하늘을 뚫어지게 구경했다. 드넓은 하늘에서 하얀 눈이 끊임없이 쏟아져 내리는 게 신기한 모양새였다.
“와아, 눈….”
자그마한 감탄사가 잇새로 흘러나왔다. 그러자 통창에 뽀얀 김이 서렸다. 나루는 김이 서리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통창 가까이 얼굴을 붙였다. 눈을 더 가까이 보고 싶어서였다.
눈이다, 눈! 눈 내린다. 와…….
눈을 보고 기분이 좋았던 걸까. 나루의 엉덩이에서 꼬리가 뿅, 하고 튀어나왔다. 수인화가 진행되지 않은 지 꽤 됐는데, 기분이 최고치를 찍는 바람에 꼬리가 멋대로 튀어나왔다.
복슬복슬하고 새하얀 털 뭉치가 360도로 빠르게 회전하며 흔들거렸다. 어느새 함께 튀어나온 두 귀도 마구 쫑긋거렸다.
“송나루, 아침부터 거기서 뭐, 씹, 깜짝이야!”
“응? 규연아, 눈 와.”
잠에서 깬 규연은 옆에 나루가 없다는 걸 깨닫고 곧장 거실로 나온 참이었다. 오늘 역시 평화로운 아침을 맞이할 줄 알았는데, 평화는 무슨.
규연은 빙빙 돌고 있는 꼬리를 발견하자마자 깜짝 놀라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무리 부분 수인화라고 해도, 나루의 강아지 같은 모습은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보다, 저러고 있으면 괜히 내가 쓰레기 새끼가 된 기분이 든단 말이지.
“그 꼬리부터 어떻게 해 봐.”
“어, 꼬리, 뭐지.”
턱짓으로 꼬리를 가리킨 규연이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웃을 듯 웃지 않는 이상한 표정이었다. 나루는 꼬리가 튀어나왔다는 사실을 뒤늦게서야 깨닫고 제 엉덩이를 꾹꾹 눌렀다.
다행히 꼬리와 귀는 금방 사라져 버렸다. 나루는 이제 됐다며 규연을 향해 손을 까딱였다.
“이거 봐, 눈이야!”
“그러네, 이번엔 좀 빨리 내리는 것 같다.”
나루의 곁으로 다가간 규연은 창밖으로 쌓여가고 있는 눈을 가만히 응시했다.
크리스마스 케이크 시즌이네. 바쁘겠는데.
큰 디저트 카페를 운영하는 사장이라 그런 걸까. 규연은 자연스레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떠올렸다. 이맘때쯤이면 크리스마스 케이크 주문으로 일이 바빠지곤 했다.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라…….
규연이 문득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고민하는 눈동자 속으로 동그란 정수리가 비쳤다. 그저 눈이 온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건지, 나루는 고개를 열심히 까딱이며 엉터리 캐럴을 흥얼거렸다.
“음음으, 난난나, …벨 울려~”
“…….”
“우리 썰매 징글징글 산타 울려라~”
“그건 뭔 노래야, 캐럴이 아니라 산타 저주 급인데.”
멜로디만 정확하면 된다는 식인 캐럴이었다. 나루의 엉뚱하고도 섬뜩한 가사에 키득거리던 규연은 작은 머리통을 마구 쓰다듬어 주었다.
“크리스마스에 뭐 할까.”
“아, 클수마쓰? 눈 먹기.”
“…뭐?”
“눈 먹기.”
다정한 말투로 묻던 규연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크리스마스에 대뜸 눈 먹기라니. 탱탱볼처럼 이리저리 튀는 나루의 대답에 정신이 다 혼미해졌다.
장난을 치는 건가. 진지하게 나루의 얼굴을 살핀 규연은 체념해 버리고 말았다. 나루는 진지했다. 그것도 매우. 엄청. 진지했다.
꽉 다문 입술, 그 누구보다 눈을 더 많이 퍼먹겠다는 의지가 담긴 동공. 순수한 광기에 규연은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크리스마스에 눈을 왜 먹어.”
“눈 먹는 날이니까.”
“이건 또 뭔 소리야.”
“눈 먹는 날 아니야?”
나루에게 있어 크리스마스는 ‘눈 먹는 날’이 다였다. 범현의 밑에 있었을 땐 크리스마스를 챙길 틈도 없이 자랐지만, 나루에게는 아주 어릴 적의 소중한 기억이 남아 있었다.
시골에서 자랐을 때의 크리스마스. 나루에게는 정확히 클수마쓰.
시골 어르신들은 모두 크리스마스를 ‘클수마쓰’라고 발음했다. 그래서 나루도 그런 줄로만 알았다.
‘메리 클수마쓰다잉~ 요 강생이들. 꼬리 살랑살랑허네. 가서 눈이나 묵그라, 하하! 강생이들 아주 신이 났구만.’
클수마쓰 인사를 받고 나면, 어르신들이 장난스레 눈을 먹으라며 엉덩이를 토닥여 주었다. 새끼였던 나루는 열심히 엄마의 뒤를 따라다니며 곱고 깨끗한 눈을 주워 먹곤 했다.
시원하고, 입에 닿으면 솜사탕처럼 사르르 녹는 눈. 최고!
추억에 빠져 헤실거리던 나루가 규연의 옷 끄트머리를 잡아당겼다.
“우리 눈 안 먹으면 뭐 해?”
“글쎄, 가게 문 일찍 닫고 맛있는 거 먹으러 갈까.”
“응, 나는 좋아. 고기 먹자.”
“케이크도 주문하고…….”
규연은 머릿속으로 크리스마스 계획을 대충 그렸다.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 천천히 꼼꼼하게 계획해 볼 생각이었다.
이전의 규연이었다면 크리스마스를 맞이해 클럽에 갔겠지만, 이제는 죽고 못 살 애인이 생겼으니 정성을 다해 준비해야 했다.
심지어 나루는 크리스마스를 제대로 보낸 적이 없는 듯했다. 규연은 천진난만한 나루의 모습에 반드시 기억에 남을 크리스마스를 만들어 주겠다고 다짐했다.
“이왕 제대로 할 거라면, 호텔도 예약하는 게 좋겠지. 그래야 기분이 날 테니까….”
규연의 중얼거림을 엿들은 나루는 입꼬리를 빙글 올려 웃었다. 근사한 저녁 식사에 호텔까지, 들뜨지 않을 수가 없었다.
손가락을 펼쳐 날짜를 세어 보던 나루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며 출근 준비를 시작했다. 통통거리며 뛰어가는 뒷모습에 규연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아주 신이 나셨네.
아침 시간은 물 흐르듯 빠르게 흘러갔다. 준비를 마친 나루는 규연과 함께 집을 나섰다.
뒤뚱뒤뚱. 정강이 아래까지 내려오는 롱패딩을 입어서 그런지 나루의 발걸음이 더뎌졌다.
찰칵.
뒤따라 나온 규연은 습관적으로 나루의 사진을 찍었다. 잠시 후, 규연의 배경 화면이 나루가 몰래 핸드폰을 건드리다가 찍힌 사진에서 롱패딩 입은 사진으로 바뀌었다.
얘는 어떻게 하루도 안 지치고 귀엽냐.
홀로 뿌듯해하던 중, 규연은 이상한 느낌에 앞을 바라보고 소리를 내질렀다.
“아오, 야, 송나루!”
“응?”
“그걸 왜 먹고 있어, 배탈 나려고 그러냐, 어? 뱉어.”
“안, 안 먹었어.”
“거짓말하지 말고 뱉어라. 하나, 둘―.”
퉤에! 퉤퉤!
강아지들이 조용하면 사고를 친 것이다, 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규연이 잠깐 다른 짓을 하는 사이, 나루가 바닥에 쪼그려 앉아 벽돌에 쌓인 눈을 퍼먹고 있었다.
식겁한 규연이 마법의 숫자를 세기 시작하자, 나루가 입 안에 잔뜩 욱여넣었던 눈을 퉤 뱉어냈다.
규연은 그 장면을 허망하게 바라보았다.
하아, 쟤를 정말 어쩌면 좋지…….
규연의 표정에 괜히 찔린 나루가 제 입가를 멋쩍게 닦아냈다. 그리고는 ‘나 아무것도 몰라요’ 하는 눈으로 규연을 올려다보았다.
“하, 참.”
오랜만에 마주하는 눈빛에 기가 찬 규연이 헛웃음을 흘렸다. 나루는 태연하게 주차장으로 내려가 규연의 차 앞에 섰다.
“출근해야지, 규연아.”
나 혼낼 생각 말고 운전해, 운전.
속으로 뒷말을 내뱉은 나루가 열리지 않는 문을 달칵거렸다. 규연은 순순히 다가와 조수석 문을 열어주었다.
“와, 세상이 다 하얗다.”
오늘따라 출근길이 시끌시끌했다. 나루는 쉴 새 없이 눈 찬양을 늘어놓으며 창밖을 구경했다.
“예쁘다, 진짜 예뻐…….”
카페 앞에 도착하고 나서는 한참을 서서 간판을 올려다보았다. 코가 빨갛게 물든 것도 모른 채 눈을 만끽하던 나루는 뒤늦게 가게 문을 열었다.
딸랑.
기분 좋은 종소리와 함께 직원들의 인사가 들려왔다.
“나루 씨, 좋은 아침!”
“송나루, 좋은 아침.”
“좋은 아침입니다!”
다들 아침부터 내린 첫눈에 들뜬 건지 목소리가 밝았다. 나루는 익숙하게 인사를 하고, 유니폼을 갈아입었다. 오픈 준비를 마치고 나면, 직원들끼리의 작은 잡담 시간이었다.
규연이 크리스마스 케이크 재료 주문으로 정신없는 사이, 서연이 주접을 떨며 직원들을 불러 모았다.
“대박 소식! 나루 씨, 건후 씨한테 애인 생겼대요. 흐흥.”
“애인? 정말?”
“여기서 저만 솔로네요, 저만. 그나저나 건후 씨, 얘기 좀 해 봐요. 어? 썰 좀 풀어 줘요.”
오늘의 잡담 주제는 바로 ‘건후의 애인’이었다. 크리스마스 전에 애인이라니, 기쁜 소식이다. 나루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건후의 팔을 쿡쿡 찔렀다. 어서 자세한 이야기를 해달라는 재촉의 의미였다. 쑥스러운 듯 목덜미를 긁적이던 건후는 아니라며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서연이 음흉한 눈으로 질문 폭탄을 쏟아부었다.
“아니, 왜요. 자랑해요. 응? 언제부터 만났는데요? 흐흥, 진도는요?”
“만난 지는 한 달 정도, 진도는, 와 진도까지 물어보시는 거예요?”
“어머 어머, 궁금하잖아요.”
서연의 질문에 같이 동조하던 나루가 대뜸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진도. 진도? 무슨 진도?
나루는 진도라는 말이 낯설었다. 간혹 TV 드라마에서 들어 본 적이 있긴 하지만, 현실에서 들으니 느낌이 새로웠다.
답을 망설이던 건후가 서연과 비슷하게 능글거리며 슬쩍, 말을 흘렸다.
“뭐, 한 달이면 금방이죠.”
“세상에, 무슨 일이래. 하긴, 요즘은 한 달, 아니 한 달이 뭐야, 사귀기 전에 키스부터 하는 시대잖아요. 꺄아!”
……사귀기 전에 키스부터 해? 정말?
두 사람은 주접을 떠느라 바빴지만, 나루는 홀로 심각해졌다. ‘진도’의 정확한 뜻이 뭔지 몰랐으나, 눈치껏 유추해 보자면 연인 사이의 스킨십 단계를 말하는 것 같았다. 다들 사귀기도 전에 짙은 스킨십을 하는 걸까. 이유 없이 조급해진 나루가 규연과의 스킨십 사정을 자세히 떠올렸다.
사귀기 전 키스? 하긴 했다. 아파서 약을 먹여 준 거였지만. 어쨌든 했다. 그 뒤로도 입을 맞춘 적? 있다.
그런데 그 이상은…….
없었다.
키스는 해도, 규연은 그 이상으로 나루의 몸을 건드리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범현에게 성 고문 수준의 학대를 받던 나루는 스스로 섹스를 원해 본 적이 없었다. 옷을 벗고 하는 스킨십은 전부 아프다는 인식이 뇌리에 박혀 있던 탓이었다.
규연이는 나를 억지로 벗긴 적이 없고, 아프지 않게 키스만 해 줬어. 나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엉덩이를 때리거나, 이상한 물건을 다리 사이에 넣지도 않아. 그래서 마냥 편안하고 좋았는데….
연인 사이라면 여기서 더 나아가 ‘그런’ 행위까지 해야 하는 걸까.
한참 생각하던 나루가 고개를 돌려 규연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