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2화 (92/130)


복잡스럽던 하루가 지나갔다. 일부러 늦게까지 남아 일을 도우려던 나루는 서연의 만류에 앞치마를 풀었다.

그래도 오후 시간이 지나고 나니 카페 안이 한적해졌다. 서연은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베레모를 고쳐 썼다.

“나루 씨, 얼른 가요.”

“정말 안 도와드려도…….”

“이제 한적해서 괜찮아요!”

힘차게 대답해 준 서연이 나루의 등을 떠밀었다. 그러다가 무언가를 발견하고 ‘어?’하며 의아한 소리를 냈다.

건후에게 인사를 건네고 집으로 가려던 나루가 서연의 목소리에 빙글 뒤돌아섰다.

“나루 씨, 베레모에 크림이 묻었나 봐요. 더러워졌다.”

“어…….”

“그냥 가져가서 가볍게 세탁해 오는 게 좋겠어요.”

“그럴게요.”

나루의 유니폼 베레모에 짙은 크림이 묻어 있었다. 눈에 띌 정도라 세탁하는 게 좋을 듯했다.

서연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인 나루가 베레모를 손에 챙겨 들었다.

집에 돌아가면 베레모부터 빨고, 밥 먹고, 씻어야겠다. 머리로 간단히 계획을 세운 나루는 이만 가보겠다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럼, 가볼게요!”

“잘 가요, 나루 씨.”

“잘 가, 송나루.”

서연 다음으로 건후가 손을 흔들었다. 행사장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나루에게 미안했는지 은근 대하는 게 어색했지만, 그래도 불편하지 않도록 해주는 게 고마웠다.

나루는 똑같이 손을 흔들어 주고 가게를 나섰다.

아침까지만 해도 하늘이 맑았는데, 저녁이 될수록 먹구름이 밀려들어 우중충했다.

지잉. 지잉.

그래도 기분은 꽤 괜찮았다. 퇴근도 무사히 했고, 마침 타이밍 좋게 규연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기 때문이었다.

나루는 바로 전화를 받았다. 웬일로 전화가 오지 않아 살짝 서운했는데, 진동음 한 번에 그런 마음들이 씻겨 내려갔다.

-송나루, 집 가고 있어?

“응, 규연이 너는?”

-나도 이제 호텔 들어가야지.

“그 카페에 있었어?”

-어, 뭐. 그랬어.

아무 의미 없이 물어본 건데, 규연이 흘리듯 대답했다. 잠시 의심이 들었지만, 나루는 신경 쓰지 않고 오늘 있었던 일을 천천히 말해 줬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늘 멀게 느껴졌지만, 규연과 전화를 하면 눈 깜짝할 사이에 도착할 수 있었다.

-걸어가지 말라니까.

“아니야, 버스 기다리는 중이야.”

-거짓말한다, 또.

“거짓말 아니야. 버스 5분 후야.”

익숙하게 거짓말을 한 나루가 집 방향으로 열심히 걷기 시작했다. 규연과 전화를 더 오래 하고 싶어서 일부러 돌아가는 길을 택하기까지 했다.

걸어가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해 준 규연이 대화 주제를 다르게 돌렸다. 덕분에 나루의 마음이 편해졌다.

-삼 일만 버티면 볼 수 있네.

“응, 그래도 시간 금방 갔어.”

-나는 금방 안 갔어.

“…….”

-보고 싶은데, 하루 일찍 갈까.

달콤한 말에 나루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속으로는 어서 달려오라고 닦달을 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겉을 애써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대답했다.

“그래도 되는 거면…….”

-잘하면 될 것 같아.

그럼 뭘 물어, 그냥 빨리 와. 유규연.

본성이 튀어나올 뻔해서 입을 급히 틀어막았다. 나루는 핸드폰을 멀리 떨어뜨린 후, 눈을 질끈 감았다.

보채지 말자. 보채지 말자.

마음을 다스리고 다시 핸드폰을 귓가에 가져다 대자 규연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왜, 왜 웃어.”

-너 눈 감는 게 웃겨서.

“뭐야, 어떻게 알아. 무서워.”

주변을 둘러보던 나루가 미간을 좁혔다. 분명 그 어디에도 규연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데, 눈을 감고 있는 걸 귀신같이 알아챈 게 무서웠다.

규연은 대답하지 않는 나루가 궁금해서 중간에 영상통화 모드로 전환했다. 혼자 부끄러워하는 걸 계속 지켜보고 있었는데, 정작 나루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게 깜찍해서 웃음이 절로 나왔다.

-화면 봐.

“아, 이 씨…….”

-이 씨?

“씨, 발, 놀랐잖아.”

-저 욕 진짜, 미치겠다…….

뒤늦게 화면을 확인한 나루가 조용히 욕을 읊었다. 규연은 못 말리겠다는 듯 웃다가 이마를 짚었다.

인상을 구기던 나루는 화면 속 규연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놀란 걸 떠나서, 오랜만에 규연의 얼굴을 보니 마냥 좋았다.

-왜 그렇게 웃어.

“그냥, 좋아서.”

-앞 잘 보고 걸어. 넘어지겠네.

“그럼 네가 얼굴을 보여주지 말았어야지…….”

차분히 대꾸한 나루가 괘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규연은 두어 마디 더 하다가, 아쉬움을 뒤로하고 전화를 마무리했다.

나루의 뒤를 보니 대충 집 근처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나루가 영상통화에 정신이 팔려있어서 진짜 넘어지기라도 할 것 같았다.

-집 들어가서 밥 먹을 때 전화해.

“응. 안녕.”

전화를 끊은 나루가 핸드폰을 야무지게 챙겨 넣고, 집을 향해 걸었다. 집 앞 번화가라 그런지 사람이 많아 복잡했다.

오랜만에 주변 구경이나 하면서 걸어 볼까. 고된 일 끝에 여유를 찾은 나루가 번화가 사이를 천천히 지나쳤다.

들어갈 때 집 근처 패스트푸드점에서 햄버거랑 감자튀김 사 가야지.

오늘 저녁은 햄버거였다. 규연이 보내 준 음식이 있겠지만, 요즘 먹는 양이 늘어서 충분히 다 해치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애매한 시간이라 패스트푸드점에 사람이 몇 없었다. 빠르게 주문한 햄버거를 받은 나루는 손에 건 봉투를 달랑거리며 걸음을 서둘렀다.

“오늘은 돌아다니는 사람이 유독 많은…….”

투둑.

주변을 둘러보며 걷던 나루가 시야에 걸린 무언가를 보고 봉투를 툭, 떨어뜨렸다. 바스락거리는 비닐봉지 소리와 함께 포장된 햄버거가 아무렇게 나뒹굴었다.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친 나루는 눈을 한 번 비비고 다시 앞을 바라봤다.

“……!”

너무나도 익숙한 사람이었다. 나루는 황급히 뒤돌아서서 가빠지는 숨을 침착히 내쉬었다.

“저, 저, 사람이, 왜…….”

살짝 고개를 돌려 다시 그쪽을 쳐다보았으나, 남자는 어디로 사라지고 없었다. 그게 더 공포스러웠다.

남자는 누군가를 찾는 것처럼 주변을 정신없이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 집요한 눈빛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아니야. 아니겠지. 내가 잘못 본 거겠지.

나루의 몸이 조금씩 떨려왔다. 등골이 서늘해져서 한 걸음 내딛기도 힘든 수준이었다.

한 번 나간 정신은 제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남자의 모습이 뇌리에 박힌 것처럼 떠올라서 괴로웠다.

눈에 띌 정도로 큰 키, 근육질의 두터운 몸매, 살짝 태닝된 피부에 선이 짙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얼굴.

아니길 바랐지만, 확실했다. 수많은 사람 속에서 본 그 남자는 나루의 전 주인인 최범현이었다.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나루는 들고 있던 베레모를 머리에 푹 눌러쓴 채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내가 본 게 현실이 맞는 걸까.

다행히 집으로 오는 동안에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나루는 현관문을 닫자마자 잠금장치를 꼼꼼히 확인하고, 방에 들어가 이불을 덮어썼다.

규연에게 전화를 해야 하는데, 도저히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캄캄한 이불 속에 있으니 이전에 겪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굳이 떠올리고 싶지 않은 일들이었는데, 자꾸만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게 짜증 났다.

최범현. 전 주인. 나를 거두어 준 사람. 생명의 은인이지만, 내 인생을 가장 괴롭게 만들었던 사람.

눈을 꾹 감고, 귀를 틀어막아 봐도 범현의 모습이 떠올랐다.

위압감이 느껴지는 몸, 언제나 차갑고 냉정한 얼굴, 딱딱한 말투. 모든 게 규연과 정반대였다.

나루는 씻지도 못한 채 이불 속에 누워 잠을 청했다. 깨어 있으면 더 괴로울 거 같아 자기로 한 것이다.

규연에게는 너무 피곤해서 바로 자겠다는 메시지를 남겨 놓았다. 이유를 물어보는 답장이 바로 도착했지만, 나루는 그냥 일이 고되었다고 둘러대며 메시지를 마무리해 버렸다.

핸드폰을 멀리 던져두고 눈을 감으니 금세 잠이 밀려왔다. 나루는 최대한 몸을 웅크린 채 숨을 일정히 내뱉었다.

* * * 

시야가 흐렸다. 뜨거운 물줄기가 볼을 타고 흐르자, 눈앞이 뚜렷해졌다. 나루는 경계하듯 고개를 돌려가며 주변을 확인했다.

깔끔하고, 고급스럽고, 마음껏 뛰어놀아도 될 만큼 넓은 집이었다.

잠시 후, 복도에서부터 누군가의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고개를 든 나루는 저보다 키가 한참 큰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가족들이 도롯가에서 사고를 당한 후, 모르는 남자에게 잡혀 온 나루가 처음 범현에게 팔려 왔을 시점이었다.

처음 마주했던 범현은 꽤 자상해 보였다. 풍기는 분위기나 커다란 몸집이 무섭긴 했지만, 그리 과격한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나루가 거실 한가운데에 앉아 눈물을 흘리고 있자, 조심히 다가온 범현이 무릎을 굽혀 나루와 시선을 마주했다.

“왜 우니. 울지 말고.”

“어, 엄마…….”

“이런, 아직 어려서 그런가.”

초등학생보다 조금 더 어린 나이였을 거다. 나루는 어린 수인답게 눈물을 퐁퐁 흘리며 엄마를 찾아댔다. 큰 충격에 가족의 사고를 인정하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범현은 나루를 제 어깨에 걸치듯 안아 들고 욕실로 향했다. 당장 욕조에 얼굴이라도 처박을 것 같았는데, 예상과 달리 조심스러운 손짓으로 나루를 깨끗이 씻겨 주었다.

어리둥절하게 안겨 씻은 나루는 밖으로 나와 새 옷을 받아 입고, 밥까지 얻어먹었다.

나한테 왜 이런 대접을 해주는 거지.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는데, 범현이 나루의 심리를 알아채고 묵묵히 대답해 주었다.

“내가 널 샀으니 이 정도 대우는 해 줘야지.”

“사요……?”

“익숙해지는 게 좋을 거야.”

무심하고 딱딱한 말투였으나 어딘가 다정했다. 나루는 간단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조차 하지 않았다.

범현은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대신, 어리다는 말 따위를 중얼거렸다.

내일이면 저 사람이 나를 잡아먹을 거야.

밥을 절반 이상 남긴 나루가 곧장 구석으로 달려가 몸을 숨겼다. 자꾸 어리다, 어리다, 하는 게 두려웠다. 범현이라면 자신을 한입에 집어삼킬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첫날, 범현은 경계하는 나루를 억지로 건드리지 않았다. 그냥 무심한 시선만을 던지며 제 할 일을 했다.

구석에 자리를 틀고 앉아 범현의 동선을 끈질기게 좇던 나루는 정확히 이틀 만에 경계를 풀었다.

범현에게 팔려 온 지 3일째. 경계하느라 꽁꽁 숨겨 두었던 나루의 귀와 꼬리가 무방비하게 튀어나왔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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