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6화 (96/130)


규연은 새벽 늦게 도착한 메시지를 확인한 후, 바로 짐을 쌌다.

집에 도착한 나루는 자겠다며 이상 행동을 보였다. 그래도 그저 피곤했을 뿐이라는 말이 덧붙어 그런 줄로만 알았다.

더 늦은 시각. 나루에게서 다시 메시지가 도착했다. 자고 일어나서 기분이 좀 괜찮아졌는지 편의점에 다녀온다고 했다.

잠시 계약서를 보고 있던 규연은 뒤늦게 이 메시지를 발견했다. 답장을 보내려고 했을 땐, 이미 일이 벌어진 뒤였다.

오타가 난무하는 메시지가 도착한 후, 살려달라는 말이 도착했다. 장난으로 보낸 메시지 같지는 않았다.

왜, 왜 항상 내가 없을 때마다 무슨 일이 생기는 걸까.

출장을 온 일부터 후회하던 규연이 황급히 짐을 싸서 공항으로 출발했다. 내일 아침에 당장 남은 미팅이 잡혀 있었지만, 그런 것 따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새벽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공항이 텅 비어 있었다. 지금 뜨는 비행기도 당연히 없었다.

미치고 팔딱 뛸 지경이었다. 규연은 나루에게 여러 번 전화를 걸었다. 목소리라도 듣고 싶은데, 신호음이 가지 않고 끊겼다. 핸드폰을 꺼 놓은 듯했다.

가장 이른 비행기 시간은 오전 7시. 출발까지 네 시간은 더 기다려야 했다.

착잡하게 공항 안을 돌아다니던 규연은 곧바로 규성에게 전화를 걸었다.

Trrrr…….

신호음이 길게 이어졌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전화를 받는 속도가 느렸다.

-하, 너 지금 몇 시인 줄은 알고,

“형, 헬기 한 대만 보내 줘.”

부스스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은 규성이 신경질을 냈다. 규연은 다짜고짜 본론부터 내놓았다.

-뭐, 뭐? 유규연, 술 마신 거면 끊어.

“진심이야, 급해서 그래. 지금 제주도에 있는데 시간이 늦어서 비행기가 못 떠.”

전화 너머로 규성의 황당함이 느껴졌다. 규연은 뻔뻔스럽게 부탁을 이어갔다. 규성이라면 충분히 들어줄 수 있는 부탁이었다.

-일단 무슨 상황인지부터.

“송나루가 잡혀 있어. 형, 당황스러운 건 알겠는데, 내가 정말 급해서 그래.”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목소리였다. 다급하고, 간절하고, 속상한 목소리. 규성은 말없이 전화를 끊었다. 규연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걸 일찍이 깨닫고 말을 들어주기로 한 것이다.

헬기가 있긴 하지만, 이걸 아무 때나 마음대로 띄울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규성은 제 막냇동생의 간절한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아버지에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처음으로 지껄여 봤다. 모두가 자는 시간에 어수선하게 행동하니 유 회장이 부스스한 꼴로 나와 호통을 쳤다.

“아니, 이 밤에 무슨 소란이야!”

“그게, 아버지, 규연이가 지금 급하게 헬기를 보내달라고 해서요. 제주도에 갇혔다는 것 같은데…….”

거짓을 살짝 보태 말한 규성이 곤란한 듯 목덜미를 매만졌다. 유 회장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떡 벌렸다. 그리고는 10초도 지나지 않아 외쳤다.

“뭐, 갇혀? 당장 헬기 보내! 우리 막내아들 무슨 일이라도 생기는 날에는…!”

“진정하세요, 아버지. 그렇게 위험한 일은 아닌 것 같아요.”

“아니긴 무슨! 당장 띄워!”

흥분한 유 회장 덕분에 일이 수월하게 풀렸다. 규성은 바쁘게 전화를 받으며 헬기를 띄우기 위해 노력했다. 규연의 다급한 부탁 하나로 온 가족이 나선 것이다. 전화 너머로 부정적인 대답이 들려올 때마다 어떻게든 설득하려는 규성의 노력이 제일 컸다.

두 시간 정도가 지났을까. 규연의 주변에 바람이 거세게 일더니, 귀가 찢어질 듯한 소음이 들렸다.

규연은 귀 한쪽을 틀어막은 채, 위를 올려다보았다. YK 로고가 박힌 헬기. 규성이 보낸 게 맞았다.

도움을 받아 올라탄 규연은 아득하게 보이는 땅을 멍하니 응시했다.

최근 들어 사건이 끊이지 않고 일어나 정신이 혼미할 정도였다. 왠지 떠나기 전까지 불안한 마음이 들더라니, 직감이 틀리지 않았다.

이 새벽에 설마 헬기까지 띄울 줄은 몰랐다. 넉넉한 집에서 살았어도 이렇게까지 유별을 떨어보는 건 또 처음이었다. 드라마에서나 보던 짓을 실제로 하게 될 줄이야. 늦은 시간에 제주도까지 달려와 준 사람들에게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이 민폐를 끼쳐야만 했다.

프로펠러 돌아가는 소리가 정신없이 들려왔다. 규연은 아득해지는 이성을 붙잡은 채 눈을 지그시 감았다.

몇십 분 후, 문이 열리고 옷자락이 휘날릴 정도의 바람이 일었다. 빠른 루트로 서울에 도착한 헬기는 YK 본사 옥상에 안전히 착륙했다. 야밤에 요란스럽게 헬기를 부른 것치고 모든 일이 차분하게 흘러갔다. 

규연은 내리자마자 1층으로 정신없이 뛰어 내려갔다. 1분 1초도 헛되이 쓸 수 없는 상황이었다.

어두컴컴한 로비를 지나쳐 닫힌 문을 따고 나오니 회사 앞에 차 한 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규성이 센스 있게 준비해 놓은 차였다. 배려 섞인 행동 같았으나, 규연은 속뜻을 바로 알아챘다. 더 귀찮게 하지 말고 일을 빨리 해결하라는 규성의 압박이나 마찬가지였다.

옆에 서 있던 규성의 비서에게서 차 키를 받아 든 규연은 운전석에 앉자마자 시동을 걸고, 바로 액셀을 밟았다.

나루가 위치를 보낸 장소는 집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구석진 곳에 숨어 있어서 잘 보이지 않지만, 의외로 번화가 사이에 있는 오피스텔이었다. 규연은 액셀을 밟으며 온갖 생각을 했다.

설마, 전 주인이라는 인간이 기어코 나루를 찾아낸 걸까.

첫 생각부터 정답이었다. 우선, 건혁은 제가 잡아 놓고 있었기에 나루를 괴롭힐 수 없었다. 이외에 나루를 못살게 굴 사람은 전 주인 정도가 다였다.

상황을 짐작해 보던 규연은 핸들을 쾅! 내리쳤다. 순간 차체가 흔들리며 중앙선을 침범할 뻔했으나, 새벽이라 차가 없어 사고로 이어지지 않았다.

YK 본사에서 집 근처까지 가는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길이 뻥 뚫려 있어서 5분도 채 되지 않아 골목길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무 데나 차를 세워 둔 규연은 내리자마자 골목길 사이로 뛰어 들어갔다. 오피스텔의 입구는 앞으로 더 가야 나올 듯했다.

“나루야, 제발…….”

제발 무사하게 있어 줘.

속으로 기도하듯 중얼거린 규연이 골목길 코너를 막 돌았을 때였다.

“놔, 이거 놔! 아윽, 으, 놓으라고!”

“네가 있을 곳은 여기가 아니야, 얌전히 걸어. 돌아가자.”

나루의 앙칼진 목소리가 좁은 골목길을 가득 메웠다. 뒤이어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묵묵히 이어졌다.

순간, 규연의 이마에 힘줄이 섰다. 울음 섞인 외침에 화가 울컥 솟는 걸 느낀 그가 걸음을 성큼성큼 옮겼다.

걷다 보니 두 사람의 실루엣이 보였다. 키가 큰 남자가 나루의 머리채를 쥔 채 강제로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고, 나루는 남자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양팔을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턱!

규연은 나루의 팔을 잡아 제 쪽으로 잡아당긴 후, 범현의 등을 발로 차 버렸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당한 범현이 간발의 차로 나루를 놓쳤다.

공기가 싸하게 내려앉았다. 나루는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눈을 크게 뜨고, 규연을 멍하니 쳐다봤다.

동시에 눈물이 투둑, 떨어졌다. 소매로 눈가를 닦아내던 나루는 규연에게 급히 안겨들었다. 나루의 상태를 살펴보던 규연은 인상을 찌푸렸다. 꼴이 엉망이었다. 손은 다친 건지 반창고가 붙어 있었고, 식은땀과 눈물로 범벅된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허으, 흡, 규연아, 윽!”

“…괜찮아, 괜찮아.”

나루는 규연이 왔다는 반가움보다, 살겠다는 의지로 품에 파고들었다.

조용히 일어나 옷을 털어내던 범현은 울며불며 규연에게 매달리고 있는 나루를 죽일 듯이 쳐다보았다.

그러자 규연이 나루를 제 뒤에 숨겨 주며 범현에게 맞섰다.

날카로운 두 시선이 허공에서 맞물렸다. 규연은 범현의 인상을 훑어보고 미간을 좁혔다.

생긴 대로 노네, X발.

범현은 나루보다 나이가 한참 많아 보였다. 딱 규성과 맞먹을 듯해 보였다. 저런 인간이 어린 나루를 데리고 휘둘렀다니, 잇새로 욕이 비집고 나왔다.

“원래 주인이 있는 앤데, 멋대로 주워가 키우면 못 쓰죠. 그만 돌려받고 싶으니 평화롭게 끝냅시다.”

범현이 정중한 척 젠틀한 웃음을 꾸며냈다. 이미지 관리할 때나 사용하던 화법이었다.

규연은 제 뒤에 선 나루를 더 깊숙이 숨겨 주며 제안을 거절했다.

“개도 아니고 사람한테 주인이 어디 있겠어요. 아무리 경우가 없어도 그렇지, 취급이 너무하네. 열 받게.”

규연의 목소리 또한 차분히 이어졌다. 돌려 말하는 듯하면서도 직설적으로 말한 그가 재수 없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도발과도 같은 말에 범현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었다. 나루는 그 모습에 겁먹어 규연의 옷 끄트머리를 잡아당겼다. 더 자극하지 말라는 무언가의 신호였다.

규연은 그런 나루의 손을 듬직하게 감싸 잡았다. 온기가 느껴지자 화들짝 놀란 나루가 얌전히 손을 내어주었다.

규연과 나루의 자연스러운 스킨십에 범현의 눈이 돌았다.

“송나루.”

“대답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

다른 사람의 손을 타는 걸 누구보다 싫어하는 범현이었다. 나루의 이름이 매섭게 불리자, 규연이 대답하지 말라며 대화를 끊어 버렸다.

몇 분 동안 대치하던 범현은 화를 참지 못하고 가까이 다가왔다. 그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나루는 기겁하며 몸을 떨어댔다.

굵직한 손이 뻗어졌으나, 나루에게 닿지는 못했다. 규연이 중간에서 손을 쳐낸 덕분이었다.

범현이 직접적으로 나루를 때리려는 걸 보니 속이 뒤집히는 거 같았다. 규연은 예의 따위 말아먹은 말투로 대응했다.

“손버릇 더럽네, X발. 자꾸 어딜 들이대.”

“같잖은 새끼가 건방지게……!”

싸움이 불 번지듯 커졌다. 규연의 발언 이후, 범현이 주먹을 들어 위협을 가했다.

뒤에서 지켜보던 나루가 대신 맞아주기 위해 튀어나왔지만, 규연의 제지로 멈춰 있어야만 했다.

골목은 좁았고, 이곳에서 난동을 피우기엔 많이 위험했다. 규연은 나루를 먼저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송나루, 도망가.”

“그, 그게 무슨 말이야, 안 돼.”

“가, 나도 금방 갈게.”

“너 다쳐, 규연아, 다치면 나는, 난.”

규연의 말에 패닉이 온 나루가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먼저 도망가라니. 함께 가는 거면 몰라도, 규연 혼자 두고 갈 수는 없었다.

발이 떨어지지 않아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 서 있으니, 규연이 호통을 쳤다.

“가라고!”

“…….”

“이 인간이랑 있으면 위험해, 응? 먼저 도망가 있어. 금방 쫓아갈게.”

소리를 지르고 미안했는지 톤을 다운시킨 규연이 다시 다정하게 말을 이었다.

울먹이던 나루는 규연의 단호한 말에 애써 고개를 주억거렸다. 규연이 범현을 상대하는 동안, 어떻게든 머리를 굴려야 했다.

이 상황을 넋 놓고 바라볼 수는 없었다.

나루가 골목길 바깥으로 한 발짝 멀어지자, 범현이 눈을 번뜩였다.

“거기 서.”

“그대로 가.”

뒤이어 규연의 믿음직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잠시 망설이던 나루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뛰쳐갔다.

골목길을 벗어나고, 또 다른 골목길로 들어설 때까지 정신없이 내달렸다.

나루가 떠난 후, 범현과 규연 사이에 싸늘한 공기가 맴돌았다.

범현은 규연의 행동에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리다가, 현실적인 조언을 늘어놓았다.

“쟤 평생 책임질 거 아니면 놔. 이쪽 세상과 어울리지 않는 애라는 거, 본인이 더 잘 알지 않나. 나루는 당신이랑 달라.”

이쪽 세상과 어울리지 않는다. 나루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이었다.

규연은 범현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가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그 누구도 먼저 시선을 피하지 않는 게 치열했다.

“알지, 나랑 다른 거. 그런데 난 놓을 생각이 없어요. 송나루 평생 책임질 자신 있거든.”

의기양양하게 대답한 규연이 한쪽 입꼬리를 씩, 올려 웃었다.

고작 한다는 게 책임 못 질 거면 놓으라는 말인가. 식상해서 지루할 지경이었다.

범현은 규연의 대답에 못마땅하다는 듯 눈썹을 꿈틀거렸다. 애초부터 나루는 자신의 것이었는데, 중간에 끼어든 놈이 책임을 질 수 있다고 말하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지지 않고 표정을 지워낸 범현이 여유로운 웃음으로 화답했다.

“할 수 있으면 해 봐.”

속삭이듯 말한 그가 규연의 옆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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