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지만 강했던 가족 모임이 마무리되었다. 유 회장은 대문 앞까지 마중을 나와, 나루의 손에 직접 키운 상추를 한가득 쥐여 줬다. 규연에게 선을 보라는 둥 고집을 부렸지만, 끝내 두 손 두 발을 들고 만 것이다.
품에 상추를 한가득 껴안고 차에 탄 나루가 발을 동동거렸다. 운전석에 앉은 규연은 시동을 걸며 아까의 상황을 떠올리곤 작게 웃었다. 어이가 없다는 웃음이었다.
“송나루, 너 가면 갈수록 사람 굴리는 스킬이 는다.”
“응? 사람을 굴려?”
“또, 또, 알면서 모르는 척하지.”
나루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순수한 눈망울로 규연을 쳐다보았다. 이것 또한 연기하는 거였으나 워낙 뻔뻔해서 당해낼 수가 없었다. 액셀을 부드럽게 밟던 규연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가만 보면 많이 변했다. 처음에는 개처럼 행동해서 내 속을 그렇게 썩였잖아. 참…….”
귀여웠지. 마지막 말은 희미하게 흐렸다. 규연은 예전 나루의 모습을 떠올리며 진심으로 즐거워했다. 물 떠 오라고 했더니 수돗물을 떠 오지를 않나, 심각한 상황에 붕어빵 먹고 싶다고 하질 않나. 그 당시에는 당황스럽고 어이없었을지 몰라도, 다시 생각하니 그리웠다.
창문 너머로 하늘을 구경하던 나루는 문득 규연의 얼굴을 힐끔 훔쳐보았다. 눈치 하나는 빨라서 지금 규연이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정확히 파악해낼 수 있었다.
규연이가 예전을 그리워하나. 조금 더 느슨하게 살아 볼까…….
나루의 행동이 많이 변하긴 했으나 강아지 특유의 습성을 고쳐 나가는 것은 꽤 힘들었다. 오랜 시간 몸에 배어 있던 행동을 뜯어고치느라 늘 긴장하고 있어야 했는데, 이제는 조금 편해져도 괜찮을 듯했다.
무엇보다 규연이 그 시절을 그리워해 준다니. 기분이 묘하면서도 좋았다. 굳이 변하지 않아도, 본연의 모습 그대로를 사랑해 주는 거 같아서 마음이 순두부마냥 몽글거렸다.
“내려. 그거 내가 들게.”
“내 상추야.”
“…….”
잠깐 생각에 빠졌을 뿐인데 벌써 집 앞까지 도착했다. 주차를 마친 규연은 나루의 품에 들린 쇼핑백을 대신 들어주려 했다. 행동 하나하나에 다정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하지만 나루는 제 상추라며 등을 돌리고는 차에서 내려 버렸다.
지금의 나루라면 고맙다며 쇼핑백을 내밀었을 텐데. 규연은 옆통수를 맞은 듯 황당해했다. 뒤통수까지는 아니고, 정말 딱 옆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오래간만에 당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차에서 내려 야무지게 걸어간 나루가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규연은 나루의 갑작스러운 행동 변화에 의문을 품으며 다가와 섰다.
턱.
곧이어 규연의 큼지막한 손이 나루의 이마에 닿았다. 미적지근한 온기가 손으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나루는 이게 뭐 하는 짓이냐는 눈빛으로 규연을 쏘아보고 있었다.
“괜찮은 거지? 설마, 아직 후유증이….”
“그런 거 아닌데.”
“아니, 아닌 게 아니야. 집 들어가자마자 씻고 푹 자자.”
“아니, 나 정말 괜찮다니까. 아무렇지 않다니까!”
규연이 ‘후유증’이라는 단어를 들먹이며 나루를 진심으로 걱정했다. 2년 전, 최범현을 차원 이동구로 밀어 넣은 뒤로 나루는 후유증을 앓았었다. 한동안 지나치게 예민하게 굴거나, 주변을 경계하거나, 이상 행동을 보이기도 하고, 밤에는 악몽을 꾸는 일이 잦았다.
규연은 나루가 그때처럼 힘들어하는 줄로만 알았다. 눈치가 더럽게도 없었다는 거다. 괜찮다며 손을 휘젓던 나루는 극성을 부리는 규연을 보고 표정을 굳혔다.
“지가 예전 모습 보고 싶어 했으면서…….”
“어? 뭐라고?”
“뭐, 씨이.”
“……뭐?”
“유규연 눈치 더러워. 더럽게 없어.”
고운 목소리로 거친 말을 우다다, 내뱉은 나루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현관문을 쾅 닫고 들어가 버렸다. 어안이 벙벙해진 규연은 닫힌 현관문 앞에 서서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갑자기 애인한테 눈치 없다는 말을 들어서 많이 놀란 모양이었다.
설마, 내가 차에서 한 말 때문에 그런가. 예전 이야기를 해서?
참 일찍도 알아챘다. 규연은 조용히 방금의 일을 되돌려보다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안 듣는 척 가만히 있더니, 자신을 위해 예전처럼 행동해 주는 나루가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덜컥.
“송나루. 나루야-.”
현관문을 연 규연이 능글맞은 목소리로 나루의 이름을 불렀다. 거실에 없는 걸 확인하고 방 앞으로 다가간 규연은 그만 유쾌한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큽, 푸흡, 야, 송나루, 문 열어. 응?”
“나, 나 이제 네 앞에서는 계속 편하게 할 거야.”
문을 두어 번 두드리자, 안에서 자그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규연은 나루가 뭐라고 말하는지 똑똑히 들었음에도 못 들은 척 되물었다.
“안 들려, 얼굴 보고 얘기하자.”
“나 이제 너한테는 예전처럼 한다고!”
“예전처럼 하는 게 뭔데.”
“강아지.”
신경질 섞인 목소리가 앙칼진 게 귀여웠다. 규연은 일부러 나루의 속을 살살 긁었다. 건드리면 반응하는 게 얼마나 재미있던지. 도저히 그만둘 수가 없었다.
여기서 진지한 건 나루뿐이었다. 문에 기대어 앉아 있는 걸까. 나루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문에서 스윽, 하고 작은 소음이 들렸다.
“강아지? 그렇게 말하면 모르겠는데.”
“강아지…….”
“……?”
“강아지 송나루, 나 강아지 수인이니까, 강아지 송나루 할래.”
규연이 앞에서만.
덧붙여지는 마지막 말에 규연의 마음이 사르르 녹았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규연은 웃음을 참으며 마른 세수를 반복했다.
와, 저걸 어떡하지. 송나루 저 말투, X발.
제 입으로 강아지 송나루라니……. 좆같은 3인칭을 써도 왜 귀여운 걸까.
“그래, 내 앞에서만 강아지 송나루 해.”
애써 마음을 다스린 규연이 다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잠겼던 문이 스르륵 열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규연의 입꼬리가 귀에 걸릴 듯 올라갔다. 말 한마디 하지 않았는데, 고작 행동 하나로 사람을 이렇게 웃게 만들다니 대단했다.
벌어진 문틈 사이로 나루의 말간 얼굴이 드러났다. 순한 눈매가 오늘따라 더 강아지 같아 보였다. 규연은 황급히 나루를 끌어내 품에 껴안았다.
…킁킁.
내키지 않은 듯 안겨 있던 나루가 규연의 체취를 맡더니 코를 적극적으로 킁킁거렸다. 제 딴에 티 내지 않는다고 조심스레 냄새를 맡는 거 같은데, 주변이 조용해서 숨소리가 크게 들렸다.
결국, 규연이 나루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쓰러졌다. 당황한 나루는 어색하게 등을 토닥이며 물었다.
“…왜 그래?”
“아, 아니야.”
유규연 이상해.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토닥여 주는 손짓이 멈추지 않았다.
정작 규연은 입술을 꽉 깨문 채, 소리 없이 웃는 중이었다. 누구 때문에 웃는 건지도 모르고, 순진한 표정으로 등이나 토닥이고 있는 제 애인이 귀여워 미칠 것 같았다.
질린다. 송나루 진심으로 질린다. 아, 이제 진짜 귀엽다고 말하기 질려.
* * *
꾹. 꾸욱. 꾹.
아침부터 몸 여기저기가 무거웠다. 규연은 졸린 눈을 억지로 떠 가며 기상했다. 가위 눌리는 꿈을 꿔서 기분이 언짢았는데, 눈 떠 보니 나루가 몸 위에 올라타 있었다.
“뭐 해.”
“배고파. 밥 주라, 규연아.”
“…….”
“밥!”
황당했다. 아침 인사도 없이 냅다 밥을 주라니. 이건, 예전보다 더 업그레이드된 골때림인데. 규연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무어라 대답하려던 그는 일단 맞춰 주기로 하고, 부엌으로 향했다.
조르르, 뒤따라 나온 나루는 자연스레 거실 소파에 앉아 TV를 켰다. 이 시간에 나오는 거라고는 아침 드라마가 다였다. 온갖 막장 요소가 섞여 있는 드라마들이었지만, 나루는 좋다며 챙겨 보곤 했다.
<연애만 하면 다인 줄 알아? 왜 나한테 프러포즈 안 하는데?>
<그건 조금 더 신중하게…….>
<연인 사이는 깨지면 끝이잖아. 너 설마 나랑 끝내려고 그러니?>
오늘 스토리는 더 막장이었다. 규연은 얼핏 들리는 TV 소리에 고개를 저으며 아침 준비를 이어갔다. 거실 소파를 힐끔 바라보니, 나루가 TV에 빨려 들어갈 것처럼 집중하고 있는 게 보였다.
저런 막장 드라마가 저렇게 좋을까. 재미있게도 보네.
접시를 꺼내 잘 구워진 토스트를 옮겨 담은 규연이 식기를 세팅하기 시작했다.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TV를 끈 나루가 달려와 준비를 도왔다.
아침 메뉴는 토스트와 과일 주스, 그리고 가벼운 샐러드였다. 자세히 보니 어제 나루가 받아 온 상추가 샐러드에 섞여 있었다.
“맛있겠다.”
“얼른 먹어. 배고프시다며?”
“응, 배고프셨어.”
규연의 장난스러운 말에 똑같이 대답해 준 나루가 포크를 들었다. 그렇게 평소와 같은 아침 식사가 시작됐다.
말없이 포크를 움직이며 음식을 씹어 삼키던 나루는 접시 하나를 다 비워내고 나서야 규연을 마주 봤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눈빛이 미묘하게 물들어 있었다. 규연은 뒤늦게 나루의 시선을 알아챘다.
무슨 말을 내뱉을지 모르는 저 표정. 불안하다.
규연은 조용히 포크를 내려놓고 주스를 원샷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나루의 시선이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완전히 통하자, 나루가 그제야 입을 열었다.
“규연아.”
“어, 왜.”
“너랑 나는 애인 사이지? 연인.”
“응, 그렇지.”
대체 뭔 말을 하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는 걸까. 규연은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해 주며 포크를 다시 집어 들었다. 어색해 보이지 않으려고 일부러 포크 끝으로 방울토마토 끝을 툭, 툭, 건드리고 있는데 폭탄 발언이 날아들었다.
“나한테 프러포즈해.”
쨍그랑-!
규연은 너무 당황한 나머지 손에 들고 있던 포크를 놓쳐 버리고 말았다. 포크가 접시 위로 떨어지며 귀가 찢어질 듯한 소음이 들려오고, 정적이 맴돌았다. 숨 막히는 정적이었다. 규연은 식은땀을 흘리며 나루를 바라봤다.
맑은 눈동자 안에 광기가 서려 있었다. 이것 또한 오랜만에 보는 눈이었다.
“유규연 당황했어. 너 당황했지.”
“당황하긴, 누가 당황해.”
“그럼 프러포즈해. 애인 사이는 언젠간 깨진대.”
“누가 그래.”
“알 거 어, 없잖아. 너는 그냥 프러포즈만 해.”
또 막장 드라마에서 배운 건가. 반박하려던 규연이 입을 다물었다. 프러포즈? 주변의 시선과 여러 문제로 인해 공식적으로 결혼을 하는 건 어렵겠지만, 언젠간 나루와 평생을 약속하고 싶다는 생각을 늘 품고 있긴 했다.
적절한 때가 오면 둘만의 장소에서 단란하게 반지를 나눠 끼고 싶었는데, 나루의 기습 요청으로 인해 상황이 곤란해졌다.
“프러포즈는 나중,”
“지금 해.”
“…….”
“지금. 응?”
쪽, 하는 소리와 함께 두 입술이 맞붙었다 떨어졌다. 나루가 애교를 부리기 시작한 거다.
애인 사이는 언젠간 깨진다, 같은 소리나 늘어놓는 걸 보면 뭘 불안해하고 있는 건지 충분히 알겠는데……. 규연은 이런 식으로 평생을 약속하고 싶지 않았다.
규연은 더 가까이 다가오는 나루를 막아 세웠다. 어느새 장난기가 쏙 빠진 얼굴을 한 그는 나루의 두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나긋하게 말했다.
“애인 사이라고 해서 무조건 끝이 있는 건 아니야.”
“…….”
“단순히 네가 불안해서 프러포즈 받길 원하는 거면, 안 해.”
“우리 안 깨져?”
나루의 물음에 규연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아까부터 깨진다느니 마느니 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규연은 나루의 이마에 아프지 않게 꿀밤을 먹이며 대꾸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할래? 우리가 왜 깨져.”
“…….”
“프러포즈는 평생을 약속하려는 거잖아. 나중에, 준비되면 할게. 네 손에 반지라도 끼워야 할 거 아니야. 다이아 반지. 드라마에서 못 봤냐.”
틱틱거리는 말투를 사용하면서도 내용은 또 나름 스윗했다. 나루는 규연의 진지한 대답을 조용히 듣고 있기만 했다. 규연의 말처럼 드라마에서 반지를 주고받는 걸 본 거 같기도 한데, 실제로도 반지를 나눠 끼는 줄은 몰랐다.
“반지?”
“원래 프러포즈하면서 반지 주는 거야.”
그제야 나루의 표정이 환하게 풀렸다. 잠시나마 깨지는 게 아닐까, 하고 불안감을 가졌던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졌다. 이야기가 자연스레 마무리되자, 규연이 일어서서 다 먹은 접시를 하나둘씩 치워냈다.
얼떨떨하게 부엌을 나온 나루는 혼자 방으로 들어가 무언가를 열심히 꼼지락거리며 만들었다. 짧은 시간 사이 얼마나 열중했는지, 땀이 다 날 정도였다.
설거지를 마친 후, 나루를 찾아다니던 규연이 방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동그란 뒤통수를 내놓고 꼼질거리는 게 귀여워서 잠시 구경하던 그는 나루의 등을 콕콕, 찔렀다.
“내가 당장 프러포즈 안 해 줘서 삐쳤어?”
“…….”
혹시나, 싶어 물어본 규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루가 아무런 대답도 없이 고개를 저었기 때문이다.
잠깐 동안 정적이 흘렀다. 나루는 규연의 손을 제 앞으로 이끌어 놓았다. 그리고는 손바닥 안에 쥔 것을 규연의 약지에 조심스레 끼워 넣었다.
웬 꽃반지였다. 노란색 꽃이 달린 하찮고도 귀여운 꽃반지.
여린 풀잎이 손가락에 닿아 간질거렸다. 덩달아 규연의 마음도 함께 울렁였다.
나루의 어깨 너머로 엉망이 된 꽃 화분이 보였다. 예쁜 꽃을 고르고 고르느라 힘들었는지, 풀들이 마구 뒤엉켜 있었다. 규연이 방에 장식해 둘 정도로 아끼던 화분이었지만, 조금의 화도 나지 않았다. 오히려 흩어진 흙과 풀이 나루의 애정을 보여주는 것 같아 기뻤다.
감정이 북받쳐 오른다. 규연은 감동한 눈으로 나루를 지긋이 바라봤다. 그러자 나루가 말을 이었다.
“반지. 나는 준비됐어.”
“…….”
“규연이 너랑 평생 같이 있을래. 너랑은 그러고 싶어. 넌 내 주인이 아니라, 소중한 애인이잖아.”
주인이 아닌, 소중한 애인.
규연은 나루에게 있어 처음이자 마지막인 존재였다. 어둠 속에만 살던 나루를 빛으로 이끌었고, 편견 없이 대하며 진정한 사랑을 일깨워 줬다.
“하여간 방심할 틈도 안 주지…….”
“응?”
“그래, 평생 같이 있자. 내 옆에서 떨어지기만 해, 송나루.”
멍하게 중얼거리던 규연이 나루의 뺨을 다정히 쓰다듬었다. 울컥한 듯한 눈동자에 차마 표현할 수 없을 만큼의 애정이 담겨 있었다.
나루는 그대로 규연의 품에 달려들어 안겼다. 두 팔을 뻗으며 다가오는 해맑은 얼굴이 오늘따라 더 화사해 보였다.
규연이는 천사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나한테는 쭉 천사 같은 사람이야.
우연히 넘어오게 된 이 세상은 정말 천국이 아닐까?
굴림수는 천국에 가나요?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