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잠깐 사이에 기온이 더 떨어져 날씨가 쌀쌀했다.
규연은 작은 소음에 눈을 떠 거실로 나왔다. 부스럭거리는 게 나루가 먹을 걸 찾는 모양이었다. 슬리퍼를 직직 끌고 복도를 걸어 나온 규연은 무언가를 발견하자마자 심장을 부여잡았다.
“잘 잤어?”
나루가 밤새 싸 놓은 캐리어 위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었다. 남자치고 키가 작은 편이라 그런지 앉아 있는 모습이 귀여웠다.
아침부터 뽀얀 얼굴 하며, 헝클어진 연노랑 빛 머리카락까지 귀여움을 더해 주었다.
규연은 저대로 나루를 캐리어에 집어넣어 제주도로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품었다.
“나랑 갈래? 지금이라도 안 늦었어.”
“안 돼, 내가 빠지면 다른 사람들이 힘들어.”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톤으로 묻자, 칼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본인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사람을 이런 식으로 애태우는 게 얄미웠다.
규연은 손을 뻗어 나루의 볼을 꼬옥 쥐었다. 말랑한 볼이 눌릴 때마다 입술이 붕어처럼 튀어나왔다.
아침부터 애정이 넘쳤다. 쪽, 하는 소리가 거실에 두어 번 넘게 울렸다. 나루는 가만히 얼굴을 내어 주다가 규연을 슬쩍 밀어냈다.
떠나는 날이라 아쉬운가. 규연의 애정 표현이 평소보다 더 격했다.
“이러다가 비행기 시간에 늦어.”
“송나루, 너는 아쉽지도 않지.”
“…아쉬운데.”
아쉽다며 중얼거린 나루가 식탁 앞에 앉았다.
며칠 전, 답답하다면서 규연의 집착을 거부하던 나루는 언제 그랬냐는 듯 들러붙었다. 구속하는 것과는 별개로 규연과 일주일 내내 떨어져 있는 게 서운한 듯했다.
아침에는 몰래 규연의 캐리어를 열어 몸을 집어넣어 보기도 했다. 큼지막한 캐리어라 충분히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막상 몸을 넣어 보니 한참 작았다.
규연은 일부러 서운하다는 티를 내며 아침을 준비했다. 반면, 표정은 그리 서운해 보이지 않았다.
유규연 거짓말하고 있네.
속으로 규연을 자잘하게 씹어 준 나루가 조용히 숟가락을 세팅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식탁 위로 따스한 밥과 반찬들이 올라왔다. 계란말이부터 된장국, 햄과 생선조림까지 먹을 것 천지였다. 밥도 평소 먹던 양의 두 배였다.
어마어마한 양에 멍해진 나루가 규연을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이게 다 뭐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일주일 동안 아침 못 차려주잖아. 많이 먹으라고.”
“이렇게나 많이?”
“어제 만들어 둔 반찬은 냉장고에 넣어 놨으니까 먹고 싶을 때 먹어.”
냉장고를 가리키던 규연이 설명을 마친 후 숟가락을 집어 들었다. 나루는 밥그릇 너머까지 올라온 포실한 밥을 허망하게 바라봤다.
꼭 여행 떠나기 전에 강아지한테 밥 많이 주고 가는 주인 같았다.
나루는 일부러 밥을 더 복스럽게 떠먹었다. 규연은 자신의 음식을 잘 먹어주는 나루를 특히 좋아했다.
한 숟갈 뜨면 알맞게 잘린 계란말이가 얹어졌고, 또 한 숟갈 뜨면 잘 발린 생선 살이 얹어졌다.
시골 할머니 생각나. 웃기다.
피실, 올라가는 입꼬리를 억지로 내려가며 참던 나루가 밥을 꼭꼭 씹어 삼켰다.
“왜 웃어, 송나루.”
“안 웃었어.”
“나 출장 간다니까 좋지 아주.”
“아니야, 아쉬워. 안 좋아.”
장난스러운 규연의 목소리에 질려버린 나루가 숟가락을 밥 사이에 푹, 찔러 넣었다.
규연은 그런 나루의 머리를 익숙하게 쓰다듬어 주고, 다시 숟가락을 쥐여 줬다.
그나저나 일주일이라는 시간 동안 나루가 멀쩡히 있어 줄 수 있을까.
장난을 치다 만 규연이 턱을 괸 채 나루를 가만히 바라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불안했다. 여태 규연이 집을 비운 사이에 나루에게 무슨 일이 생겼으니 말이다.
밥 한 그릇을 힘겹게 비워낸 나루가 배를 두드렸다. 규연은 밥도 다 먹지 않은 채 나루를 구경하기 바빠 보였다.
“너는 왜 안 먹어?”
“다 먹었어.”
눈치 빠른 나루는 규연이 뭘 걱정하고 있는지 단번에 파악했다. 그렇게 괜찮다고 말했는데, 떠나는 날까지 걱정을 떨쳐내지 못한 규연이 대단할 지경이었다.
자리에서 일어선 나루가 그릇을 하나씩 치우기 시작하자, 규연이 나서서 남은 것들을 정리했다.
“내가 할 수 있어.”
“그래도 내가 할게.”
“줘, 나 혼자 잘한다니까.”
나루가 규연의 손에서 빼앗아 든 그릇을 물로 헹궈 식기세척기 안에 차곡차곡 쌓아 넣었다.
일부러 혼자서도 잘한다는 걸 보여주니 그제야 규연의 표정이 조금 차분해졌다.
현재 시각은 오전 8시. 공항에 여유롭게 도착하려면 한 시간 안에 나가야 했다. 미리 일정을 들어 알고 있던 나루는 규연을 재촉하는 대신 본인의 출근 준비를 서둘렀다.
“가는 길에 내려 줄게.”
“나 그냥 걸어가도 되는데.”
“그 거리를 왜 걸어가.”
“얼마 안 걸릴걸.”
“얌전히 타고 가.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잖아.”
고작 일주일 떨어져 있는 것뿐인데 규연은 나루를 극성으로 대했다. 거침없는 표현에 뻘쭘해진 나루는 소심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씻고, 옷까지 갈아입고 나오니 규연이 차 키를 든 채 대기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뒤늦게서야 규연이 출장을 떠난다는 사실이 현실로 다가왔다.
같이 가고 싶어도, 그러면 안 돼. 이성적으로 행동해야 해. 그 정도 판단도 못 하는 모지리가 아니니까.
마음을 다잡은 나루가 일부러 규연의 옆을 아무렇지 않게 지나쳤다. 하지만 바로 몸이 빙글 돌려졌다.
“쳐다보지도 않고 지나가네. 나 봐.”
“…….”
“일부러 나 서운해하라고 이래? 나루야. 예전에는 어리광도 잘 피우더니.”
넓은 품에 나루의 몸이 쏙 들어 안겼다. 규연은 저보다 한참 작은 나루를 억세게 껴안고 놓아주지 않았다.
오늘따라 규연의 체취가 짙게 느껴졌다. 향수가 더해지니 시원하면서도 매력적인 향이 났다. 나루는 습관처럼 코를 킁킁거리다가 숨을 참았다.
계속 맡고 있다가는 규연의 바짓가랑이라도 붙잡을 것 같았다. 애써 이성을 유지하고 있는데, 본성이 훅 치고 올라왔다.
게다가 규연이 껴안아 주는 손길이 더 부드럽고 다정했다. 나루가 딱 좋아하는 스킨십 정도였다.
“가지 말라고 해 봐.”
“그러면 안 돼.”
“송나루, 변했다. 변했어.”
“…변하는 거 싫어?”
“아니, 좋아.”
규연의 장난 어린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나루가 눈썹을 축 늘어뜨렸다. 제 딴에는 다른 사람들처럼 성숙해지고 싶어 이성을 지켰던 건데, 규연이 실망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된 모양이다.
하지만 규연은 곧바로 아니라고 대답하며 나루를 안심시켜 주었다. 둥근 머리통을 큰 손으로 쓸어내리듯 쓰다듬어 주니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크흡.”
“……?”
나루는 안정을 느낄 때마다 숨을 크게 내쉬곤 했다. 규연은 그 소리가 귀여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정작 나루는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하루에 세 번 전화해 줘.”
“세 번?”
“더 많이 걸어도 돼.”
“방해되는 거 아니야?”
“방해 안 되니까 걸어 줘.”
규연이 품에 안긴 나루를 부둥거리며 부탁 하나를 건넸다. 방해될까 걱정하던 나루는 규연의 대답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거려 줬다.
이제 진짜 안 가면 늦을지도 모른다. 나루는 곁눈질로 규연의 손목에 감긴 시계를 확인한 후, 발꿈치를 들었다.
춉, 하는 소리와 함께 나루의 입술이 규연의 입술 위에 닿았다 떨어졌다. 사소한 입맞춤 한 번에 규연의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팔불출이 따로 없었다.
“이제 가야 해.”
“하아…, 잔인하다 잔인해.”
“얼른 문 열어.”
깊은 한숨을 내쉬던 규연이 신세 한탄을 했다. 나루는 차분히 문을 열어 주고, 밖으로 나와 엘리베이터를 잡았다.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동안 진득하게 붙어 있었다. 핑크빛 분위기가 아침 내내 떠나지 않았다.
차에 탄 규연은 나루를 조수석에 앉혀 두고 애정을 퍼붓느라 10분을 소비했다.
“위험한 일 생기면 바로 전화해, 응? 먹을 건 내가 배달로 계속 보내 놓을게.”
계속 이어지는 걱정과 애정 표현에 나루의 혼이 빠져나갔다.
규민을 볼 때마다 저 집안에서 어떻게 저런 능글맞은 성격이 나온 건지 궁금했는데, 착각이었다.
규연도 누군가에게 진심이 되니 규민만큼이나 능글맞아졌다. 다정하다 못해 사람이 녹을 정도였다.
“빨리 출발해…….”
웬일로 규연보다 먼저 기가 빨린 나루가 출발하라며 팔을 툭툭, 쳤다.
규연은 액셀을 일부러 더 살살 밟았다. 뒤에서 따라오던 차가 답답했는지 뒤늦게 클랙슨을 울렸지만, 오히려 길을 터 주고 천천히 운전했다.
그렇게 20분 걸릴 거리를 30분 만에 도착했다.
카페 앞에 차를 세운 규연은 나루를 그냥 내리게 두지 않았다.
“퇴근하고 집 갈 때 전화하고, 집 가서 밥 먹을 때도 전화해. 적적할 수도 있으니까.”
“응.”
전화하라는 소리를 몇 번이나 들었는지 모르겠다. 나루의 눈이 느리게 끔뻑거리자 규연이 조심스레 물었다.
“내가 이렇게 물어보는 것도 답답해?”
“아니, 그냥 아주 조오금 귀찮아.”
“…….”
“거, 거짓말이야.”
약간의 솔직함을 담아 장난스럽게 얘기한 나루가 규연의 시무룩한 얼굴을 발견하고 바로 수습했다. 진심으로 서운해하는 게 보여서 웃기기도 하고, 괜히 미안해졌다.
나루는 이번에도 먼저 상체를 기울여 입을 맞춰 줬다.
“으우!”
짧게 하고 떨어지려던 순간에 규연의 손이 나루의 뒤통수를 단단히 잡아 고정했다. 그 탓에 떨어지지 못한 나루가 버둥거리자, 몸을 안정적으로 받쳐 준 규연이 입을 더 깊숙이 맞춰 왔다.
다소 민망스러운 소리가 끊기고, 두 사람의 거리가 멀어졌다. 나루는 숨을 헐떡이며 번들거리는 입술을 소매로 닦아냈다.
규연은 아직 아쉽다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나루는 위기를 느끼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덜컥.
문을 열고 내리려니 잠금이 되어 있어 문고리만 덜컹거렸다.
“한 번만 더 하고 내려.”
“여기 카페 앞인, 으읍!”
낮게 내리깔린 목소리가 매력적이면서도 위험하게 느껴졌다. 나루의 고개가 뒤로 한껏 꺾이고, 두 입술이 다시 맞물렸다.
스킨십의 농도가 유독 짙었다. 나루는 손을 뻗어 규연의 어깨를 힘겹게 두드렸다. 그래도 맞붙은 입술이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한참 애정을 나누고 있을 때였다.
“허, 어머, 어머나!”
누군가의 목소리가 창문 밖으로 들렸다. 화들짝 놀라 규연을 밀어낸 나루가 다급하게 창문 밖을 확인했다.
정확히 조수석 창문 옆, 서연이 눈을 크게 뜬 채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