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쳐야 해. 도망쳐야 한다. 무조건 도망쳐. 그러지 않으면 정말 죽을지도 몰라.
탁!
나루가 범현의 어깨를 세게 밀쳐내고 발을 힘껏 굴렀다. 골목길에서 빠져나가기만 하면 바로 규연에게 연락을 넣고, 집으로 돌아가 문을 걸어 잠글 생각이었다.
“흐, 아으윽!”
“놀이가 너무 길잖아, 이제 그만 해야지. 일단 가서 얘기할까.”
도망치려던 몸이 손쉽게 붙잡혔다. 범현은 나루의 뒷덜미를 잡아챈 후, 발목을 세게 걷어찼다.
뚜둑, 하는 소리가 들리고 나루의 몸이 기울어졌다. 아스팔트 바닥에 쓰러진 나루는 제 발목을 끌어안고 낑낑 앓았다.
“끄, 흐으, 아, 아파, 아…….”
“입 안 다물지.”
“으, 으윽, 으…….”
세뇌가 이렇게 무섭다. 어렸을 때 받았던 교육 탓에 입이 곧바로 다물어졌다. 끅끅거리며 신음을 삼키던 나루는 범현의 손에 이끌려 아스팔트 위를 기었다.
여린 손바닥 살이 거친 아스팔트 위를 짚을 때마다 따끔거렸다. 와중에 범현의 보폭이 넓어서 따라가는 게 버거웠다.
발목 상태도 마땅치 않고, 손바닥도 쓸려서 아프고, 무릎은 이미 다 까져 있었다.
범현은 나루가 더 이상 도망치지 못하도록 뒷덜미를 단단히 잡아챘다. 끌려가다 말고 발버둥을 쳐 보던 나루는 반대 방향으로 몸을 틀어 아스팔트 바닥을 긁었다.
필사적인 손짓에 범현이 비웃음을 터뜨렸다. 뒤돌아서 그 얼굴을 확인해 보던 나루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분명 웃었는데. 초점이 사라진 눈동자가 동태 눈깔마냥 탁했다. 열 받았다는 듯 위로 넘어간 눈이 섬뜩했다.
나루는 손바닥에서 피가 배어 나오는 것도 자각하지 못한 채, 열심히 바닥을 긁었다. 안쓰럽게도 몸은 그 자리 그대로였다.
“아가, 손 다쳐. 얌전히 기어.”
“으, 흐윽, 안 가, 못, 가…….”
“반말은 어디서 배워 왔을까. 버릇없게.”
가만히 서서 나루를 내려다보던 범현이 발끝으로 엉덩이를 툭, 건드렸다. 그러자 소스라치게 놀란 나루가 몸을 돌려 방어했다.
범현에게는 그저 우스운 행동이었다. 어릴 적부터 키웠던 똥강아지 새끼가 반항해 봤자였다.
잠시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던 범현이 속으로 시간을 쟀다. 그동안 나루는 범현을 벗어나기 위해 있는 힘껏 발버둥 쳤다.
“이제 만족했니.”
“흐, 흐끅, 놔!”
“놔?”
짝!
날카로운 마찰 소리와 함께 나루의 고개가 돌아갔다. 뺨을 내리친 범현은 벌겋게 부어오른 살을 두어 번 쓰다듬어 주고 나루의 뒷덜미를 억세게 잡아끌었다.
본격적으로 힘을 주기 시작하니 몸이 종이 인형처럼 딸려왔다. 아스팔트 바닥에 질질 끌리느라 나루의 몸에 생채기가 남자, 인상을 구기던 범현이 자그마한 몸뚱어리를 품에 안아 들었다.
질리도록 맡았던 향이 코끝을 찔렀다. 묵직한 향수 냄새를 맡으니 눈앞에 범현이 있다는 게 실감 났다.
툭! 툭!
주먹을 쥔 나루가 범현의 가슴팍을 세게 내리쳤다. 예전이었다면 상상도 못 했을 짓이었다.
범현은 변한 나루의 행동을 일일이 참아 주며 걸음을 옮겼다. 어디로 가는 건지 모르겠지만, 목적지가 확실히 있는 모양이었다.
범현의 검은 셔츠에 나루의 피가 묻어났다. 아스팔트에 쓸린 손을 험하게 다뤄서 피가 멈추지 않고 흘러나오는 중이었다.
범현은 한 팔로 나루를 들어 안고, 나머지 팔로 무작정 휘둘리고 있는 손을 단단히 붙잡았다.
덕분에 나루는 꼼짝도 할 수 없게 됐다. 발버둥 치는 것도 먹히지 않고, 때려 봐도 안 되고, 답이 없었다.
골목길만을 이용해 걸어가던 범현은 한 건물 앞에 멈춰 섰다. 바로 차원 이동구로 데려갈 줄 알았더니, 그간 임시로 지내던 거처에 데리고 온 모양이었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나루는 의심받지 않도록 끊임없이 반항하면서, 머릿속으로 규연에게 연락할 방법을 떠올려냈다.
“들어가.”
건물의 끝 층까지 올라간 범현이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더니 나루의 등을 떠밀었다.
들어가. 트라우마를 불러일으키는 말이었다. 나루는 이까지 덜덜 떨어 가며 현관 안으로 발을 들였다.
집 안은 평범했다. 생활의 흔적이 없어서 삭막하게 느껴졌으나, 지내기에는 불편하지 않아 보였다.
범현 또한 다른 세계에서 현실로 넘어온 것인데, 어떻게 이런 곳을 마련한 걸까.
의문을 품은 나루가 범현을 경계했다.
철컥.
현관문이 닫혔다. 그나마 들던 복도의 등 불빛이 사라지면서 범현의 얼굴에 그림자가 졌다.
털썩!
신발도 벗지 못한 채 뒷걸음질 치던 나루가 신발장 턱에 걸려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이곳에 남은 건 범현과 자신, 둘뿐이었다.
나루는 겉옷 주머니를 슬쩍 만져 보았다. 아까 너무 놀라서 핸드폰을 떨어뜨릴 뻔했는데, 다행히 주머니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주머니 넓은 카디건을 입고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범현은 말없이 엎어진 나루를 바라보다가 다정하게 시선을 마주쳤다.
“손.”
“…….”
짧은 명령에 나루의 손이 앞으로 나갔다. 세뇌 때문인 것도 있었고, 계획적으로 군 것도 있었다.
범현과 둘만 남은 상황 자체가 위험해서, 나루는 일단 말을 잘 듣는 척하기로 했다.
피로 범벅된 손을 범현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으니 한숨이 터져 나왔다. 범현은 다친 나루의 손을 보며 진심으로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다 까졌네.”
“…….”
“가서 앉아.”
손을 자세히 살펴보던 범현이 턱짓으로 거실 소파를 가리켰다. 나루는 천천히 걸어가 시키는 대로 앉았다.
나루의 얌전한 태도에 평소의 모습을 되찾은 범현은 구급상자를 가져오겠다며 자리를 떴다.
이때였다. 바로 이때가 기회였다.
나루는 범현이 다른 방으로 들어간 사이, 핸드폰을 꺼내 곧장 메시지를 전송했다.
[규영ㄴ아 살려줘 나 만났어 전주인 ㄴ근데 지금 잡혀왓 어, 골몪리에서]
[사용자가 위치를 전송했습니다.]
오타가 난무했다. 나루는 규연이 자신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위치까지 찍어 보냈다.
잠시 후, 멀어졌던 발소리가 서서히 가까워졌다. 나루는 핸드폰을 도로 주머니에 넣어 놓고, 모르는 척 피가 흐르는 손만 바라봤다.
범현은 물을 묻힌 깨끗한 수건과 구급상자를 들고 돌아왔다.
“손 내밀어.”
“…….”
원하는 대로 손을 내밀자 미지근한 수건이 닿아왔다. 부드러운 손짓으로 핏기를 닦아낸 범현은 연고를 바르고, 반창고를 꺼내 붙여 주기까지 했다.
나루는 인상을 찌푸려가며 치료를 받았다. 손이라도 나아야 도망칠 때 유리할 수 있었다.
“허튼 생각하지 마.”
“…….”
“아까부터 대답을 안 하네. 나루야, 돌아가면 교육부터 다시 받아야겠다.”
교육. 어이가 없었다. 사람을 완전히 개 취급하는 게 열이 받았다.
나루의 표정이 일그러지기 시작하자, 범현이 같잖다는 듯 손목을 꽉 쥐었다.
탁!
나루가 잡힌 손목을 거세게 쳐냈다. 다친 손바닥도 치료받았겠다, 이제 무서울 게 없었다.
여태 입을 다물고 시키는 대로 움직이던 나루가 소리를 내질렀다. 잠겨 있던 목소리가 터져 나오며 평소보다 거친 소리가 났다.
“교육 안 받아! 나 이제 거기서 노예처럼 안 살 거야. 여기서, 여기서 사람처럼 살 거라고!”
당찬 외침이었으나 설움이 섞여 있었다. 범현은 이를 악문 채 나루의 턱을 아프게 쥐었다.
집착 어린 눈빛이 온전히 나루에게 닿았다. 범현은 서늘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새 다른 새끼 손을 탔구나.”
“…….”
“왜 자꾸 버릇없이 개소리를 지껄이나, 했는데. 어떤 새끼가 널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놨을까. 궁금하네.”
충격받을 만한 말을 했는데도 범현은 아무런 타격을 입지 않았다. 오히려 누가 나루를 이 지경까지 망쳐 놓은 건지 궁금해했다.
나루는 급히 입을 다물었다. 혹시라도 규연에게 피해가 갈까 봐 쉬이 말을 꺼내지 못했다.
나루의 약은 행동에 열 받은 범현이 잘 됐다며 꼬투리를 잡았다.
“누구인지 말 안 해?”
“…….”
“나루야.”
억지로 눈을 마주친 범현이 나루의 뺨에 손을 올려놓았다.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해 큼지막한 손이 내쳐졌다.
일부러 닿아오는 손을 내친 나루가 범현을 대차게 노려봤다. 진심으로 증오하고 있다는 눈빛이었다.
애써 참고 있는데 나루가 신경을 거스르자 성질을 누르지 못한 범현이 다시 한번 목을 졸랐다.
“간덩이가 부었지. 네가 감히 내 손을 뿌리쳐?”
“끄으, 윽.”
핏줄 선 눈이 두려웠다. 진심을 담아 화를 내는 범현의 모습에 굳어 버린 나루는 저도 모르게 무릎을 꿇을 뻔했다.
슬며시 접히던 무릎이 중간에 멈췄다. 나루는 이성을 되찾고 굴복하지 않기 위해 다리를 똑바로 폈다.
그 행동에 버튼이 눌린 범현이 나루의 어깨를 힘으로 짓눌렀다.
“그대로 꿇어야지 뭐 하는 거야, 송나루.”
짓누르는 힘을 당해내지 못한 나루가 바닥에 쓰러졌다. 범현은 그런 나루를 가만히 쳐다봤다. 스스로 무릎을 꿇길 기다리는 거였다.
잠시 엎어져 있던 나루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범현을 노려봤다.
“절대, 그럴 일 없어. 이제 안 꿇어.”
“하…….”
어떤 새끼인지. 애를 제대로 버려 놨네.
중얼거리듯 혼잣말을 읊던 범현이 나루를 마주 보고 충고했다. 장난으로 하는 말이 아니었다.
“여기 있는 동안 다른 새끼한테 마음을 준 모양인데…….”
“…….”
“좋은 말로 할 때 포기해.”
사람 하나 죽일 듯한 목소리와 표정이었다. 나루는 싫다며 본능적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로써 나루에게 중요한 사람이 생겼다는 게 확실해졌다.
범현의 얼굴이 전과 상반되게 바뀌었다. 조금의 다정함이 섞여 있었는데, 이제는 그마저도 사라져 버렸다.
규연이한테 연락을 하면 안 됐던 걸까. 만약, 규연이가 날 찾으러 왔다가 최범현을 마주치면 어쩌지.
규연이가 위험해질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하니 가슴이 쿵쿵 뛰었다. 범현을 처음 마주쳤을 때와 같이 식은땀이 삐질 흘렀다.
범현은 나루를 대놓고 시험했다.
“그 새끼가 네 앞에서 처참히 죽게 될지도 모르는데, 끝까지 고집부릴 생각은 아니겠지.”
규연이가 내 앞에서 처참히 죽게 될지도 모른다…….
나루의 눈시울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이제 막 세상에 적응하고, 노력하면서 행복해지려던 참이었는데…….
신은 꼭 중요한 순간에 나타나 훼방을 놓았다.
그러나, 나루는 소중히 얻은 새 삶을 이대로 놓칠 생각이 없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