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얼른 가!”
“하여튼 쟤는 꼭 이럴 때 나타나서.”
“잘 다녀와. 연락할게!”
부끄러운 장면을 들켜 민망해진 나루가 차에서 잽싸게 내렸다. 규연은 서연을 못마땅하게 쳐다보며 대놓고 불쾌하다는 티를 냈다.
조수석 창문을 연 규연은 나루를 향해 손을 까딱였다. 할 말이 남은 듯했다.
서연의 눈치를 살피던 나루가 조심스레 다가오자, 규연이 제 지갑에서 카드 하나를 꺼내 건넸다.
“이걸로 먹고 싶은 거 사 먹어.”
“저번에도 카드 줬었는데…….”
“그래도 가지고 있어.”
얼떨결에 카드를 받은 나루가 규연을 향해 손을 흔들어 줬다. 이제 진짜 가야 할 시간이었다.
“나 갈게.”
가까이 다가온 나루의 목을 확 잡아끌어 입 맞춘 규연이 능글맞게 웃으며 조수석 창문을 닫았다. 서연 따위 안중에도 없다는 태도였다.
잠시 후, 규연의 차가 도롯가로 들어서더니 멀어졌다.
“와, 사장님 대박. 이제 제가 보는 건 아무렇지도 않은가 봐요.”
“으, 으음…….”
서연이 나루의 어깨를 장난스럽게 치며 호들갑을 떨었다. 두 사람의 스킨십 장면을 눈앞에서 목격한 게 재미있었던 모양이다.
나루는 그런 반응에 적응하지 못한 채, 어색하게 웃었다. 그래도 서연이 편견 없이 대해 줘서 다행이었다.
“부럽다, 나루 씨. 사장님이 카드도 막 턱턱 주고. 대박이에요 진짜.”
“아니에요…….”
민망한데 기분은 또 좋고, 이상했다. 나루가 부끄러워하자 일부러 더 놀려 준 서연이 자연스레 발맞춰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딸랑, 가게 문이 열렸다. 먼저 출근해 있던 건후와 파티시에들이 나루를 향해 힘찬 인사를 건넸다.
“나루 씨, 서연 씨, 좋은 아침!”
“좋은 아침입니다……!”
이제부터 진짜 규연 없는 일주일 시작이었다.
* * *
나루의 일상은 사흘 동안 문제없이 흘러갔다. 아침에 일어나면 규연에게 잘 잤냐는 메시지를 보내고, 가게에 도착하면 사진을 찍어 전송했다.
점심에는 뭘 먹었는지 말해 주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전화도 여러 번 했다.
혼자 지내는 건 생각보다 외로우면서도 편했다.
일단, 규연이 시간에 딱딱 맞춰 배달 음식을 보내 주거나, 냉장고에 있는 반찬을 데워 먹으라고 일러 줘서 삼시세끼를 든든하게 챙길 수 있었다.
심지어 밥을 먹을 땐 적적하지 말라고 전화로 말동무도 해 줬다. 지극정성이었다.
오늘도 아침 일찍 출근한 나루는 규연에게 습관처럼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은 두 번도 가지 않아 끊겼다.
-어, 나루야.
“나 이제 출근해.”
-버스 탔어?
“아니, 걸어가고 싶어서 안 탔어.”
-다리 아파, 버스 타고 가.
걱정은 여전했다. 나루는 규연의 말에 대충 알겠다고 대답해 놓고서 걸어가기를 택했다.
그나저나 오늘은 규연의 주변이 소란스러웠다. 아침에는 항상 호텔에서 전화를 받아서 조용했는데, 이상했다.
“그런데 지금 밖이야?”
-아니, 호텔이야.
“…뭔가 시끄러운데.”
-TV를 틀어 놔서 그래.
아, TV 소리였구나.
쉽게 수긍한 나루가 다른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주로 아침에는 뭘 먹었고, 어제 무슨 손님이 왔었는지 얘기하는 게 다였다.
통화를 하며 걷다 보니 금세 카페 앞이었다. 나루는 이제 그만 끊자고 말한 후, 상쾌한 발걸음으로 카페에 들어섰다.
“좋은 아침입니다!”
“나루 씨, 좋은 아침. 오늘 조금 일찍 오픈인 거 알죠?”
“네, 준비하고 나올게요.”
오늘은 한정 케이크가 일찍 판매 종료되는 날이라 더 빨리 오픈하기로 했다. 나루는 베레모와 앞치마를 입고 나와 오픈 준비를 도왔다.
홀을 쓸고 닦은 후, 진열까지 마치니 어느덧 오픈 시간이었다.
카페 문에 걸린 팻말을 오픈으로 돌려놓으니 이른 시간부터 손님들이 몰려들었다.
나루는 카운터에 서서 정신없이 계산을 마치고, 디저트를 포장해 손님에게 건넸다. 이걸 몇십 번 정도 반복하니 점심 시간이었다.
점심에는 유독 손님이 더 많이 몰려든다. 서연은 막 만들어진 타르트를 진열대에 올려놓고 돌아와 디저트를 포장하고 있는 나루를 도왔다.
“와, 사장님이 나루 씨 데리고 갔으면 큰일 날 뻔했어요.”
“그러게요, 사람이 많아서…….”
“이건 제가 포장할게요. 나루 씨, 잠깐 홀 둘러보고 정리 좀 해줄래요?”
“네, 다녀올게요.”
행주를 들고 홀로 나간 나루가 테이블을 야무지게 닦았다. 건후는 설거지와 쓰레기를 버리느라 바빠 보였고, 주방의 파티시에들은 디저트를 새로 만들어 내느라 분주했다. 모두 정신없는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테이블을 닦던 나루는 앞치마 주머니 속의 핸드폰을 조용히 바라봤다.
보통 이 시간에 규연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오늘은 바빠서 못 걸 것 같았다.
그런데 조금 의문스러운 점이 있었다. 나루가 먼저 전화를 걸지 않으면 규연 쪽에서 연락을 해왔는데, 오늘따라 핸드폰이 고요했다.
바쁜가?
안일하게 생각하고 넘긴 나루는 고개를 한 번 갸웃거린 후, 다시 일에 집중했다.
규연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 * *
제주도의 한 허름한 민박집.
거의 폐가 수준에 가까운 민박집에는 손님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심지어 주인장까지 어디로 사라지고 모습을 감춘 듯했다.
옛 주택처럼 지어진 민박집 가운데에는 돌바닥으로 된 자그마한 마당이 있었다.
그 가운데, 식탁 의자로 쓸 만한 낡은 의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규연은 의자에 거만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 담배를 태웠다.
원래라면 콜라보를 계획한 카페에 있어야 하지만, 이 시간을 위해 일부러 일정을 비워둔 것이었다.
근처에는 이름 모를 남자들이 둥근 형태로 서 있었다. 규연은 담배를 바닥에 던져 끄고는 발치에 엎드린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너 하나 때문에 귀한 시간 내줬잖아.”
“허, 허윽…….”
“죄송하다, 미안하다, 빌어도 모자랄 판에 뻔뻔스럽게 고개를 쳐드네.”
며칠 전, 나루에게 하던 행동과 달리 말투가 꽤 거칠었다. 규연은 엎드려서도 얼굴을 처박지 않는 남자를 발로 툭툭, 건드렸다.
그러자 신경질 섞인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 소리에 규연이 헛웃음을 쳤다.
상체를 숙인 규연은 남자의 머리채를 우악스럽게 붙잡아 올렸다. 그러자 처맞아 피떡이 된 얼굴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으, 흐윽, X발, 유규연.”
“건방지게 누구 이름을 입에 올려.”
“너, 허으, 후회 안 하겠어?”
얻어맞아 꼴이 엉망이 된 사람은 다름 아닌 건혁이었다. 도건혁.
입안이 터졌는데도 이를 악물고 욕지거리를 내뱉던 건혁이 규연을 죽일 듯 노려봤다. 규연은 여유로운 태도로 대꾸해 주었다.
“안 해, 후회는 네가 하는 거고. 건혁아, 나 YK 사람이야. 주제 파악 덜 했네, 이 새끼가.”
비아냥거리듯 말한 규연이 건혁의 뺨을 세게 내리쳤다. 그러자 손바닥으로 때린 것치고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건혁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비틀거리자, 주변에 서 있던 남자들이 몸을 일으켜 세워 규연의 앞에 데려다 놓았다.
“왜 이렇게 멍청해. 하지 말라고 경고했을 때 그만했어야지. 공식적인 자리에서 일 치면 그냥 넘어갈 줄 알았냐. 대가리를 써, 대가리를.”
퍽!
구둣발이 건혁의 머리를 강타했다. 이제 막 무릎을 꿇고 앉은 몸이 힘없이 쓰러졌다. 규연은 피떡이 된 건혁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더러워진 구두를 신경 썼다.
안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낸 규연이 제 구두를 닦아내고 더러워진 손수건을 바닥에 던져 버렸다.
방금까지만 해도 잘만 떠들던 건혁이 조용해졌다. 몇 대 얻어맞더니 정신을 좀 차린 모양이었다.
“입 처 다물고 뭐 해. 빌어야지.”
“커, 커흑, 으…….”
입안에 고인 피를 바닥에 뱉어낸 건혁이 퉁퉁 부은 눈을 끔뻑이며 규연의 발치에 고개를 박았다.
약아 빠진 건혁은 초반까지 규연이 죽어라 패지 못하겠다, 생각하고 버텼다.
하지만 예상이 완전히 빗나가 버렸다. 규연은 건혁을 묻어 버릴 작정으로 어디서 사람까지 고용해 왔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처맞은 티가 나든, 안 나든, 거침없이 폭력을 행사했다. 무서울 게 없다는 듯 행동해서 더 두려웠다.
“내가, 다, 허으, 미안하다.”
“누구한테.”
“으, 흐윽.”
“누구한테 미안한데, 응?”
“그, 소, 송나루, 걔한테 정말 미안하고, 못 할 짓을 해서…….”
끈질기게 말꼬리를 잡던 규연이 그제야 만족한 듯 시선을 거두었다. 건혁은 굴욕을 느끼고 괴로워하는 중이었다.
의자에서 일어난 규연은 건혁의 목을 발로 짓밟으며 상황을 깔끔히 마무리했다.
“가만히 있는 애 그만 건드려. 네 회사 지켜야지, 건혁아. 하루아침에 길바닥 거지 새끼 되고 싶은 거 아니잖아.”
회사까지 들먹이며 경고한 규연이 발을 떼어내고 뒤돌아섰다.
“알아서 정리해.”
명령조로 말하고 민박집을 나서자 남자들이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더러워진 바닥을 청소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 피떡이 된 건혁을 일으켜 세워 물을 퍼부었다.
차로 돌아온 규연은 시동을 걸지 않고 잠시 눈을 감았다.
방금 벌어진 일은 모두 규연의 계획 아래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지난 행사 때, 건혁은 사람들 앞에서 나루를 대놓고 모욕했다. 그땐 공식적인 자리이기도 하고, 나루도 많이 놀란 상태라 급하게 상황을 수습했었다.
그 뒤로 아버지의 호출에, 나루가 사라지기까지 해서 정신없는 날을 보내느라 건혁을 따로 찾아갈 시간이 없었다.
입 밖으로 내지 않았지만, 규연은 행사장에서부터 쭉 건혁을 벼르고 있던 중이었다.
그렇게 모든 일이 마무리된 지금, 제주도 출장과 겸해 건혁을 처리하기로 한 것이다.
우선, 친형인 규민에게 의뢰해 신뢰가 뛰어난 업체를 고용했다. 문제는 건혁을 불러내는 것이었는데, 규민의 도움으로 손쉽게 해결되었다.
규연이 행사장에서 있었던 일 관련해서 그냥 넘어가 준 걸 감사하게 여기라며, 마지막 기회를 준다는 메시지를 전송하니 건혁이 잽싸게 튀어나왔다.
규연과의 관계를 이대로 끝내기 아쉬웠던 모양이다. 아마 건혁의 집안에서 규연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라는 압박을 넣었을 것이다.
규연은 제 권력을 아주 유용하게 이용했다. 당연히 이 일들은 나루 모르게 진행되었다. 알면 통쾌하다고 하면서도 홀로 마음 불편해할 게 뻔했을 거다.
오늘을 위해 하루를 통으로 비워 둔 규연은 계획한 것처럼 아침부터 건혁을 탈탈 털었다. 끝은 만족스러웠다.
백미러로 얼굴을 살펴보던 규연이 인상을 찌푸리며 피가 튄 자국을 문질러 닦았다.
그리고 바로 나루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