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4화 (94/130)


털썩! 쾅!

나루의 몸이 어두컴컴한 지하실에 처박혔다. 간혹 들어가던 벌 받는 방이 아니었다.

범현은 느긋하게 스트레칭이라도 하듯 목을 돌렸다. 뚜둑, 뚝, 하는 뼈 소리가 들릴 때마다 나루의 어깨가 떨렸다.

“기어코 지하실 문을 열게 만들지.”

“여, 여기 싫어요, 잘못했어요, 자, 잘못했어요.”

“잘못했어?”

“네, 네, 잘못했어요, 흐으, 윽.”

나루의 팔을 침대에 묶던 범현이 대뜸 목을 졸랐다. 얇고 가냘픈 목은 범현의 손아귀 안에 손쉽게 들어왔다.

“잘못한 걸 알면 기어야지. 내가 그렇게 가르쳤니.”

“아, 흐윽, 으, 아, 니요.”

“우리 나루가 예쁨 좀 받더니 눈에 뵈는 게 없나 봐. 응? 아가.”

강압적이면서 다정한 말투가 무서웠다. 당장 맞을까 두려워 고개를 내젓던 나루는 속으로 몰래 도망칠 궁리를 했다.

이런 곳에서 도저히 살아갈 수 없었다. 멀쩡한 줄 알았던 범현은 사람을 아무렇지 않게 죽이는 사이코패스였고, 지하실에 자신을 가두기까지 했다.

나루의 시선이 문으로 향하자, 범현이 축 가라앉아 있던 흰 꼬리를 거칠게 잡아당겼다.

“아악!”

“어딜 보는 거야, 지금.”

“으, 흐끅, 놔, 놔주세요, 놔!”

“…안 되겠네.”

낮게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끝으로 무자비한 폭력이 이어졌다. 나루는 침대에 묶인 채 날아드는 매질을 모두 감당해내야만 했다.

온몸이 울긋불긋해지고, 볼기짝은 빨갛게 부어올라 쫙쫙 그인 상처가 남았다.

나루는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울기만 했다. 눈물 콧물을 몇 시간 내내 뽑았는데도 계속 뜨거운 물줄기가 흘렀다.

“흐어, 흐끅, 흐, 나갈래, 살려, 살려줘, 주인, 으윽, 주인 아니야.”

처음 지하실에 갇히게 된 나루는 며칠 밤을 지새우며 울부짖었다. 그 앞에 다리를 꼬고 앉은 범현은 나루의 우는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그칠 때까지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더 맞기 싫으면 눈물 그쳐.”

“흐으, 끅, 허으, 내보내, 내보내 주세요, 주인, 흐, 싫어, 싫어…….”

충격이 컸던 걸까. 나루의 상태가 생각보다 좋지 않았다. 보다 못한 범현은 그런 나루를 위해 출처 모를 주사기를 팔에 꽂아 넣었다.

따끔한 느낌과 함께 투명한 액체가 주입됐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나루의 울음소리가 잦아들었다.

범현은 힘없이 늘어진 나루의 몸을 품에 껴안고 침대에 눕혀 주었다. 운 탓에 숨이 헐떡여 나루의 가슴이 가쁘게 들썩였다.

“으. 으윽, 끄, 흐…….”

“얌전히 있으니 얼마나 예뻐.”

몇 대씩 맞아 부어오른 나루의 뺨을 조심스레 쓰다듬어 준 범현이 지하실을 벗어났다.

지하실에 한 번 들어온 후로는 같은 일이 계속 반복됐다.

도망을 시도하다 붙잡혀 와서 맞고, 울다 지쳐 주삿바늘을 꽂은 채 몽롱한 상태에서 잠들고, 다음 날이면 이상하게 온순해져서 범현이 올 때까지 무릎을 꿇고 기다렸다.

그러다 또다시 정신이 돌아오면 도망을 시도하고…….

쳇바퀴 같은 삶을 반복하다 보니,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나루는 성인이 되어서도 정상적으로 살지 못했다.

오히려 20살이 되고 나니 정도가 심해졌다. 반항을 심하게 할수록 날아드는 손길이 더 매서워졌다.

하지만 도망치는 걸 멈추지는 않았다. 어서 이 지옥에서 빠져나오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나루는 기적을 일으켰다.

차원 이동구로 인해 드디어, 지옥이 아닌 천국에 발을 들인 것이다.

* * *

슬며시 눈을 뜬 나루는 오랜만의 악몽에 괴로워하며 입을 틀어막았다. 억지로 잠을 청했더니, 기어코 악몽을 꾸고 말았다.

지잉.

화장실로 달려가 헛구역질만 반복하던 나루가 짧게 울리는 핸드폰을 확인했다.

[어디 아픈 건 아니지? 자고 일어나면 연락해 줘.]

규연의 메시지였다. 나루는 화장실 앞에 쪼그려 앉아 눈물을 훌쩍였다. 아직 꿈속에서 완전히 빠져나오지 못해 감정이 격했다.

규연이 보고 싶다.

훌쩍이던 나루가 규연의 얼굴을 떠올렸다. 까칠해 보여도 제게는 잘 웃어 주는 모습이 특히 다정했다.

강압적인 범현과 달리 규연은 부드러웠고, 나루를 사람으로 대해 줬다.

범현과 지냈던 시절이 꿈에 나와서 그런가. 규연의 옆에 평생 있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가만히 앉아 놀란 속을 진정시킨 나루는 뒤늦게 핸드폰을 들어 답장을 전송했다.

[나 안 아파. 그냥 졸렸어. 이제 일어나서 밥 먹을 거야.]

보내자마자 말풍선 옆의 숫자가 사라졌다. 규연은 잘 챙겨 먹으라며 나루를 걱정했다.

정신이 완전히 깨고 나니 허기가 졌다. 나루는 그제야 자신이 길가에 햄버거를 버려두고 왔다는 걸 알아챘다.

“내 햄버거…….”

집에 남아있는 음식은 하나도 없었다. 규연이 만들어 둔 건 나루가 일찍이 다 먹었고, 매일 배달된 음식들은 딱 1인분 양이라 한 번 먹고 치웠기 때문이다.

덜컥.

현관문을 연 나루는 복도에 쌓인 배달용 상자를 확인했다. 아까 도착한 음식이 녹은 얼음팩과 함께 섞여 있었다.

퀴퀴한 냄새가 나서 도로 상자를 닫아 놓은 나루는 허무한 얼굴로 들어왔다.

배는 고픈데, 먹을 게 없다니 서러웠다. 거실 커튼을 쳐서 밖을 바라보던 나루는 수상한 사람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겉옷을 챙겨 입었다.

한 손에는 규연이 쓰라고 준 카드가 들려 있었다. 핸드폰까지 야무지게 챙긴 나루는 현관문을 열고 나와 엘리베이터를 잡았다.

새벽 세 시. 야심한 시각이었지만, 잠깐 편의점에 다녀오는 것쯤은 괜찮을 듯했다.

아까 집에 오면서 범현과 비슷한 사람을 보긴 했으나 이곳까지 찾아낼 리가 없었다. 게다가 시간도 시간이니 마주칠 가능성이 희박할 것이다.

<1층입니다. 문이 열립니다.>

안내음과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나루는 규연에게 편의점에 다녀오겠다는 메시지를 전송해놓고, 공동현관을 나섰다.

늦가을이 지나고 초겨울이 다가오는 시기. 새벽 바람이 유독 시렸다.

나루는 주변을 최대한 경계하며 근처 편의점까지 뛰어가듯 걸었다.

딸랑.

다행히 편의점에 도착하는 동안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나루는 바구니를 들고 며칠 동안 간식으로 먹을 음식들을 마구 쓸어 담았다.

간단히 먹을 도시락과 음료수, 핫바, 과자 몇 개와 푸딩까지 담으니 바구니가 꽉 찼다.

“5만 3천 원입니다.”

“여기요.”

규연의 카드를 내민 나루가 결제를 마친 후, 가득 찬 비닐봉지를 손목에 걸었다.

문을 닫고 나왔을 땐 바람이 더 서늘해져 있었다. 나루는 겉옷을 더 여미며 어깨를 웅크렸다.

와중에 핸드폰을 꺼내 비닐봉지 안을 사진으로 남겼다. 방금 막 찍힌 사진은 규연에게 전송됐다.

이제 들어간다는 말도 남겨 줘야지.

입꼬리를 살며시 올린 나루가 핸드폰 화면을 터치하며 걸었다.

그때였다.

“허읍……!”

누군가가 나루의 입을 틀어막고, 몸을 강제로 끌어당겼다. 덕분에 아직 다 완성되지 못한 문장이 규연에게 전송됐다.

[나 이거 샀어. 이제 들어가렵ㅈㅇㅌㅇ]

잠시 사라지지 않고 있던 숫자 1이 단번에 사라졌다.

그리고 나루도, 어두컴컴한 골목길로 사라져 버렸다.

큼지막한 손이 코와 입을 단단히 틀어막았다. 다른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악을 써 봤지만 소용없었다. 아무리 발악해도 막힌 소리만이 입 안에 울렸다.

나루는 포기하지 않고 발버둥을 쳤다. 그러던 중, 정체를 밝히지 않던 남자가 처음으로 말을 꺼냈다.

“으웁, 윽!”

“쉿.”

“…….”

“옳지. 계속 입 다물고 있어, 아가.”

최범현.

최범현이다. 이 목소리는 최범현이었다.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소름이 쫙 돋았다. 더 무서운 건, 입 다물고 있으라는 그의 말에 몸이 세뇌당한 듯 굳어 버렸다는 거였다.

나루는 뒤돌아보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행동이었는데도 목이 부르르, 떨렸다.

“으윽!”

순간, 범현이 나루의 머리채를 잡아끌었다. 고개가 꺾인 나루는 눈을 질끈 감고 다리를 벌벌 떨었다.

오랜만에 느껴 보는 손길이었다. 거칠고, 투박한 손길. 아니, 사실상 이건 폭력이었다.

나루가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자, 머리카락을 꽉 쥐고 있던 손에 힘이 조금 풀렸다.

“드디어 잡았네. 설마 했는데, 상상도 못 할 짓을 벌였어. 나루야.”

“흐우, 읍…….”

“다물어.”

살벌한 말에 겁먹은 나루가 숨까지 참았다. 뜨거운 숨결이 전해지지 않자, 그제야 만족한 범현이 성질을 누그러뜨렸다.

범현은 나루가 스스로 입 다물고 있도록 시간을 주었다. 그렇게 5분 정도가 지났다.

입을 틀어막고 있던 손이 서서히 떼어졌다. 동시에 나루의 몸이 돌아갔다.

나루는 반강제적으로 범현을 쳐다봐야만 했다. 정면을 마주하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날카롭고 묵직한 인상, 언제 봐도 섬뜩한 눈동자.

소리를 내지르려던 나루의 입이 저절로 다물렸다. 범현의 얼굴을 보니 사고회로가 굳어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었다.

범현은 나루의 몸을 벽으로 밀어붙이며 압박을 가했다. 맥없이 벽에 처박힌 나루는 떨리는 동공으로 범현을 응시했다.

“왜, 어떠, 어떻게 여기에…….”

보고 있으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차원을 넘어왔는데, 범현이 여기까지 쫓아온 게 소름 돋았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범현이 자상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나루야, 아가, 내가 널 찾으려고 말도 안 되는 짓까지 벌였어.”

“…….”

“밤낮으로 사람들을 풀고, CCTV 뒤져서 네 행방을 쫓았거든.”

톤 자체는 나긋하고 일정했으나, 내뱉어지는 말이 무서웠다. 범현은 제 수고를 일일이 입으로 설명해 주었다.

CCTV로 행방을 쫓고, 갑자기 사라진 나루를 보고 조사를 시작했다고 한다.

미친 수준의 집착이었다. 두려움을 느낀 나루가 한 걸음 물러서자, 틈을 좁힌 범현이 귓가에 속삭였다.

“차원 이동이라.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

“…….”

“그런데 네가 사라졌던 자리에 이상한 틈이 하나 보이더라고.”

나루의 눈에 큰 원으로 보이던 이동구였는데, 범현이 발견했을 땐 작은 틈새로 줄어 있었나 보다.

점점 심리를 압박해오는 말투에 침도 삼키지 못할 정도로 긴장한 나루가 몸을 빳빳하게 굳혔다.

범현은 그런 나루를 보며 가소롭다는 듯 비웃고, 마지막 남은 말을 이었다.

“그래서 그 틈새를 찢어발겼어. 널 어떻게든 찾아내려고.”

“…….”

“이번엔 잘 숨었네. 나루야, 어때. 바깥 생활은 즐거웠어?”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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