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연은 얼얼한 뒤통수를 손으로 쥔 채 눈을 두어 번 감았다 떴다. 세상이 까맣게 물들고 시야에 나루의 얼굴이 들이찼다.
진심으로 열이 뻗친 듯 올라간 눈썹과 앙다문 입술. 누가 보면 나루가 뒤통수를 얻어맞은 줄 알 거다.
나루는 저번부터 애 취급을 당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중이었다. 규연은 어떻게든 해명하고 싶었다.
“애 취급하는 거 아니고, 걱정돼서 그래.”
“걱정되는데 왜 다 하지 말라고 해?”
“다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계속 이야기를 이어가다가는 사소한 싸움으로 번질 것 같았다. 규연은 말끝을 흐려 버리고 침묵을 유지했다. 잠시 마음을 가라앉히는 거였다.
결국, 이 얘기는 미뤄 두기로 했다. 다시 차를 출발시킨 규연이 나루를 힐끔거리며 물었다.
“어디 아픈 곳은 없고?”
“…….”
몸 걱정이 먼저였다. 물어보는 목소리가 전보다 더 부드럽고 다정했다. 나루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대화가 이상하게 마무리돼서 찝찝한 모양이었다. 나루의 눈치를 보던 규연은 더 속도를 내며 달렸다.
다행히 집 근처라 빨리 도착할 수 있었다. 주차를 마친 규연은 내리라며 직접 조수석 문을 열어 줬다.
“내려.”
“…응.”
엘리베이터 앞에 선 둘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규연은 뾰로통한 나루의 표정을 보며 마음이 약해질 뻔했다.
집착이라고 해도 걱정이 되는 걸 어떻게 누를 수는 없었다. 잠시 한눈을 팔면 사라지고, 위험에 처하는데 어떻게 가만히 보고만 있을까.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른 규연이 턱짓으로 집 안을 가리켰다.
“들어가.”
“…….”
“얼른.”
“내가 죄수도 아니고. 나 그 들어가라는 말 싫어하는데…….”
들어가라는 말에 미묘한 표정으로 꿍얼거리던 나루가 터덜터덜 걸어 들어갔다. 며칠 만에 도착한 집이었다. 이상하게도 오늘은 서늘한 공기가 맴돌거나 하지 않았다.
거실은 웬일로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규연이 나루를 찾느라 뒤적거린 탓이었다.
집을 빙 둘러보던 나루가 규연을 멋쩍게 쳐다봤다. 그렇게 깔끔하던 규연이 집을 더럽게 방치하고 있었다니, 많이 걱정하긴 한 듯했다.
“먼저 씻고 나와.”
“…나 진짜 네 허락 없이 못 나가?”
건조한 말에 욕실로 향하던 나루가 규연의 옷 끝자락을 황급히 붙잡았다. 아까 차에서 나눴던 대화를 끝맺고 싶어서였다.
규연은 문득 무언가를 떠올려 보다가 질문을 던졌다. 황당한 감정이 목소리에 자연스레 섞여 있었다.
“예전에는 내가 이러면 좋아했잖아.”
“…그땐 그게 맞는 줄 알고.”
“그렇게 말하면 내가, 하.”
눈동자를 굴리던 나루가 조심스레 대답했다. 예전에는 규연이 감금을 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었다. 오히려 옆에 있게 해 줘서 고마울 따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자유를 알아 버렸고, 다른 사람이 자신을 통제한다는 것 자체가 답답했다. 그게 아무리 좋아하는 규연이더라도 말이다.
밀어붙이려던 규연이 나루의 안쓰러운 얼굴에 고개를 돌려 버렸다. 일부러 사람을 올려다보는데 눈망울이 맑아서 괜히 죄책감이 들었다.
규연은 마음을 다잡았다. 어쨌든 당분간은 나루가 위험해지지 않도록 유의 깊게 봐야 할 것 같았다.
“내 허락 없이 행동할 생각하지 마. 어딜 가도 같이 가고. 알겠어, 모르겠어.”
“…싫은데.”
“싫어도 안 돼.”
규연의 단호한 태도에 당황한 나루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반박하고 싶은데 당장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
꾸욱.
대신 규연의 팔뚝을 애교스럽게 찔렀다. 앙증맞은 손가락이 단단한 근육 위에 살포시 닿는 게 귀여웠다.
“수작 부리지 마. 안 돼.”
“수작 아니야.”
“아닌데 눈을 왜 그렇게 떠.”
“내가 뭘?”
규연은 필사적으로 이성을 붙들었다. 강아지 같은 애인이 작정하고 꾀어내려 드니 당해내기 어려웠다.
나루는 눈을 일부러 더 반짝이며 깜빡거렸다. 어디 이뿐일까. 규연의 팔 위를 손가락으로 간지럽히기까지 했다.
그래 놓고 아닌 척 시치미를 떼는 게 요망했다. 규연은 나루의 행동에 어이가 없어 웃음을 흘렸다. 그러자 분위기가 완전히 풀어졌다.
“무슨 짓을 해도 마음 안 바꾸니까, 들어가서 씻기나 해.”
“…내가 같이 씻자고 해도 마음 안 바꿔 줘?”
아니, 바꿀게. X발.
규연이 튀어나오려는 속마음을 애써 숨겼다. 뒤를 돌아 입을 틀어막으니 나루가 실실 웃었다.
강아지 수인이라면서 사람을 꾀어내는 게 여우가 따로 없었다. 날이 가면 갈수록 약아지는데 이상하게 밉지 않아서 신기할 정도였다.
“그런 말 함부로 하지 말고, 들어가라.”
“정말로 같이 안 씻어?”
“송나루, 너 나 시험해 지금?”
“…알면서 뭘 자꾸 물어보는 거지.”
중얼거리던 소리가 전보다 더 커졌다. 규연은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어이가 없어서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규연이 허망하게 입을 벌리고 있자, 가만히 얼굴을 바라보던 나루가 휙 돌아섰다.
마지막 기회 끝.
귓가에 스치듯 이야기한 나루가 욕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어디서 이런 밀당 스킬을 알아 온 건지 애가 다 탔다.
집착하는 건 규연인데, 왜 대체 본인이 휘둘리고 있는 걸까.
힘이 쭉 빠진 규연은 소파에 늘어져 앉았다. 며칠 내내 나루를 찾아다니느라 잠을 제대로 못 잤는데, 집으로 데려오고 나니 긴장이 한꺼번에 풀렸다.
하긴, 힘이 풀리지 않는 게 이상했다. 규연은 3일 내내 고작 4시간밖에 자지 못했다.
잠시 눈을 붙이고 일어나서 다시 동네를 돌고, 골목을 뒤지고 다녔다. 집에서 전화가 몇 통이나 걸려 왔으나 그걸 신경 쓸 틈이 전혀 없었다.
버티기 힘들 정도로 지쳤을 때 즈음, 카드 알림 문자가 도착하지 않았다면 쓰러졌을지도 모르겠다.
규연은 문자를 받은 후 몇 분 동안 벙쪄있었다.
아까의 상황을 떠올리던 규연이 핸드폰을 꺼내 문자를 다시 확인했다.
[승인 완료. ○○사우나. 7,000]
[승인 완료. ○○사우나. 1,500]
[승인 완료. ○○사우나. 5,000]
딱 컵라면 하나에 주전부리 몇 개 사 먹은 돈이었다. 다시 봐도 어이없었다.
핸드폰을 대충 소파에 던져 놓은 규연이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욕실에서 들려 오는 물소리가 평소보다 더 안정적으로 느껴졌다.
달칵.
세수를 마치고 나온 나루가 거실에 늘어진 규연을 한 번 쳐다보고, 곧장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쟤 지금 나 무시하는 거야?
“허…….”
말을 걸려던 규연이 헛웃음 쳤다. 왠지 고분고분하다 싶더니, 이제야 삐친 티를 내는 건가.
자리에서 일어선 규연은 나루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송나루, 나 아직 궁금한 거 많은데.”
“…….”
“대체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 건지, 이해가 안 돼. 솔직하게 말해. 어디 다녀왔어.”
규연이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나루는 며칠 동안 다른 사람에게 잡혀 있었다고 했다. 그것도 강아지로 변한 모습으로.
믿는다고는 했지만,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말이었다. 강아지로 변했다는 건 그렇다 쳐도, 다른 사람이 주워갔다는 게 특히 믿기지 않았다.
규연의 물음에 나루의 표정이 사납게 바뀌었다. 사실만 말해 줬는데 믿지 않는 게 짜증이 난 모양이었다.
먼저 화난 건 난데, 왜 자꾸 시비를 걸지.
잡혀 있는 동안 규연이 무척이나 보고 싶었는데, 막상 만나니 미웠다.
아직 연회장과 규연의 집에서 겪었던 일이 다 치유되지 않았는데…….
“솔직하게 말했잖아.”
“그게 다 사실이라는 거야?”
“사실이야. 또 안 믿는다고 해 봐. 진짜 집 나가 버릴 테니까.”
무어라 말을 더 이으려던 규연이 급하게 입을 다물었다. 대신 나루의 눈을 마주쳐 동공을 빤히 쳐다봤다.
흔들리지 않는 올곧은 눈동자. 저 말도 안 되는 일이 정말 사실인가 보다. 확실히 나루가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얼굴에서 의심을 지워낸 규연이 자연스레 나루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규연의 무게가 더해지자 침대가 푹신하게 들어갔다.
“그런데, 여기 있어도 돼?”
“여기가 내 집인데 있어도 되지, 그럼.”
소심해진 나루의 목소리에 규연이 일부러 더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대답했다.
“너희 아버지 화나셨잖아.”
“신경 쓰지 마. 괜히 까탈스럽게 구는 거야. 너는 그냥 내 옆에 계속 붙어 있기만 해.”
나긋하면서 다정한 톤에 나루가 얌전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딱히 해결된 게 없었지만, 규연의 태도가 믿음직스러워 걱정이 더해지지는 않았다.
대화가 마무리된 후, 짧은 정적이 돌았다. 나루는 벌떡 일어서서 지갑을 들고 돌아왔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가만히 지켜보던 규연이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뭐 해.”
“나 잠깐 밖에―.”
“앉아.”
“아니, 너 배고플까 봐 편의점에!”
“나가지 마.”
며칠 사이에 살이 빠진 규연을 안쓰럽게 보던 나루가 뭐라도 사 올 생각으로 옷을 껴입었다. 하지만 규연이 나가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도 무참히 씹히거나 끊겼다. 규연은 나루의 팔을 잡아당겨 침대 위에 몸을 던지듯 앉혀 놓았다.
빠직. 나루의 이마에 힘줄이 섰다. 기껏 걱정해서 챙겨주려고 했더니, 이런 취급을 받았다는 것에 마음이 상한 듯했다.
“유규연 짜증 나.”
“짜증 나도 어쩔 수 없어. 차라리 내가 다녀올게.”
차에서 끝난 줄 알았던 3차전이 시작됐다. 사이가 좋다가도 금세 스파크가 튀는 게 정신이 없었다.
규연은 대신 다녀오겠다며 나루의 손에서 지갑을 빼앗아 들었다.
“싫어, 나도 발 있어.”
“송나루.”
“뭐, 유규연.”
한마디도 안 진다. 부릅뜬 나루의 눈이 규연에게서 거두어지지 않았다. 규연 또한 이번에는 굳건히 버텼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맞물리며 대립했다. 때아닌 기 싸움이었다.
“내가 허락 맡으라는 말을 장난으로 한 것 같지.”
규연이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물론 나루에게는 타격을 입히지 못했다.
“집착해?”
“어.”
짜증 부리는 듯한 나루의 말에 짧게 대답한 규연이 인상을 구겼다. 당당히 집착하는 거라고 인정하니 나루가 코웃음을 쳤다.
여유로운 태도에 규연이 한마디 더 얹으려고 했을 때였다.
풀썩!
갑자기 규연의 몸이 기울어지더니 침대 쪽으로 확 넘어갔다. 나루는 쉴 틈을 주지 않은 채 규연의 배 위에 올라탔다. 한 손은 목을 세게 조르고 있었다.
이건 전 주인이 나루에게 자주 하던 행동이었다. 주로 말을 듣지 않을 때 이렇게 제압하곤 했다.
“나도 장난으로 싫다고 한 거 아니거든. 집착도 어설프면서.”
천장 아래로 나루의 뚱한 얼굴이 보였다. 집착이 어설프다면서 은근히 규연을 깔아뭉개는 발언을 내뱉는 게 기가 막혔다.
가만히 당해 주던 규연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