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 피하지 마.”
“으…….”
“무릎 꿇고, 예쁘게 올려다봐야지.”
나루가 이곳에서 처음 배운 건 올려다보는 법이었다. 범현을 볼 땐 무릎을 꿇고, 시선을 피하지 않는다. 여러 번 중얼거리며 외우던 나루는 범현의 지시에 따라 눈동자를 올렸다.
말을 잘 들으면 자연스레 보상이 따랐다. 범현은 나루가 잘 먹던 과자 하나를 손에 쥐여 주곤 했다.
찹찹찹.
부스러기가 떨어지고, 입 주변이 더러워졌다. 나루는 손바닥에 묻은 가루까지 허겁지겁 먹어 치웠다.
식사 예절이 엉망이었으나, 범현은 굳이 하나씩 가르치지 않았다. 그의 목표는 나루를 사람으로서 키우는 게 아니었다. 그저 저만 바라보는 개로 키우고 싶어 했다.
개에게는 사람다운 교육이 필요하지 않았다. 어릴 때 데려와서 그런지, 나루가 딱히 반항하지 않아서 편했다.
경계가 완전히 풀린 후, 나루는 범현을 제 주인으로 인식했다. 세뇌당한 것도 있었지만, 친절히 잘 대해 줘서 스스로 받아들인 게 더 컸다.
주인은 나를 해치지 않아. 착한 사람.
나루 나이 13살. 이때까지만 해도 범현은 강압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한 사건으로 인해 나루는 범현의 본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범현은 언제나 나루에게 창문밖을 보지 말라고 했고, 현관문 근처에는 가지도 못하게 했다.
나루는 그 이유를 몰랐다. 범현의 말로는 위험하다고 하는데, 며칠 경계해 본 결과 그리 위험한 것 같지도 않았다.
집에만 계속 박혀 있었더니 답답하기도 해서, 나루는 현관문을 열어 보기로 마음먹었다.
이 정도는 괜찮을 거야.
마침 범현이 일을 나갔을 때였다. 나루는 슬쩍 현관문을 열어 밖을 내다보았다.
깔끔한 복도와 엘리베이터가 보였다. 끌려 올 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니 호기심이 일었다.
발이 저절로 움직였다. 도망가야겠다는 생각을 한 건 아니었다. 그냥, 복도의 대리석 바닥이 신기해서, 꼭 닫혀 있는 엘리베이터가 신기해서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한 걸음을 내밀었을 때였다. 갑자기 뒷덜미가 확 잡히더니 목이 졸렸다.
“흐엑, 켁!”
“어딜 기어나가.”
“케, 켁! 크윽!”
“정신이 나갔지, 네가.”
무뚝뚝하지만 자상하던 목소리가 무서울 정도로 가라앉아 있었다. 나루가 괴로워하며 졸린 목을 붙잡았지만, 범현은 뒷덜미를 놓아주지 않았다.
나루는 범현의 손에 질질 끌려 들어왔다. 몸이 차가운 바닥에 쓸릴 때마다 소름이 돋았다.
“현관문 가까이 가지 말라고 분명 경고했을 텐데.”
“그, 그게, 바닥이 궁금해서, 바닥이랑, 이상한 문이…….”
“입 다물어. 버릇없이 말대답하면 어떻게 된다고 했지.”
“버, 벌을 받는, 받는다고…….”
“들어가.”
범현의 턱짓에 잔뜩 겁먹은 나루가 후들거리며 방으로 향했다. 늘 범현과 함께 잠들던 안방이었다.
또 다시 뒷덜미가 잡혔다. 범현은 나루를 멋대로 잡아끌어 가장 구석에 있는 방으로 데려갔다.
“벌 받을 땐 여기로.”
“버, 벌 받기 싫어, 죄송해요, 무, 무서워요.”
“시끄럽게 짖지 말고, 대답해.”
“네, 네…….”
철컥.
나루가 대답하는 순간 문이 닫혔다. 굳게 닫힌 문은 어떻게 해도 열리지 않았다.
이후, 나루는 끔찍한 벌을 받았다. 범현이 눈을 가리고 어딘가에 묶어 둔 후, 알 수 없는 도구로 엉덩이를 내리쳤다. 울며불며 빌어도 거친 손길은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두 시간 내내 얻어맞기만 했다. 채찍 같기도 한 게 처음 맞았을 땐 그리 아프지 않았지만, 점점 때리는 횟수와 강도가 심해지니 맞닿을 때마다 살이 쓰라렸다.
“흐끅, 흐, 허으, 흡.”
“또 밖으로 나갈 거니.”
“흐으, 아, 아니요. 아니요. 안 나가요.”
“착하지, 약 바르게 이리 엎드려.”
벌을 받은 후에는 범현이 정성스레 약을 발라 줬다. 매섭게 채찍을 내리칠 땐 언제고, 약을 발라주는 손길이 다정해서 눈물이 나왔다.
나루는 생각했다. 내가 잘못해서 혼난 거야. 나가지 말라고 했는데, 내가 멋대로 어기고 나가서 어쩔 수 없이 주인이 나를 혼낸 거야.
이 일이 있고, 나루는 범현의 앞에 서면 긴장을 했다. 그래도 지나치게 무서워하지는 않았다.
“과자 먹고 싶어요…….”
“그건 밥부터 먹은 후에.”
“못 먹겠으면 어떡해요?”
“이리 앉아. 먹여 줄게.”
범현은 참 이상했다. 무서운 것 같다가도, 지나치게 다정해서 나루를 방심시켰다.
밥을 영 못 먹으면 직접 제 무릎에 앉혀 떠먹여 줬고, 입까지 손수 닦아 줬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잘 때는 옆에 두고 머리카락을 천천히 쓰다듬어 줬다. 안아달라고 투정을 부리면 품에 안아 등을 토닥여 주기도 했다.
범현은 자라고 있는 나루를 생각해 영양가 있는 식단을 짜 먹였고, 성장통을 겪어 힘들어할 땐 다리를 주물러 주며 아픔을 잊게 해주었다.
나루는 이런 관심이 좋았다. 범현이 하지 말라는 짓만 안 하면, 마음껏 사랑받을 수 있었다. 범현은 정말 좋은 사람이었다.
그렇게 다정과 잔인함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오가며 사랑받을 때 즈음. 나루의 나이가 17살이 되었다.
이 무렵, 범현은 뭐가 그리 바쁜지 집에도 잘 들어오지 않았다. 나루는 현관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온종일 범현을 기다렸다.
사실 이것 말고는 딱히 할 일이 없기도 했다. 범현은 TV도 못 켜게 했고, 창문으로 세상을 구경하는 것도 금지했다.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의미 없이 방 안을 돌아다니는 게 전부였다.
하루는 범현이 늦은 시각까지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새벽 한 시가 넘도록 무릎을 꿇고 있던 나루는 저리다 못해 감각이 사라진 다리를 두드리며 범현을 그리워했다.
원래 이쯤에는 꼭 돌아오시는데. 이상하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나루는 우물쭈물하며 신발장에 발을 들였다.
쿵. 쿵. 쿵.
심장이 크게 뛰었다. 어릴 적 혼난 후로 이 근처로 오는 게 처음이었다.
나루는 범현을 찾으러 가기 위해 현관문을 슬쩍 열었다. 신발장 구석에는 범현이 설치해 놓은 CCTV가 있었다.
늘 빨간불이 들어와 있었는데, 이게 무슨 타이밍인지 오늘만큼은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철…컥.
또다시 현관문이 열렸다. 나루는 맨발로 후다닥, 뛰어나와 비상구를 내려왔다.
공기가 탁 트였다. 바깥에서 들이마시는 산소는 집 안의 것과 확연히 달랐다.
지하까지 쭉 내달리니 회색 철문이 하나 보였다. 나루는 차가운 쇠 문고리를 조심스레 돌렸다.
끼이익.
소름 돋는 소리와 함께 철문이 열렸다. 바로 바깥이 보일 줄 알았는데, 나루의 예상과 달리 빼곡이 들어선 차들이 보였다.
숨을 내쉴 때마다 이상하게 공기가 울렸다. 지하 주차장이라 작은 소리도 크게 울려 가슴이 쫄렸다.
나루는 범현을 찾느라 정신이 없었다. 고개를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는데, 어디선가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투둑, 쿵!
저도 모르게 위기를 감지한 나루가 커다란 트럭 뒤에 몸을 숨겼다. 소리가 난 쪽을 향해 고개를 뻗어 보니 남자 여럿이 모여 있었다.
모두 검은 정장을 입고 있는 게 기괴했다. 혼란스러운 눈동자로 남자들을 훑던 나루는 그 사이에서 범현을 발견했다.
우뚝 솟은 키와 잘난 얼굴, 그리고 범현 특유의 위압감이 나루가 있는 곳까지 느껴졌다.
저기서 뭘 하고 계신 거지.
호기심에 눈을 깜빡이던 나루가 까치발을 든 채 남자들 사이를 훔쳐봤다.
“흐, 흐업……!”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훔쳐보지 말고 얌전히 집으로 들어갔어야 했다.
나루의 시야에 끔찍한 장면이 들어찼다.
범현의 큼직한 손아귀에 한 남자의 목이 쥐어져 있었다. 정신이 나간 듯 눈알이 뒤집힌 남자는 피떡이 되어 있었는데, 그 모습이 귀신 같아서 무서웠다.
하지만 더 무서운 건 따로 있었다. 범현은 남자의 목을 사정없이 꺾으며, 나루와 눈을 마주쳤다. 우연이 아니었다.
서늘하고 섬뜩한 시선이 나루에게 끈덕지게 머물렀다. 그 자리에서 굳어 버린 나루는 손만 덜덜 떨 뿐, 움직이지 못했다.
저 남자는 내 주인이 아니야. 주인은 저런 짓 안 해. 착한, 사람이야…….
아무리 부정해 봐도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범현은 굳어 있는 나루를 집어삼키듯 노려보며 남자의 목을 끝까지 꺾었다.
타다닷!
범현의 오른쪽 뺨에 남자가 토해낸 피가 튀었다. 나루는 순간 정신을 차리고 냅다 발을 구르기 시작했다.
맨발이 찬 바닥과 먼지에 닿아 엉망이 되었다. 하지만 이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타다다닷!
나루의 발소리가 주차장에 울렸다. 그리고 잠시 후, 여유로운 구둣발 소리가 따라붙었다.
탁. 탁. 탁.
열심히 뛰고 있는데 이상하게 간격이 계속 좁혀졌다.
두려움에 떨며 달리던 나루는 막다른 길을 마주한 채 울음을 터뜨렸다.
“흐, 흐으, 살려주세요…….”
“여기까지 잘도 기어 나왔네.”
“주, 주인 아니야, 살려주세요, 사, 살려, 흐악!”
어느새 뒤따라온 범현이 나루의 머리채를 우악스럽게 잡아챘다. 힘이 잔뜩 들어가 있어서 두피가 뜯겨 나갈 것 같았다.
나루는 아픔 따위 잊은 채 두 손을 싹싹 비볐다. 살려달라는 말만 반복하자, 조용히 헛웃음을 흘린 범현이 나루의 뺨을 툭툭, 내리쳤다.
“나루야.”
“흐, 살려, 살려주…….”
“나루야.”
“네, 흐으, 네, 네.”
범현의 목소리 톤이 평소와 같았다. 일정하고, 무뚝뚝하고, 어딘가 다정한 말투.
겁먹고 움츠러든 나루는 범현이 평소와 같다는 걸 눈치채고 재빨리 대답했다. 어쩌면 덜 혼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지배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처참했다.
“들어가.”
딱 세 글자였다. 범현은 세 글자만으로 나루를 완벽히 통제할 수 있었다.
패닉이 온 나루가 몸을 삐걱대며 어찌할 줄 모르자 범현이 다른 쪽 뺨을 툭, 쳤다.
“들어가.”
“…흐, 흐끅.”
“두 번 말했어. 아가, 왜 말을 안 들어 처먹어. 피 보고 싶지 않으면 얌전히 뒤돌아.”
나루의 눈앞이 어지러웠다. 왼쪽은 길이 뻥 뚫려 있었고, 앞은 범현이 막고 있었고, 마지막 오른쪽은 집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었다.
떨리는 동공으로 범현의 얼굴을 바라보던 나루가 몸을 슬쩍 움직였다. 피에 얼룩진 얼굴은 치명적일 정도로 잘생겼지만, 그와 반대로 공포스러웠다.
도망가고 싶다.
이날, 나루는 처음으로 도망가고 싶다는 마음을 품었다.
그리고, 곧장 실천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