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8화 (98/130)


찬바람이 두 볼을 매섭게 치고 지나갔다. 벌써 두 번째 맞이하는 겨울이었다. 흰색 털목도리를 입술 위까지 둘둘 휘감은 나루는 힘차게 가게 문을 열었다. 연하늘색 롱패딩을 껴입고 뒤뚱뒤뚱 걸어오는 모습이 근처 학교의 신입생 같기도 했다.

“안녕하세요!”

“하이, 송나루. 너 그거 또 입고 왔냐.”

“이거 규연이가 사 준 거야.”

들어오자마자 손을 흔들던 나루가 장난을 치는 건후에게 새침한 척 대꾸했다. 자연스레 말을 받아친 후에는 익숙하게 오픈 준비를 마쳤다. 조금의 실수도 없이 일을 척척 해내는 게 베테랑 직원다웠다.

규연에게서 선물 받은 패딩을 스태프 룸에 고이 모셔둔 나루는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명찰을 달았다.

매니저 송나루.

오전에서 오후 타임에만 일하던 아르바이트생 나루는 어느덧 의젓한 매니저가 되어 있었다. 작년 가을 즈음 퇴사하고 작은 마카롱 전문점을 연 서연의 자리를 채운 나루는 맡은 일을 톡톡히 해냈다.

“오픈할게요!”

오전에 오픈을 하고 나면 손님들이 금세 몰려들었다. 나루가 매니저로 완전히 자리하고 난 후로부터 학생 손님들이 급격히 늘어난 탓이었다. 게다가 지금은 겨울방학 기간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오전부터 슬금슬금 손님들이 몰려들더니 열두 시가 넘자 홀이 바글바글해졌다. 나루는 이 시간에 제일 바빴다. 어째서냐고?

“헐 오빠, 저희 이제 며칠 뒤에 개학이에요. 제 크림치즈빵 남겨 주셔야 해요!”

“제가 꼭 몰래 하나씩 빼놓을게요. 대신 매일 먹으러 와야 해요. 약속.”

“와 진짜 매일 봐도 매일 귀여워. 약속할게요! 약속!”

“그리고 이건 오늘 서비스예요. 쉿.”

말을 거는 손님들이 많아서였다. 특히, 이 학생 무리는 카페 데스티니의 단골이라 나루와 무척이나 친했다. 카페에 빵을 사러 오는 건지, 나루 덕질을 하러 오는 건지 모를 귀여운 손님들이었다.

나루는 서비스라며 쿠키를 하나 얹어 주고, 입술 위에 검지를 올려놓았다. 하는 행동을 보아하니 한두 번 서비스를 준 게 아닌 모양이었다. 학생들은 카운터 앞에 우직하게 서서 나루와 잡담을 나누기 바빴다. 서비스까지 받아 신이 나 방방 뛰기까지 했다.

“오빠 완전 강아지상이다! 짱 귀엽게 생기셨는데 왜 아이돌 안 해요?”

“내 직원이니까요. 저번부터 자꾸 내 직원 이상한 길로 꼬드기네.”

“어, 까칠이 사장님.”

주접떨어 주던 서연이 사라지니 이제 이 무리가 극성이었다. 어느새 나타난 규연은 나루의 옆을 지키고 선 채 학생들을 익숙하게 상대했다. 툭툭 내뱉는 말투와 달리 손은 쿠키 하나를 더 얹어 주고 있었다.

츤데레 같은 규연의 행동에 꺄악, 돌고래 소리를 내던 학생들이 오늘도 비슷한 질문을 던졌다.

“사장님이랑 강아지 오빠, 둘이 무슨 사이에요?”

“무슨 사이면 뭐. 사생활은 못 알려줘요, 손님.”

“흐흥.”

마지막 웃음소리의 주인은 나루였다. 의미심장한 미소에 학생들의 주접이 더 심해졌다. 규연은 대충 손을 휘저으며 이제 그만 가라는 제스처를 취하고, 나루의 뒷덜미를 잡아끌었다.

“또 저러네. 아오, 또 나만 솔로지.”

뒤에서 접시를 닦던 건후가 수세미를 벅벅 문질러대며 중얼거렸다. 볼 때마다 솔로인 건후의 속을 뒤집어엎는 건, 나루가 아닌 규연이었다. 아닌 척하면서 사귀는 티는 다 내고 다니고. 팔불출이 따로 없었다. 건후는 뒷문으로 빠져나가는 두 기만자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덜컹.

카페 뒷문을 열고 나오면 작은 공터가 나타난다. 이곳은 나루와 규연이 자주 애용하는 장소였다. 카페 안에 있어도 사귀는 티가 줄줄 흐르는데, 이곳에서는 더했다.

규연은 문이 닫히자마자 나루의 몸을 끌어당겨 제 품에 안았다. 강하게 당기는 힘에 힘없이 이끌려가 준 나루는 넓은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채 코를 킁킁거렸다.

킁킁. 규연이 냄새, 가 아니라. 이러면 안 되지.

습관적으로 냄새를 맡던 나루가 행동을 자제했다. 지난 시간 동안 남아있던 강아지 습성을 거의 고친 상태였지만, 가끔 이렇게 방심하면 본능적으로 툭 튀어나오곤 했다.

차원 이동구가 완전히 닫힌 후, 불안정하게 진행되던 나루의 수인화는 눈에 띄게 안정됐다. 사실, 안정된 수준이 아니라 아예 수인화가 진행되지 않을 정도였다. 뭐랄까, 이제 수인이 아닌 평범한 인간이 된 느낌이기도 했다.

그 뒤로는 일부러 습성을 뜯어 고쳐가며 노력했다. 이제는 다른 사람 옆에 두어도 혼자 튀거나, 이상한 행동을 하지 않게 되었다.

“왜 냄새를 맡다 말아.”

“이거 강아지들이나 하는 거야.”

“지가 강아지면서 무슨.”

“나 이제 강아지 아니야. 내가 보기엔 규연이가 개 같아.”

나루를 꼬옥 껴안은 채 온기를 느끼던 규연이 아쉽다는 듯 틱틱거렸다. 그랬다가 괜히 나루에게 대미지를 입고 말았다. 일부러 ‘강아지’가 아닌 ‘개’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맞받아친 나루는 여느 때와 같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을 했다.

이건 무언가의 경고와도 같았다. 오랜 시간 동안 나루의 애인으로 지낸 규연은 알 수 있었다. 한 번만 더 틱틱거리면 말로 네 뼈를 발라 버리겠다는 식의 경고.

수그려 준 규연은 나루의 동그란 뒤통수를 쓰다듬어 주며 서운한 티를 냈다. 제법 일반인처럼 발전한 나루가 좋았지만, 실은 예전의 나루도 그리웠다. 예를 들어 엉뚱한 말로 자신을 당황하게 만든다던가, 불도저처럼 굴던 모습. 그냥, 나루가 자신의 앞에서는 편하게 있어 주었으면 했다.

“내 앞에서는 편하게 있어도 된다니까.”

“그러다 다른 사람들이 보고 이상하게 여기면?”

“안 그래.”

조심스러운 물음에 규연이 다정히 입을 맞춰 주었다. 2년 사이, 나루의 걱정이 많아졌다. 아니, 강박이라고 해야 할까.

강아지로서의 습성을 고친 건 그렇다 쳐도, 언젠가부터 다른 사람의 시선을 지나치게 신경 쓰기 시작했다. 규연이 그러지 않아도 된다며 여러 번 달래 보았지만, 말만 알았다고 할 뿐 쉽게 나아지지 않았다.

규연의 상체를 힘껏 끌어안고 떨어진 나루는 평소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너무 멀쩡하게 행동하려고만 했나. 조금 불편하긴 하지만, 규연이한테는, 음.

순식간에 속마음이 시끄러워졌다. 혼란스러워하는 게 표정에 그대로 드러나자, 규연이 능숙히 대화 주제를 돌렸다.

“아, 저녁에 가족끼리 식사 약속 잡혔어.”

“그럼 나도 따라갈래.”

“안 그래도 형이 너 보고 싶어 하더라.”

가족끼리 식사 약속이라. 나루는 이전에 규연의 본가에서 좋지 못한 일을 겪은 바가 있다. 하지만 망설임 없이 따라가겠다는 대답을 내놓았다.

최범현과의 사건을 마무리한 후, 나루는 여러 번 규연을 따라 본가에 방문했다. 유 회장은 나루 때문에 헬기를 띄웠다는 사실을 알고 뒷목을 부여잡았었다. 이 이유로 두 번째 방문은 처참히 망해 버렸다.

나루는 포기하지 않고 또다시 본가에 방문했다. 유 회장은 잊을 만하면 찾아오는 나루 때문에 미칠 지경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처음에는 내쫓을 것처럼 무섭게 굴더니, 방문 횟수가 늘어날수록 친절해지는 게 보였다. 겉만 거칠고 속은 수플레처럼 폭신한 게, 규연의 성격과 똑 닮았다. 정확히는 규연이 아버지의 성격을 빼닮은 듯했다.

“그런데 오늘은 왜 만나는 거야?”

“아빠 생신이라.”

“꽃 사서 가야겠다, 꽃.”

갑작스러운 저녁 약속에 들뜬 나루가 서둘러 카페로 들어갔다. 꼭 해야 하는 일을 후딱 끝내 놓고 일찍 퇴근할 모양새였다.

퇴근 시간까지 바쁘게 움직이던 나루는 옷을 갈아입은 후, 점심시간을 이용해 사 온 꽃다발을 품에 안고 나왔다. 카운터에 몸을 기대고 서서 건후와 잡담을 나누던 규연은 나루를 발견하자마자 카메라를 켰다.

찰칵, 찰칵!

셔터음이 여러 번 들렸다. 만족스럽게 사진을 확인한 규연은 뻔뻔한 낯으로 나루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건후는 또 못 볼 걸 봤다는 듯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제발 자제해 줘, 규연이 형.”

“마감까지 잘하고 가라.”

“솔로한테 너무 가혹한 환경이야 여긴.”

“가자, 송나루.”

멀뚱히 서서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던 나루가 건후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마지막까지 제대로 약 올려 주는 거였다. 규연은 그것마저 허락하지 않겠다는 식으로 나루의 손을 잡아끌었다.

가게를 나온 뒤, 인도에 조금만 서 있으면 규연의 차가 앞까지 마중을 나온다. 나루는 제자리에 서서 입술을 오물거리며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 중이었다. 그렇게 혼자만의 고민을 이어가고 있을 때, 작은 클랙슨 소리가 들렸다.

빠앙.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규연이 벌써 차를 빼 왔다. 나루는 똘망해진 눈으로 조수석 문을 활짝 열었다.

덜컥!

“어윽……!”

“규연이 냄새.”

규연이 브레이크를 단단히 밟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조수석에 올라탄 나루가 곧장 규연에게 달려들어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기 때문이다. 뭐 하는 짓이냐고 묻기도 전에 나루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후읍, 파하. 흡, 하.

숨소리가 골 때렸다. 규연은 목을 간지럽히는 숨결에 미칠 것 같았다.

설마, 내 앞에서는 편하게 있어도 된다는 말 때문에 이러는 건가.

제 허벅지 위에 올라탄 나루를 그대로 둔 규연이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아냈다. 규연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모르고, 혼자 열심히 냄새를 맡는 나루가 지나치게 귀여웠다.

얘 왜 이래. 나 죽이려고 작정했나. 아…….

“크흡.”

“…웃어?”

“아니, 안, 웃어.”

결국, 참던 웃음이 터졌다. 킁킁대던 나루는 그제야 몸을 떨어뜨리고 눈을 매섭게 떴다. 규연은 두 손을 저으며 해명했다.

하지만 입꼬리가 잔뜩 올라간 채로 해명해 봤자였다. 나루는 삐친 티를 내며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안전벨트도 직접 멨다. 안전벨트를 메 주는 건 항상 규연의 몫이었는데, 직접 하다니. 단단히 삐친 모양이었다.

“그래도 예전 모습 보여주니까 좋다.”

“웃었으면서.”

차를 출발시킨 규연이 능글맞게 말을 걸었다. 나루는 일부러 퉁명스레 대꾸하고는 창문만 바라봤다. 규연은 운전하는 동안 옆을 힐끔거리며 나루의 상태를 살피고 마음껏 귀여워했다.

정말 삐친 것처럼 창문만 보던 나루는 손에 든 꽃다발에 얼굴을 푹 묻더니 조용히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빙글 올라간 입매가 얼마나 귀엽던지. 규연은 또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았다.

많이 변했다고 생각했는데, 마냥 그런 건 아니었나.

나루는 여전히 귀여웠고, 앞으로도 귀여울 거다. 이번 겨울도, 다음 겨울도, 그다음 해 겨울도. 규연의 눈에는 평생 사랑스러워 보일 게 분명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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