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화 (99/130)


거대한 저택의 대문이 활짝 열렸다. 규연의 본가는 언제 봐도 넓고 웅장했다. 인터폰으로 막내아들의 얼굴을 확인한 유 회장은 관심 없는 척하며 대문 앞까지 친히 마중을 나왔다.

철컹.

“규연이 왔, 아니 이쪽은 왜 또 같이…….”

“생신 축하드려요. 이거 꽃이에요.”

“저번부터 안 와도 된다고 신신당부를 했건만…….”

유 회장을 반기는 건 나루와 큼지막한 꽃다발이었다. 일부러 뒤로 빠져 있던 규연은 실시간으로 변하는 아버지의 표정을 흥미롭게 바라보며 다가왔다. 오지 말라고 할 땐 언제고, 나루가 꽃다발을 건네니 내심 기쁜 얼굴로 받아드는 게 웃겼다.

유 회장은 규연을 밉지 않다는 눈으로 쏘아봐 주고, 두 사람과 함께 발맞춰 집 안까지 들어왔다. 나루는 오늘도 성공했다는 듯 이를 환하게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그나저나 집 안 분위기가 유독 밝았다. 규연의 어머니는 이제 막 들어오는 규연과 나루를 반갑게 맞이했다. 한 손에 꽃병이 들려 있는 걸로 봐서는 식탁을 장식하고 있었나 보다.

“어서 와, 우리 아들. 잘 왔어요, 나루 씨.”

“안녕하세요. 저, 제가 도와드릴게요.”

“어머, 괜찮아요. 손님한테 일을 시킬 순 없어요. 가서 편히 앉아 있어요.”

나루가 눈치 있게 나서서 그녀를 도우려 했지만, 몇 번이고 괜찮다며 말리는 바람에 멀뚱히 거실 소파에 앉게 됐다.

유 회장은 나루가 건넨 꽃다발을 거실 장식장 위에 살포시 올려둔 후, 베란다 문을 느릿하게 열었다. 통창으로 된 문을 여니 정원의 앞마당과 연결된 곳이 나타났는데, 앙증맞은 울타리 너머로 작은 텃밭이 보였다. 유 회장이 취미로 가꾸는 텃밭이었다.

“크흠, 이번에 상추가 실하게 컸단 말이지.”

“상추?”

이 추운 겨울에도 뭐가 자라나는 건가. 호기심에 못 이겨 고개를 기웃거리던 나루가 투명한 미니 비닐하우스를 발견했다. 유 회장은 은근슬쩍 제 텃밭을 자랑하며 잘 자란 상추들을 손으로 뜯어냈다.

상추. 상추는 나루가 좋아하는 채소 중 하나였다. 아주 어린 시절, 시골에서 자랐을 때는 간식으로 상추나 고구마를 먹곤 했다. 주인 할머니 몰래 뜯어먹는 맛이 있었는데, 갑자기 그 시절 그 맛이 그리워졌다.

어느새 유 회장의 옆까지 다가간 나루가 슬금슬금 발걸음을 옮기며 상추에 집중했다. 규연은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나루의 행동을 가만히 쳐다볼 뿐이었다. 상추 서리를 하려고 요망하게 움직이는 뒤태가 귀여워서 계속 두고 볼 작정이었다.

스윽. 토독.

유 회장 몰래 손을 뻗어 상추 끝을 살짝 꼬집어 뜯은 나루가 잽싸게 그것을 입에 넣고 씹었다. 씁쓸한 맛은 덜하고 싱싱한 게 무척 맛있었다.

“깜짝이야.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요? 저리 가라니, 참.”

“저 상추 좋아해요. 저도 뜯어도 돼요?”

“큼, 이게 내가 농약 없이 키운 상추인데. 어디서도 못 먹어본 맛일 거요.”

“와아, 어디서도 못 먹어본 맛!”

유 회장의 비위를 살살 맞춰 주며 쪼그려 앉은 나루가 본격적으로 상추를 뜯기 시작했다. 규연은 그 모습이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본가에 있는 게 불편할 만도 한데, 나루는 원래 있던 식구처럼 스며들어 예쁨을 받고 있었다.

정작 이 집 식구들은 유 회장의 텃밭에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자랑해도 늘 반응이 미적지근했는데, 나루가 처음으로 유 회장의 소중한 취미에 동참해 준 것이다.

“봐, 이파리가 벌써 싱싱하잖아. 이게 내가 다 좋은 흙을 쓰고…….”

“와아, 좋은 흙!”

짝짝짝짝.

나루의 힘찬 박수 소리가 거실 안까지 울렸다. 얼떨결에 박수까지 받게 된 유 회장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근엄한 척을 했다.

“큼, 내가 이런 아부 떤다고 뭐 좋게 봐주거나, 그러는 건 아니니까요. 거, 애쓰지 않아도 됩니다.”

“이거 아부 아니에요. 저 정말 상추 좋아해서 그래요.”

“허, 참…….”

더 휘말리기 전에 거실로 들어온 유 회장은 곧장 부엌으로 향했다. 상추를 씻는 척하며 나루를 피할 셈이었다. 방심하면 해맑음에 넘어가려 하고, 또 방심하면 입꼬리가 주책맞게 올라가서 이렇게라도 이성을 붙잡아야 했다.

와, 진짜 규연이랑 성격 똑같으시다.

속으로 혼잣말을 하던 나루가 흙 묻은 손을 털어내며 규연의 옆에 앉았다. 동글동글한 눈에 자신감이 가득 차 있었다.

“이제 나 좋아하시는 거 같아.”

“이미 예전부터 좋아했어.”

드디어 인정받는 건가. 무려 2년이라는 시간 동안 애쓴 보람이 있었다.

“준비됐으니 다들 모여요.”

나루가 뿌듯해하고 있는 사이, 규연의 어머니가 모두를 식탁 앞으로 불렀다. 막 일을 끝내고 들어오던 규성은 식탁으로 조르르, 걸어 들어가는 나루를 흐뭇하게 바라봤다.

“오랜만이네.”

“어, 안녕하세요…!”

“맛있는 거 많이 먹고 가, 나루.”

“형, 이제 나는 안 보여?”

“그래, 너도.”

규성의 말투가 전보다 더 다정해졌다. 나루는 상냥한 인사에 화답하듯 웃어 주었다. 반면, 규연은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제 친형인 규성을 쳐다보는 중이었다. 어째 가면 갈수록 나루를 대하는 태도가 부드러워져서 경계하는 거였다.

세 사람은 자잘한 대화를 나누며 정원으로 나갔다. 야외에 설치된 식탁에는 온갖 음식들이 다 올라가 있었다. 다양한 종류의 고기부터 회, 초밥, 심지어는 아까 뜯은 상추까지 없는 게 없었다.

사람이 많이 모이지 않았지만, 나루가 참석하니 느낌이 달랐다. 둘째인 규민이 외국에 나가 있어서 조촐해 보일 뻔했는데, 그 자리를 나루가 확실히 메꿔 줘서 다행이었다.

“아빠, 생신 축하드려요.”

“생신 축하드려요, 아버지.”

두 아들의 축하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식사가 이어졌다. 회장이라 성대한 파티라도 열 줄 알았는데, 오히려 담백했다. 뭐랄까, 진짜 가족 같았다.

식사 분위기는 좋게 흘러갔다. 나루는 대부분 듣는 쪽이었다. 규연의 어머니가 대화 주제를 던지면 규성이 이어받았고, 규연과 유 회장은 대답하는 게 전부였다.

“그나저나, 두 사람 정말 오래 갔네? 나는 우리 규연이가 이렇게 진지한 거 처음 보지 뭐니.”

“뒤늦게 정신 차린 거죠, 뭐. 나루가 고생 꽤 했을 거예요.”

그러던 중, 갑자기 규연과 나루의 이야기가 나왔다. 규연의 어머니는 아들이 이렇게 진지하게 연애하는 걸 처음 본다며 놀라워했다. 그 말에 대답한 건 규연이 아닌 규성이었다. 철저히 나루를 감싸며 대답하는 게 얄미울 정도였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확실히 초반에는 오해 때문에 나루가 고생을 꽤 했으니 말이다. 규연은 사실 나루의 성깔이 장난 아니라는 말을 장난으로 덧붙이려다 말았다. 유 회장의 앞에서는 장난으로라도 이런 말을 하지 않기로 다짐했기 때문이다.

“분위기 좋은데 왜 그런 소리를 하고 그래요. 큼!”

“당신도 참, 나루 씨 귀엽고 좋잖아요.”

한참 분위기가 좋은데 유 회장이 나서서 물을 흐렸다. 순간 규연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규연은 심술을 부리는 아버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몰래 한숨을 쉬었다.

누군가가 허공에 찬물이라도 끼얹은 것 같았다. 나루는 눈썹을 축 늘어뜨린 채 유 회장의 눈치를 살폈다. 묵묵히 숟가락만 움직이고 있는 게, 무언가 속이 답답해 보이기도 했다.

“규연이 너, 선 내보낼 거니까 준비해 놔라.”

“…뭐?”

기어코 폭탄이 터졌다. 어쩐지 평온하다 싶었다. 유 회장은 좋은 선 자리를 알아뒀다며 규연을 압박했다. 굳이 나루가 있는 자리에서 이런 얘기를 꺼내다니. 식탁에 앉아 있는 식구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어두워졌다.

선? 선이 뭐지.

그 사이에서 나루 홀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선이 뭐길래 다들 표정이 죽은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게다가 규연은 당장이라도 식탁을 벗어날 것처럼 손을 떨고 있었다.

“내가 선을 왜 봐.”

“아 글쎄 보라면 봐. 아주 곱게 생겨서, 똑똑하기까지 한,”

“하아…….”

규연이 대놓고 한숨을 터뜨렸다. 차마 아버지 생신날에 깽판을 칠 수도 없고, 생각이 많아 보였다. 무엇보다 옆에 앉아 있는 나루에게 제일 미안했다. 기껏 여기까지 왔는데, 이런 소리나 듣게 해서 얼굴 볼 면목이 없었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나루는 뒤늦게서야 상황 파악을 마쳤다. 선이라고 하는 건 대충 소개팅 같은 것과 비슷한 모양이었다. 대화의 흐름을 이해하고 나니 가슴께가 울렁거렸다.

이제 인정받았다고 생각했는데, 그랬는데…….

울음이 나올 거 같은데, 막상 불쌍한 척 눈물을 짜려고 하니 쏙 들어갔다. 나루는 다시 감정을 잡기 위해 눈을 부릅뜨고 집중했다. 그 사이, 규성이 나서서 유 회장을 말려 주었다.

“아버지, 그런 이야기를 왜 이런 자리에서 하세요. 애들 뻔히 있는데 대놓고 말씀하시는 건 너무하잖아요.”

“그럼, 이런 중요한 얘기를 언제 하겠냐. 넌 가만히 있어라.”

한 번 시작된 고집은 쉬이 끝나지 않았다. 유 회장은 단호한 태도를 유지하며 제 뜻을 밀어붙였다. 화목한 식사 분위기는 엉망이 되고 말았다.

규연은 참다못해 숟가락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고 일어서려 했다. 나루가 아버지에게 더한 소리를 듣기 전에 집을 나서려 한 것이다. 하지만 규연의 행동은 온전히 이어지지 못했다.

“크, 흐읍, 으응, 읍……!”

식탁 위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눈물이 터져 나오는 걸 억지로 막아내려는 게 유독 서럽게 느껴졌다. 울음소리의 주인은 나루였다.

나루는 울면서도 밥을 한가득 떠먹었다. 한 번 울고, 밥을 넣어 씹고, 또 한 번 울고, 반찬을 먹고. 서럽게 우느라 가슴이 헐떡이는데도 입이 멈추지 않았다. 흐압, 하, 하고 거칠게 숨을 쉬면서 입에 든 내용물을 꼭꼭 씹어 삼키는 게 이상하게 짠하면서도 귀여웠다.

“흐끅, 으, 하웁…….”

저 작은 나루를 어쩌면 좋지.

나름 울음을 참겠다고 밥을 막 욱여넣는 거 같은데, 볼이 빵빵해져서 귀여움이 배가 됐다. 어디 귀엽기만 할까. 이 모습이 묘하게 더 안쓰러워 보여서 가족들의 표정이 울상에 가까워졌다.

다들 나루의 서러운 울음에 당황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딱 한 사람, 규연만은 재빨리 평온을 되찾았다. 놀라서 나루를 쳐다보던 규연은 표정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속으로 생각했다.

이거 우는 척이다. 송나루 지금 우는 척하고 있어. 미친.

거짓 울음을 많이 당해 본 규연은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지금 이 울음은 무조건 거짓 울음이었다. 지나칠 정도로 들썩이는 어깨, 서러운 울음소리와 달리 아주 천천히 떨어지는 눈물. 우는 ‘척’을 하는 건 나루의 주특기 중 하나였다.

아니나 다를까, 규연의 예상처럼 나루는 우는 척을 하는 게 맞았다. 유 회장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늘어놓아서 일부러 동정심을 자극하는 거였다.

“흐, 흐끅, 으읍, 으…….”

연기에 박차를 가하는구나. 대단해, 우리 나루…….

규연은 황급히 고개를 돌려 버렸다. 더 구경하고 있다가는 웃음이 터질 것 같아서였다. 이런 규연과 다르게 가족들은 매우 심각해진 상태였다.

특히, 유 회장은 나루의 우는 모습에 어쩔 줄 몰라 하며 말까지 더듬거렸다. 사실, 당황한 걸 떠나 나루의 자연스러운 애교에 넘어간 것이었다.

이런 애교는 처음이라 생소했다. 규연이 사랑받는 막내이긴 했지만, 어렸을 때도 이런 행동을 해 본 적이 없었다. 필요할 때만 애교를 떨었지, 나루처럼 자연스러운 애교는 없었다는 거다. 덕분에 유 회장의 마음이 눈처럼 사르르 녹아내려 버렸다.

“저, 그, 그러니까 그렇게 울지 말고. 내가 울리려고 그런 건 아닌데.”

“허, 허으읍, 흐, 히끅.”

“아니, 내가 너무 심했어요. 그래, 취소하면 되잖아. 취소하면.”

결국, 유 회장이 얼떨결에 내뱉은 말을 모두 취소했다. 단호함이 5분도 가지 못하는 게 규연과 유사했다. 이런 걸 부전자전이라고 하는 걸까.

붕어빵이야, 규연이랑 규연이네 아버지. 똑 닮았어. 역시!

규성이 건네준 손수건으로 눈가를 닦아낸 나루가 일부러 더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물었다.

“저 계속 여기 와도 돼요……?”

“…….”

“크흥, 읍.”

“그래요, 와요. 와.”

드디어 정식적인 허락이 떨어졌다. 반쯤 협박당한 거나 마찬가지였지만, 아무튼.

나루는 언제 그랬냐는 듯 눈물을 그치고, 뿌듯한 얼굴로 규연을 쳐다보았다. 울어서 빨갛게 된 코와 달리 얼굴은 눈에 띄게 밝았다.

‘이제 정말 편하게 연애할 수 있다!’라고 말하는 게 표정에 모두 드러났다. 규연은 여전히 요망한 제 강아지 같은 애인을 바라보며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송나루 존나 약았다니까, 하여튼.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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