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9화 (89/130)


이전으로 돌아간 기분이라. 이전이라면 어느 시기를 말하는 걸까. 규연이 착잡한 눈으로 동그란 뒤통수를 내려다보았다.

등을 토닥이던 손이 살짝 떨렸던 것 같기도 하다. 나루는 고개를 들어 규연과 눈을 마주했다.

“구속받는 거 싫어. 지하실에서 살았을 때가 떠올라서 속이 답답해.”

2차 충격이었다. 나루는 규연과 처음 만났을 때가 아닌 지하실에서 갇혀 지내던 때를 떠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그 인간과 같은 행동을 하고 있다고……?

나루의 전 주인에 대해서는 두어 번 들어 알고 있었다. 감금은 기본이고, 나루를 학대하는 수준으로 괴롭혔다고 했다.

규연은 가시지 않는 충격에 안겨 있는 나루를 살짝 밀어냈다.

걱정된다는 이유로 자신이 나루를 마음대로 가두려고 한 건 사실이었다. 며칠 내내 미친 사람처럼 나루를 찾아다녔더니 이성을 잃은 걸까.

현관 벽에 기대어 선 규연이 눈을 감았다 뜨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나루는 그런 규연의 옷 끄트머리를 붙잡은 채 가만히 기다려 주었다.

“내가 일부러, 그러니까, 악의적으로 널 가두려고 한 건 아니야.”

“응.”

“그때가 생각날 정도로 힘들었어?”

“……응.”

사실 그렇게까지 힘들지는 않았다. 갑자기 잡혀 있으려니 답답했던 것뿐이었다. 그러나, 나루는 이런 말을 덧붙이지 않고 간단히 대답했다.

묵묵히 이어지는 대답에 규연의 단호하던 눈빛이 누그러졌다. 결국, 또 지는 건 규연이었다. 이번에는 단호함이 오래 가나 했더니 고작 하루 버틴 게 끝이었다.

나루의 앞에 큼지막한 손이 내밀어졌다.

“같이 가. 몸 상태 이상하면 바로 말해. 알겠지.”

“정말 같이 가도 돼?”

“얼른 준비하고, 얼씨구, 옷까지 다 갈아입었네.”

얼른 준비하고 나오라며 보채려던 규연이 나루의 행색을 훑어보더니 헛웃음을 쳤다.

상황이 이렇게 되리라는 걸 예상했던 걸까. 나루는 이미 옷을 다 갈아입은 상태였다.

나루의 손을 덥석 붙잡은 규연이 현관문을 열었다. 불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힘들다고 말하는 나루를 집에 혼자 두는 것보다 나았다.

오랜만의 출근에 들뜬 나루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차에 올랐다. 그와 달리 규연의 행동은 침착하고 무거웠다.

“오늘은 인사만 하고 와.”

“일은?”

“다음 주부터 해. 혹시 모르니까.”

“…난 오늘부터 해도 되는데.”

시동을 걸고 핸들을 잡은 규연이 끊임없이 걱정을 늘어놓았다. 나루는 당장 오늘부터 다시 일을 시작하고 싶었지만, 규연의 고집에 순순히 넘어가 주었다.

카페로 가는 짧은 사이에 규연의 전화가 두세 번이나 울렸다. 모두 일 전화였다.

가을이 끝날 무렵이라 그런지 일이 넘쳐나는 것 같았다. 나루는 울리는 핸드폰을 티 안 나게 노려보았다.

“먼저 들어가 있을래? 전화하고 들어갈게.”

차에서 내린 규연이 핸드폰을 가리키며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루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곤 카페 문을 열었다.

딸랑, 오늘따라 종소리가 더 맑고 경쾌했다. 나루의 등장에 기계 같은 인사를 입 밖으로 내던 서연이 눈을 크게 떴다.

“나루 씨!”

“안녕하세요.”

“아팠다면서요. 이제 좀 괜찮아요?”

“괘, 괜찮아요.”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지만, 규연이 멋대로 이유를 꾸며낸 듯했다. 나루는 어설프게 아팠던 척하며 서연의 말에 대꾸했다.

손님에게 나갈 디저트를 예쁘게 포장한 서연이 계산까지 마친 후, 나루의 팔을 급히 잡아끌었다.

“안 그래도 저쪽에서 기다리고 계셨어요.”

“누가요?”

“사장님 친형이요. 왜, 저번에 오셨던.”

“어…….”

홀 구석 테이블에 규민이 앉아 있었다. 서연의 말로는 나루를 기다렸다고 했다.

껄끄러운 일을 겪은 후라 규민의 얼굴을 마주하기 민망했다. 서연은 나루의 등을 떠밀어 주고 제 할 일을 시작했다.

“나루 왔구나. 아팠다며, 몸은 좀 괜찮고? 이리 앉아 봐.”

“아, 안녕하세요.”

규민이 친근하게 다가와 나루를 걱정했다. 얼떨결에 맞은편 자리에 앉게 된 나루는 멋쩍은 얼굴로 눈알만 굴렸다.

커피 한 모금을 여유롭게 마신 규민은 나루에게 마카롱 하나를 밀어주고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괜히 행사에 초대해서 힘든 일 겪게 했지. 미안해.”

“아니요, 저는 그런 곳 처음 가 봐서 좋았어요…!”

차분한 사과에 당황한 나루가 두 손을 저어가며 부정했다. 그날, 모욕을 당한 건 규민이 아닌 건혁 때문이었다. 규연과의 관계를 의도적으로 밝힌 것도 건혁이었다.

규민은 웃음을 작게 흘리고는 자연스레 대화를 돌렸다. 나루를 보러 굳이 여기까지 온 이유였다.

“규연이랑은 잘 풀었고? 보니까, 그날 너랑 연락이 안 돼서 힘든 것 같더라고.”

“잘 풀었는데, 규연이가 걱정이 많아서요…….”

아버지도 버리고 뛰쳐나간 규연이 걱정됐던 모양이다. 규민은 나루의 대답에 안심하며 웃었다. 두 사람이 가족 때문에 찢어지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상황이 나쁘지는 않아 보였다.

규민은 규연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까탈스럽지만 그만큼 섬세하고, 거칠게 행동해도 속이 깊은 게 바로 규연이었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 난리를 피울 정도였으니 걱정이 클 만도 했다.

“규연이가 원래 그래, 한 번 무슨 일이 벌어지면 지나치게 신경 쓰거든. 의외지?”

“의외는 무슨, 형이 왜 여기 있어.”

어느새 나타난 규연이 자연스레 끼어들었다. 나루의 옆자리에 다리를 꼬고 앉은 그가 마카롱을 집어 포장을 까 줬다.

연하늘색 마카롱을 손에 쥔 나루가 야금야금 먹기 시작하자, 규연의 시선이 그제야 규민에게 꽂혔다.

“아빠가 나 끌고 오래?”

“규성이 형이 설득해서 진즉 가라앉히셨으니까, 너도 당분간 조용히 있어.”

다행히 유 회장의 성질이 가라앉은 듯했다. 규민은 이야기를 간단히 끝맺음한 후, 규연을 빤히 쳐다봤다.

집요한 시선에 규연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할 이야기가 있으면 그냥 하지, 가만히 쳐다보고 있는 게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왜 그렇게 봐.”

“너, 나루 잡는 거 아니지?”

“잡긴 누가 잡아. 내가 얘한테 잡혀 살거든.”

규연이 장난스러운 눈짓으로 나루를 가리켰다. 뜨끔해서 어깨를 떨던 나루는 모르는 척하며 마카롱을 한입에 넣어 버렸다.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보던 규민은 좋아 보이니 됐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래도, 너 걱정된다고 괜히 나루 힘들게 하지 마.”

“오지랖 그만 부리고 가.”

“나루, 나중에 형이 따로 밥 사 줄게.”

“웃기지 말고 가. 얘 밥을 왜 형이 사 줘.”

끝까지 방어하던 규연이 익숙하게 규민을 쫓아냈다. 나루는 그 옆에 서서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규성이 형이 설득해서 진즉 가라앉히셨으니까….’

유 회장의 화가 가라앉았다니 다행이었다. 나루의 마음이 조금이나마 가벼워졌다.

“나루, 안녕.”

마지막까지 능글거리던 규민이 손을 흔들고 나갔다. 오랜만에 온 카페가 여느 때와 같이 소란스러워서 좋았다.

“잠깐 있어, 나 얘기 좀.”

“응.”

따로 빠져나온 규연이 카운터로 향했다. 직원들의 스케줄 표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서연은 혹시라도 스케줄에 변동이 생길까 무서워 규연의 옆으로 다가왔다. 신중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규연의 모습이 묘하게 불안했다.

“사장님, 스케줄 표는 갑자기 왜 확인하세요?”

“그냥. 아, 곧 제주 카페랑 콜라보 할지도 몰라.”

“그럼 엄청 바쁘겠는데요. 사장님 출장 가시겠네요?”

“어, 그래서 송나루 좀 데려가려고.”

웬일로 순순히 대답해주던 규연이 나루의 스케줄을 확인했다. 출장일에 맞춰 출근하는 인원을 조정하려는 모양새였다.

나루의 이름을 빼고, 오늘 출근하지 않은 건후를 끼워 넣으려고 하자 서연이 황급히 규연의 손을 막았다.

“사장님, 안 돼요! 나루 씨 남겨 주셔야 해요. 이쯤이면 한정 케이크 판매 막바지라 사람 많이 몰린단 말이에요!”

서연의 말에 규연이 곤란하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그러고 보니, 계절 하나가 지나갈 때쯤이면 항상 일이 바빠지곤 했다. 시즌 메뉴 판매일이 끝날 시기라 사람이 몰렸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일이 바쁜데 직원을 더하기는커녕 줄이는 건 말도 안 됐다. 차마 여기까지 계산하지 못한 규연은 이를 갈았다.

나루를 데리고 가려던 계획이 실패했다.

제주 카페 사장에게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해 본다고 했으나, 거의 콜라보 확정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는 건 무조건 출장을 가야 한다는 건데, 혼자 있을 나루가 걱정됐다.

‘너 걱정된다고 괜히 나루 힘들게 하지 마.’

하필이면 이때 규민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규연의 머릿속이 말로 하지 못할 만큼 복잡해졌다.

“규연아, 너는 일해. 나도 여기서 얌전히 일하고 있을게.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연락도 할게.”

소리 없이 다가온 나루가 규연의 귓가에 속삭였다. 서연이 있어서 일부러 목소리 톤을 다운시켜 말했다.

규연은 나루의 말에 한참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규민의 말대로 너무 걱정했다가 되려 나루를 불편하게 만들까 봐 한 걸음 물러선 거였다.

서연은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혼자 죽어라 일할 뻔했는데, 규연이 나루를 놓아준 덕분에 덜 힘들 것 같았다.

“사장님, 스케줄도 문제없으니까 얼른 승낙하고 오세요! 그 카페 디저트 실력 괜찮다고 늘 칭찬하셨잖아요.”

주먹을 앙증맞게 쥔 서연이 응원하듯 팔을 흔들며 주접을 떨었다. 그러자 나루도 합세해 슬쩍 부추겼다.

규연은 끝내 콜라보 제안을 승낙했다. 전화로 무어라 대화를 주고받더니 다이어리를 꺼내 급히 글자를 휘갈겨 쓰기도 했다.

나루는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규연의 다이어리를 훔쳐봤다.

11월 3일, 제주도 미팅.

미팅 날짜가 빨리도 잡혔다. 나루는 전화하고 있는 규연을 묵묵히 구경했다.

근심이 섞여 있지만, 새로이 진행되는 일에 흥미를 느끼고 있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럼, 3일에 제가 먼저 가는 걸로 하죠. 올라오시는 날짜는 편하게 잡으세요. 네.”

전화를 끝낸 규연이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서연은 콜라보 소식에 들떠 박수를 치기 바빴고, 나루는 그런 서연을 따라 활짝 웃어 줬다.

이 사이에서 표정이 애매한 사람은 규연뿐이었다.

11월 3일. 당장 일주일 뒤. 규연의 출장이 결정됐다. 나루 없이 홀로 떠나야 하는 장기 출장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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