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길에서 빠져나온 나루는 차원 이동구가 있던 곳까지 힘껏 뛰었다. 이대로 규연의 집으로 돌아가면 해결되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범현의 집착은 상상 이상의 수준이었고, 무언가 조치를 취하지 않는 이상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카페 근처 골목길까지 뛰어가는 내내 숨이 헐떡였다. 짧은 사이 두어 번씩이나 목이 졸려 숨 쉬는 게 불편했다.
나루는 골목길 근처에 도착해 규연에게 위치를 보내 놓았다. 이곳에서 기다리면 범현이 먼저 도착할지도 몰랐다.
한편, 범현은 규연을 지나쳐 어두워진 번화가를 샅샅이 뒤지는 중이었다. 나루를 찾아 차원 이동구로 끌고 갈 작정이었다.
뒤늦게 그 뒤를 따라 나온 규연은 나루의 문자를 받고 꿍꿍이를 알아챘다.
[사용자가 위치를 전송했습니다.]
[나 여기에 있어. 곧 최범현이 날 찾으러 올 거 같아.]
멀쩡한 문자 내용에 규연이 살짝 안심했다. 정신이 영 힘들어 보여서 혼자 보낸 걸 후회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괜찮은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곧 최범현도 간다니. 앞의 상황을 내다본 것처럼 이야기하는 나루가 신기했다.
규연은 나루가 말한 위치를 찾아 발걸음을 옮겼다.
현재 시각 새벽 다섯 시. 아침이 밝아오려면 몇 시간 남지 않았다.
골목길로 들어선 나루는 일렁이는 차원 이동구를 발견하고 침을 꼴깍, 삼켰다. 반쯤 찢어진 이동구가 선명히 빛나고 있었다.
낮에는 희미하게 보였는데, 사람이 없는 새벽이라 그런지 일렁이는 형체가 더 뚜렷했다.
나루는 커다란 쓰레기통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 두 무릎을 끌어안았다. 이렇게 있으니 처음 이곳으로 오기 전이 떠올랐다.
지하실에서 도망쳐 나와 골목길에 숨어 있던 모습. 비가 내렸던 것 같기도 하다.
그때와 같은 상황에, 차원 이동구까지 열려 있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투둑, 툭, 투둑.
타이밍도 참 거지 같지. 낮부터 우중충하더니 늦은 새벽에서야 굵은 빗줄기가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나루는 우산도 없이 그대로 떨어지는 빗물을 맞았다. 차가운 빗줄기가 머리를 때리고, 온몸을 서서히 적셔갈수록 제정신이 돌아왔다.
모든 조건이 처음 왔던 그때와 맞아들어갔다.
가만히 무릎 사이에 고개를 묻고 있던 나루는 찢어진 차원 이동구를 빤히 쳐다봤다.
“어…….”
시간이 지날수록 이동구의 입구가 좁혀지고 있었다.
범현은 강제로 저 틈새를 벌려 찢어발겼다고 했다. 그러니 당연히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촉박했다. 나루는 저 이동구가 닫히기 전에 범현이 자신을 찾아 주길 바랐다.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겠지만, 규연이 있으니 괜찮았다.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여기고. 최범현이 있어야 할 곳은…….
저 너머다.
나루는 범현을 어떻게든 떨쳐내고 싶었다. 자신을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천치로 만든 범현이 죽도록 싫었다.
겨우 평범한 사람이 되었는데, 또 다시 그 지옥 속으로 돌아가 개처럼 사는 건 끔찍했다.
터벅, 턱…….
한참 비를 맞으며 머리를 식히던 중, 눈앞에 구둣발 하나가 보였다.
나루는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제 앞에 있는 게 범현이라는 것을.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리니 마찬가지로 비에 젖은 범현이 보였다. 아까만 해도 험악하게 일그러져 있던 얼굴이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범현은 무릎을 굽히고 앉아 나루의 두 어깨를 살포시 붙잡았다.
“돌아가자, 나루야.”
“…싫어.”
그답지 않게 목소리가 떨렸다. 닫히고 있는 차원 이동구를 착잡하게 쳐다본 범현이 나루에게 매달리듯 말했다.
“하루도 안 빠지고 찾아다녔어. 네 흔적을 찾은 후로는 살아있다는 사실에 기뻐했고.”
“…….”
목소리에 거짓 어린 슬픔이 묻어났다. 나루는 범현의 말을 믿고 싶지 않았다. 그가 진심으로 찾아다녔다 해도, 이전에 한 짓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게다가 범현은 나루를 찾은 후, 폭력부터 사용했다. 다정하게 굴다가도 핀트가 엇나가면 강압적으로 행동하는 게 아직 고쳐지지 않은 것이다.
질려 버린 나루가 한 걸음 물러서자, 범현이 나루의 등을 끌어당겨 품에 강제로 안았다.
아까와는 폼이 달랐다. 느슨하게 나루를 껴안은 범현이 좁은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뜨거운 숨결이 비에 젖어 축축해진 어깨에 고스란히 닿았다. 나루는 꺼림칙한 기분에 몸을 비틀어 빼냈다.
“네가 있어야 할 곳은 내 옆이잖아.”
“…그냥 욕심이면서.”
“욕심, 그래, 욕심이라면 욕심이지. 이런 짓을 할 만큼 너를 사랑하니까.”
사랑.
저 입에서 사랑이라는 말이 나온 건가.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그렇게 괴롭힐 땐 언제고, 이제 와서 전부 사랑이었던 것처럼 포장한다.
“이게 어떻게 사랑이야! 나는 괴롭기만 했는데! 내가 당신 때문에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알기나 해?!”
양손으로 범현의 어깨를 밀쳐내던 나루가 악을 썼다. 살면서 이렇게 소리를 질러 본 건 처음이었다.
숨이 가빠지고, 눈물이 울컥 새어 나왔다. 아까처럼 두려워서 우는 게 아니었다. 정말 억울해서, 속상해서, 저도 모르게 울음이 막 터져 나왔다.
나루의 울부짖음에 충격받은 듯 멍해져 있던 범현이 슬며시 손을 뻗었다. 나루는 그것조차 허락하지 않겠다는 태도로 손을 매정히 쳐냈다.
늘 무표정을 유지하던 범현이 서글픈 얼굴을 했다. 축 늘어진 눈썹과 달리 눈에는 아무런 감정도 실려 있지 않은 게 소름이 돋았다. 탁하게 물든 눈동자 속으로 악에 받친 나루의 모습이 흐릿하게 일렁였다.
“힘들었다는 거, 알아. 나루야, 난 그저, 네가 내 품에서 벗어나려 하는 게 서운했던 것뿐이야. 널 놓쳐서 얼마나 많은 후회를 했는지 몰라. 그러니까 적당히 알아먹고 나한테 돌아와. 네 주인은 나여야만 하잖아, 아가.”
네 주인은 나여야만 하잖아. 네 주인은, 나여야만. 범현은 제 소유욕을 서슴없이 드러내며 나루를 달랬다. 범현에게 나루의 존재는 여전히 품에서 벗어나면 안 되는, 가두어 놓아야만 하는 멍청한 수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힘들었다는 걸 안다는 사람이 날 찾자마자 뺨을 때려? 지금도 후회하는 척, 강압적으로 굴고 있잖아. 소름 돋아. 거짓말. 다 거짓말.
끝까지 바보 취급을 당한 것 같아 기분이 나빴다.
“내가 왜 물건처럼 가만히 있어 줘야 해? 사랑하는 사람들끼리는 동등해야 하는 거잖아. 그런데 당신은 항상 내 위에만 있었어요. 자꾸 사랑하는 척, 나 바보 만들지 마.”
범현의 앞에만 서면 덜덜 떨리던 목소리가 굳건해져 있었다. 눈빛 또한 흔들림 없이 또렷했다.
나루는 범현에게 한 걸음씩 가까워지며 그의 몸을 이동구 쪽으로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나루의 말에 당황한 범현은 몰아붙이는 대로 뒷걸음질 쳐 주었다.
지금 눈앞에 서 있는 건, 더 이상 범현이 알던 나루가 아니었다.
“나 주워서 키워준 건 고마운데, 나한테 한 짓들은 용서가 안 돼. 다시는 그 더러운 세상으로 돌아가기 싫어. 나, 나, 여기서 평범하게 살아갈 거니까 데려갈 생각하지 마세요.”
또박또박 발음하며 제 의사를 밝힌 나루가 잠시 뜸을 들였다. 어느새 범현의 몸은 차원 이동구 가까이 붙어 더 물러날 곳이 없었다.
범현의 눈썹이 일그러지고, 두 눈동자 또한 오묘하게 물들었다. 밀려드는 온갖 감정들을 참아내고 있는 듯했다.
후회한다는 말이 완전히 거짓은 아니었던 걸까. 그럴 일 없겠지만, 이제 와서 제 잘못을 뉘우친다 해도, 나루는 범현의 곁으로 절대 돌아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범현은 나루의 얼굴을 조금이라도 더 기억 속에 새기기 위해 시선을 떼지 않았다.
마치 뒤이어질 나루의 행동을 예측이라도 한 것처럼.
한층 부드럽게 다가온 손이 나루의 동그란 머리통을 쓸고 지나가 뺨에 닿았다. 빗물에 젖어 미적지근해진 온기가 피부 위로 닿을 때마다 나루의 표정이 찡그려졌다.
범현은 다 포기한 척, 무덤덤한 부탁을 건넸다. 나루의 마음이 약하다는 걸 알기에, 동정이라도 사서 꾀어내려는 수작이었다.
“처음 나한테 왔던 날, 기억하니.”
“…네.”
“그때처럼 순진하게 나만 바라봐 줬으면 좋겠는데. 너 잘 웃었잖아, 아가. 우리 그때로 돌아가자.”
뭐, 순진하게 자기만 바라봐? 거기다 이 상황에서 전처럼 돌아가자니, 말도 안 되는 부탁이었다.
나루는 처음 범현을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경계하면서도 드디어 살았다는 그 안도감. 주인이 생겼다는 기쁨.
어렴풋이 그때의 기분이 생각났지만, 지금 와서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웃는 건 어려웠다.
“이제 안 된다는 거, 알잖아.”
차분하게 대답한 나루가 눈을 지긋이 감았다 떴다. 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범현의 어깨를 잡아 차원 이동구 속으로 밀쳐 넣었다. 철옹성같이 서 있던 단단한 몸이 손쉽게 기울어졌다.
찢어진 이동구 사이로 범현이 멀어져 갔다. 허무하게도 말이다. 길게 뻗어진 손이 허공을 휘저었지만, 잡히는 건 없었다.
드디어 동이 트기 시작하며, 틈새가 천천히 메꿔진다. 범현은 이동구의 틈새가 전부 닫힐 때까지 나루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핏줄이 터져 부릅뜬 눈이 악몽에 나올 법한 귀신 같았다.
잠깐 사이 나루와 함께 지냈던 날들이 범현의 머릿속에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나루에게는 지옥 같은 시간이었을지 몰라도, 범현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다소 좋지 못한 방법으로 만났지만, 작고 사랑스러운 나루를 나름대로 예뻐했었다. 엇나가지 않았더라면 아직까지 품에 안고 있었을 것이다. 방식이 어쨌든, 범현은 나루에게 온 정성을 다했다. 그에게 있어 나루는 가치 있는 수인이었다.
옆에 두고 오랫동안 가지고 놀 가치가 있는, 그런 수인.
잠시 후, 아주 희미한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틈새가 완전히 닫혔다. 나루는 점점 멀어져가는 목소리를 듣지 못한 척, 외면했다.
‘네까짓 게 감히 나를, 온 마음 다해 키워줬더니, 이딴 식으로 날 배신해? 넌 영원히 내 옆에만 있어야 하는…….’
씁쓸했다. 범현에게 나루는 사랑하는 사람이라기보다, 그저 자신이 아끼는 물건 중 하나이지 않았을까. 사람으로서 동등한 위치에 서 준 규연과 달랐다.
마지막 말 덕분에 미련은 없었다. 되려 속이 후련했다. 일렁이던 차원 이동구는 어느새 말끔히 사라진 뒤였다.
새벽 동안 무슨 일들이 벌어진 건지, 정신이 멍했다.
나루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숨을 일정하게 내뱉었다. 단기간에 몸도, 마음도, 극한까지 밀어붙여져서 힘이 들었다.
이제 다 끝난 걸까.
기분이 묘했다. 아무 걱정 없이 이 세상에 남을 수 있게 되었는데, 이게 현실이 맞는 건지 믿기지 않는달까.
“아, 규연이…….”
규연에게 돌아가려 했으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힘 풀린 다리가 바람 빠진 풍선처럼 너풀거렸다.
“고생 많았어.”
“…….”
그때, 규연이 다가와 나루의 몸을 일으켜 세워 줬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던 건지, 묵묵히 고생 많았다고 위로해 주는데 설움이 울컥 복받쳐 올랐다.
나루의 턱에 호두 같은 주름이 잡혔다. 울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나, 나 잘했어……?”
“응, 잘했어.”
울망한 눈동자로 묻던 나루가 눈물을 꾹 삼켜냈다. 스스로 발목을 옥죄던 존재를 떨쳐냈다는 게 대견했고, 신기했다.
규연은 재킷을 벗어 나루의 몸 위에 덮어 주고,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늘 하던 행동인데 이게 참 위로가 됐다.
아침 해가 구름 사이로 삐져나오자, 비가 서서히 그쳤다. 하늘에는 큼지막한 무지개 하나가 생겼다.
뜻밖의 평화를 맞이한 나루는 규연의 손을 맞잡은 채 골목길을 등지고 섰다.
다시는 이곳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아니, 이제 굳이 여길 찾아올 일이 없었다.
남은 일은 규연과 함께 지금의 인생을 잘 살아가는 것뿐이었다.
나루는 골목길을 빠져나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향했다. 새벽 내내 겪었던 일이 마치 꿈 같았다.
눈 감았다 뜨면 금세 기억에서 사라져 버릴 악몽. 그뿐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