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8화 (88/130)


나루의 아래에 눌려 있던 규연이 몸을 뒤집었다. 엄청난 힘에 손쉽게 아래로 깔리게 된 나루가 눈을 끔뻑거렸다.

어느새 두 사람의 위치가 바뀌었다. 규연은 미묘하게 인상을 찌푸린 채 경고했다.

“집착이 어설퍼?”

“…….”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당분간 집에 얌전히 박혀 있어.”

나루 한정으로 말랑하게 굴던 규연이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은 태도를 보였다. 냉정하고, 싸가지 없는 어투에 나루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자리에서 일어선 규연이 나루를 그대로 눕혀놓고 이불을 덮어 줬다. 방금까지 매정하게 군 주제에 손길이 다정했다.

이게 아닌데.

역으로 규연을 당황시키려던 나루의 계획이 물거품으로 돌아가 버렸다. 멍하게 누워 있으니 폭신한 이불이 몸 전체를 덮었다.

나루가 황급히 일어서려고 하자 규연이 뽀얗고 매끄러운 이마를 손가락으로 밀어 눕혔다. 너무나도 가볍게 제압해서 허무할 정도였다.

다시 풀썩, 눕게 된 나루가 규연을 은근히 노려봤다. 그 눈빛을 무시한 규연은 평소와 다름없는 톤을 유지하며 방 불을 꺼 줬다.

“차라리 일찍 자.”

“이렇게 나가? 정말?”

“송나루.”

이름 부르는 게 뭐라고 입이 다물려졌다. 나루는 일부러 규연이 보는 앞에서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썼다. 너 때문에 내 심정이 거지 같아졌다는 걸 티 내는 거였다.

하지만 규연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무심한 듯 다정한 눈으로 이불에 파묻힌 나루를 쳐다보던 그는 이내 문을 닫고 나가 버렸다.

팡! 퍼펑!

“내가 애도 아니고, 유규연 개짜증 나!”

규연이 나간 뒤, 발로 이불을 뻥뻥 차대던 나루가 씩씩거렸다. 행사에 다녀온 후부터 일이 계속 꼬이기만 하는 게 열 받았다.

게다가 이런 일들로 규연과의 사이가 삐걱대고 있었다. 예전에는 이 정도까지 투닥거리지 않았는데, 자잘하게 말싸움을 하는 일이 늘었다.

다시 동네로 도망쳐 올 때까지만 해도 성숙하게 대화해 보기로 다짐했었는데. 그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착잡해진 나루는 그대로 눈을 감아 버렸다. 규연의 말대로 차라리 자는 게 나을 듯해서였다.

속이 괜히 답답했다. 말만 밖으로 나가지 말라 옥죈 거였으나, 무언가를 통제받고 있다고 생각하니 한숨만 푹푹 새어 나왔다.

한 시간 내내 억지로 눈을 감고 있었다.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는데, 이상하게 점점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나루는 마지막 한숨을 내쉬고 잠에 빠져들었다.

* * *

규연의 집착을 얕보고 있었던 나루는 환멸을 느끼는 중이었다. 고작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질릴 정도면 말 다 한 거였다.

화장실에 갈 때도, 잠시 바람을 쐬러 갈 때도, 그냥 움직이기만 하면 따라다니며 은근히 감시하는 게 신경 쓰였다.

“나 아무 데도 안 가!”

“내가 안심할 때까지는 안 돼.”

밥을 먹던 나루가 숟가락을 탁, 내려놓자 규연이 매서운 시선을 날렸다. 어쩔 수 없이 숟가락을 다시 집어 든 나루가 아무렇지 않게 밥을 퍼먹었다.

회사도 가고 싶고, 밖에도 마음대로 나다니고 싶은데 단호하게 옆을 지키고 서 있는 규연 때문에 뭘 할 수가 없어 답답했다.

꾸역꾸역 밥을 다 먹은 나루가 소파에 드러누웠다.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으려니 몸이 근질거렸다.

식탁 위를 깔끔히 치우고 나온 규연은 누군가의 전화를 받느라 바빠 보였다.

“콜라보 하는 건 좋은데 거리가 있어서, 그것도 장점이지만, 네, 아무튼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고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정중하게 대하는 걸 보아하니 일 관련 전화인 거 같았다. 나루가 궁금하다는 듯 빤히 쳐다보자 핸드폰을 집어넣은 규연이 가까이 다가왔다.

“무슨 전화야?”

“일 관련 전화.”

“일 왜?”

나루가 눈을 반짝였다. 대화 주제가 꽤 흥미롭던데, 애인이 아닌 카페 직원으로서 기대가 됐다.

정작 규연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방금 받은 전화는 꽤 반가웠다. 제주도의 유명 카페 사장이 콜라보하자는 제안을 보내왔기 때문이다.

각 카페의 스페셜 메뉴를 살리고, 함께 만든 디저트를 메인으로 세워 동시 콜라보 이벤트를 열자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걸리는 게 하나 있었다. 이 제안을 수락하면 규연은 며칠, 아니, 잘하면 몇 주간 제주도에 머무를 수도 있었다.

나루가 같이 가겠다고 할 시에는 편하게 다녀올 수 있겠지만, 지금 상태에서는 절대 순순히 따라가겠다는 대답을 내어주지 않을 듯했다.

“제주도에 있는 카페랑 콜라보를 하게 될지도 모르는데.”

“응.”

“내가 이걸 한다고 하면, 일주일은 출장 가 있어야 해.”

“…….”

흥미롭게 묻던 나루가 대답을 아꼈다. 이럴 줄 알았다. 규연은 예상대로 흘러가는 상황에 이마를 짚었다.

그냥 얌전히 따라와 주기만 하면 될 텐데. 벌써 엇나간 나루의 얼굴에 앞으로의 일이 상상됐다.

“나는 지금 카페에서 일할래.”

“같이 가. 너 나 안 봐도 좋아?”

“전화하면 되잖아.”

“송나루, 내가 못 나가게 한다고 시위해?”

끄덕끄덕.

나루가 바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할 말을 잃은 규연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지금만큼은 청개구리 같은 나루가 얄미웠다.

“말했잖아, 걱정돼서 그런 거라고. 일단 이 문제는 나중에 다시 생각해 봐야겠다.”

결정을 다음으로 미뤄 버린 규연이 상황을 회피했다. 수락하더라도 나루의 마음을 돌린 후에 해야 할 것 같았다.

대화를 끝마친 규연이 욕실로 향했다. 오늘은 평일이었다. 거의 일주일 동안 출근을 하지 않아서, 오늘은 카페에 나가 봐야 했다.

나루는 규연이 출근 준비를 한다는 걸 눈치채고 잽싸게 갈아입을 옷을 꺼내놓았다.

설마, 출근까지 말리지 않겠지.

“너 여기서 뭐 해.”

“씻을 거야.”

“저 옷은 또 뭔데.”

“나도 출근해야 해.”

잠시 후,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털며 나오던 규연이 나루를 발견하고 시큰둥하게 물었다. 나루는 당당히 출근해야 한다며 행동을 서둘렀다.

분주한 움직임에 다급히 앞을 막은 규연이 나루의 팔을 붙잡았다.

“무슨 출근이야.”

“왜!”

“집에 있어.”

“나도 직원이야.”

나루는 어떻게든 출근하고 말겠다는 의지를 내보이며 잡힌 팔을 뿌리쳤다. 그 행동에 규연이 진심으로 걱정하기 시작했다.

“너 갑자기 변했었다며. 밖에서도 그러면 어쩌려고 자꾸 고집을 부리냐. 나루야, 말 좀 들어.”

규연이 제일 걱정했던 건 바로 이거였다. 나루의 몸이 밖에서도 바뀌면 어쩌나, 하는 것.

나루 입장에서는 주기가 지났으니 괜찮다고 안일하게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규연은 달랐다. 사람 몸이 개로 변한다는 것 자체가 충격인데, 심지어 갑자기 변할 수도 있다니 무조건 조심해야 했다.

걱정이 더해질수록 나루의 안색이 우중충해졌다. 출근을 안 한 지 오래라 어서 직원들을 만나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 몸이 축 늘어졌다.

“나 괜찮아. 이제 괜찮다니까.”

“…….”

“다친 곳도 없었잖아. 봐!”

“안 돼.”

필사적인 어필도 먹히지 않았다. 규연은 끝까지 안 된다며 단호한 답을 내놓았다.

옆에서 방방 뛰던 나루가 조용해졌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꼭 울고 있는 것 같은 착각까지 들었다.

규연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 나루를 내려다볼 뿐,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

집 안이 지나치게 고요해졌다. 나루는 아무 말도 없이 소파로 돌아가 앉았다. 앉은 곳 주변에 먹구름이 밀려들었다.

나루의 우중충 퍼포먼스를 애써 모르는 척한 규연이 재킷을 껴입었다. 옷 스치는 소리가 거실에 울릴 때마다 나루의 머리통이 조금씩 움찔거렸다.

나가나. 정말 나 두고 나가는 건가. 유규연. 진짜 네 애인 두고 나가?

슬쩍 규연을 힐끔거리던 나루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금방 다녀올게. 문 잠그고 나갈 거니까 안 열려도 당황하지 마.”

“뭐?”

준비를 마친 규연이 충격 발언을 뱉었다. 안쪽에서 현관문을 열지 못하게 밖에서 잠그고 나간다는 말이었다. 이상하게 놓고 간다, 싶더니 다 꿍꿍이가 있었던 모양이다.

나루의 표정이 절망에 휩싸였다. 동시에 원망스러운 시선이 규연에게 꽂혔다.

“심심하면 전화해.”

“…….”

개소리. 개는 난데, 왜 자꾸 규연이가 개소리를 하지.

나루가 씩씩거리는 사이, 규연이 현관으로 향했다. 워커를 신으며 복도 안쪽을 기웃거리던 규연은 작은 한숨을 삼켰다.

나루는 단단히 삐친 건지 마중도 나오지 않았다. 데려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어쩔 수 없이 외면해야만 하는 게 가슴 아팠다.

철컥.

우다다다다다.

규연이 현관문을 막 열었을 때였다. 복도 쪽에서 달려 나오는 발소리가 크게 울렸다. 발소리의 주인은 당연히 나루였다.

“어윽.”

“나 속상한데 개소리나 하고.”

“…개소리?”

맨발로 현관까지 뛰어나온 나루가 규연의 등에 딱 달라붙어 안겼다. 격한 애정 표현에 놀란 규연이 슬쩍 고개를 돌려 나루를 쳐다봤다.

조그마한 머리통이 등에 파고들 때마다 머리카락이 쓸려 간지러웠다. 나루는 규연의 허리를 두 팔로 꼭 껴안은 채 놓아주지 않았다.

곧,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루가 제 속마음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걱정시켜서 미안해. 어제도 말했지만, 나한테 그런 일이 벌어질 줄 몰랐어. 변해 있는 동안 강아지인 내가 싫어서 자괴감도 들었고…….”

대뜸 시작된 진지한 이야기에 규연이 현관문을 도로 닫아 버렸다.

나루의 태도가 어딘가 많이 변해 있었다. 예전이었다면 무작정 다리를 붙잡고 매달렸을 텐데, 지금은 차분히 제 심정을 이야기해 주었다.

별일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더니, 역시 힘들었나 보다. 강아지로 변해 있는 동안 자괴감을 느꼈다니. 듣는 사람이 다 속상했다.

“그래도 너한테 돌아오고 싶어서 내 힘으로 도망쳤어. 오면, 그때 너희 아버지 집에서 혼자 빠져나왔을 때 화냈던 것부터 사과하고, 왜 그랬는지도 차분하게 설명하려고 했는데…….”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규연은 몸을 돌려 나루를 정면으로 껴안아 줬다. 그날 일을 아직 신경 쓰고 있을 줄은 몰랐다는 눈치였다.

오히려 사과해야 할 건 규연이었다. 헤어지라는 아버지의 막말에 상처받았을 텐데, 역으로 사과할 생각을 한 나루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규연이 등을 살살 토닥여 주자 나루가 말을 더 이어갔다.

“그런데 네가 이 상황에서 걱정된다고 집착하니까, 꼭 이전으로 돌아간 기분이 들어.”

예상치 못한 나루의 고백에 규연은 할 말을 잃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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