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6화 (86/130)


갑자기 사우나라니. 규연이 이 광경을 목격했다면 황당해했을 것이다.

그래도 꼬질한 모습으로 나타나 규연을 걱정시키고 싶진 않았다. 나루는 나름 규연을 배려하는 거였다.

“목욕만? 찜질방은.”

“목욕만.”

앞서 들어온 아저씨가 돈을 내고 수건을 받아 갔다. 나루는 둘의 대화에 귀 기울이다가 쭈뼛쭈뼛 카운터 앞에 다가갔다.

주인이 나루를 이상하게 훑어보더니 방금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목욕만? 찜질방은.”

“모, 목욕만.”

“청년, 반말하면 못 써.”

“목욕만 할게요.”

사람들과 비슷하게 행동하려다가 무례를 범하고 말았다. 민망해진 나루가 볼을 긁적이며 대답하자, 주인이 수건 두 개를 건네줬다.

“칠천 원.”

“자, 잠시만요.”

주머니를 뒤적이니 카드 하나가 나왔다. 이전에 규연이 쓰라고 줬던 카드였다. 나루는 아무 생각 없이 그 카드를 내밀었다.

“계산 끝났어. 가서 씻어.”

“아, 네.”

카드를 다시 돌려준 주인이 턱짓으로 남탕을 가리켰다.

남탕이라고 쓰인 천막을 걷으니 바로 신발장이 나타났다. 나루는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 넣어 두고 미닫이문을 열었다.

사물함이 빼곡하게 들어찬 내부에 헐벗은 아저씨 몇 명이 돌아다녔다. 나루는 황급히 눈동자를 돌리며 들어와 사물함을 열었다.

슬며시 옷을 벗으니 근처에 있던 시선들이 나루에게 꽂혔다. 곱상하니 앳되게 생긴 애가 동네 아저씨들이나 올 법한 대중탕에서 버벅이고 있으니, 쳐다보는 게 당연했다.

부담감에 고개를 돌린 나루가 아저씨들을 노려보니 그제야 시선들이 거두어졌다.

욕탕에 들어온 나루는 곧장 샤워기를 틀어 몸을 깨끗이 씻어냈다. 손을 움직이면서 머리로는 규연에게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생각 중이었다.

일단 그날 화낸 것부터 사과해야지. 뭐가 착잡했는지도 솔직히 말하고, 천천히 대화하면서 오해를 푸는 거야.

그리고 규연이 가족한테 내가 어떻게 인정받아야 하는지도…….

떨어지는 물을 맞다 보니 20분이 흘렀다. 비누로 몸을 뽀얗게 씻어낸 나루는 곧장 욕탕에서 나왔다.

사물함 앞에서 물기를 닦아낸 나루가 옷을 말끔히 껴입었다. 선풍기 앞에서 머리까지 뽀송하게 말려 놓으니 평소보다 유독 하얘 보였다.

“식혜랑 맥반석 하나.”

“가져가세요.”

사물함 열쇠를 반납하고 돌아가야 하나, 우물쭈물하는데 아까 봤던 아저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루는 남탕 안 카운터를 유심히 뜯어 보았다. 새카만 달걀도 있었고, 과자도 있었고, 뒤에는 우유와 식혜 심지어는 컵라면까지 진열되어 있었다.

꼬르르륵.

며칠 내내 밥을 먹지 않았더니 배가 고팠다. 나루는 카운터 앞으로 다가가 음식들을 구경했다.

저 아저씨처럼 달걀 하나에 식혜를 먹을까. 아니, 컵라면도 먹고 싶어.

그리 유쾌한 상황이 아닌데, 한 번 마음이 놓이니까 이상하게 한눈을 팔게 된다.

“저, 컵라면이랑 이거 계란이랑 식혜 주세요.”

나루는 결국 먹을 걸 주문했다. 물론 이번에도 결제는 규연의 카드로 했다.

뿌듯한 마음으로 음식을 받아 온 나루는 평상에 앉아 달걀부터 까 입에 넣었다.

두 볼이 빵빵해질 정도로 욱여넣고 나니 꼬르륵, 거리던 소리가 잦아들었다.

목욕탕은 처음인데, 씻고 나와서 먹는 식혜와 달걀이 지나치게 맛있었다.

규연이가 걱정하고 있으면 어떡하지. 돌아가서 성숙하게 일을 해결해야 하는데. 배는 고프고. 계란이 맛있다. 식혜는 무슨 맛이지.

어, 살얼음이 있다. 시원하다. 또 마시고 싶다. 컵라면은 언제 익어. 큰 걸로 살 걸 그랬나.

의식의 흐름이 점점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이성을 잃은 채 젓가락질을 하고 있었다. 컵라면 하나를 순식간에 해치운 나루가 남은 달걀을 깨서 모조리 입에 넣었다.

마지막으로 식혜를 원샷해 주니 입 안이 상쾌했다. 배도 적당히 부르고, 이제야 좀 사는 것 같았다.

“아, 맞다. 규연이.”

뒤늦게 규연의 존재가 떠올랐다. 나루의 표정이 다시 걱정에 휩싸였다. 뽀송하다 못해 볼이 복숭아 빛이 된 나루가 목욕탕을 빠져나왔다.

“다음에 또 올게요……!”

와중에 주인에게 인사하는 것까지 잊지 않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온 나루가 카디건을 더 여몄다. 방금 막 씻고 나와서 공기가 차게 느껴졌다.

집으로 돌아가면 규연이가 와 있을까.

규연의 생각을 하며 발을 딛었을 때였다.

“송나루!”

“어…….”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에 파고들었다. 거친 듯 매력 있는 목소리. 이건 규연의 목소리였다.

깜짝 놀란 나루가 뒤돌아보곤 어깨를 들썩였다. 어떻게 알고 온 건지, 규연이 이쪽으로 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덥석!

그리고 바로 어깨를 붙잡혔다. 거센 손길에 인상을 찌푸린 나루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말끔하고 뽀얀 나루와 달리 규연의 꼴은 말도 아니었다. 눈 밑은 퀭하고, 눈동자에 초점도 나가 있었고, 그 잠깐 사이에 살이 조금 빠져 있었다.

사나운 눈매로 나루를 노려보던 규연이 걱정 어린 말들을 쏟아냈다.

“집에 들어갔다면서, 왜 나한테 거짓말해. 여긴 또 왜 온 거고!”

“그게…….”

“일단 가. 밖에 있지 마.”

“자, 잠깐, 규연아!”

나루의 어깨를 붙잡아 끈 규연이 건물을 빠져나오자마자 조수석 문을 열었다. 그러더니 나루의 몸을 던지듯 밀어 넣었다.

우악스러운 손길에 못 이겨 조수석에 오른 나루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너무 당황스러워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눈치였다.

규연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운전석 문을 닫았다. 그리고 곧바로 차가 출발했다.

차 안의 공기가 삭막하게 맴돌았다. 나루는 며칠 사이에 변한 규연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사라졌다고 생각해서 이러는 거겠지. 하지만…….

대충 예상이 가긴 했으나, 거친 행동을 이해하긴 어려웠다. 온갖 수모를 당하고 온 뒤라 괜히 감정이 더 예민해졌다.

“내 가족 때문에 힘들게 한 건 미안해, 미안해 죽겠는데.”

“…….”

“네가 날 버리고 도망간 건 용서 못 하겠다.”

“도, 망……?”

뭔가 엇나가고 있었다. 도망가려 한 게 아닌데. 제대로 오해받은 모양이다. 나루가 무어라 변명하려 했지만, 규연의 입에서 아픈 말이 끝없이 튀어나왔다.

“어떻게 날 버리고 갈 생각을 해. 내가 무슨 마음으로 널 기다렸는지 알기나 하냐? 송나루.”

“도망간 거 아니야.”

속상함과 더불어 원망 섞인 목소리였다. 나루는 도망간 게 아니라며 침착히 대답해 주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말은 부정적이었다.

“그 상황에서 사라졌는데, 도망이 아니라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자그마치 사흘을 기다렸어.”

분위기가 이전의 규연 같지 않았다. 저택에서 헤어질 때까지만 해도 다정한 모습을 보여줬는데,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린 건지 의문이었다.

나루는 눈썹을 찌푸린 채 규연을 슬쩍 노려봤다. 그러자 시선을 느낀 규연이 급히 차를 세웠다.

“도망 아니라고 했잖아.”

“핸드폰도 두고 사라졌으면서, 뭐?”

“그냥 산책만 하려고 했어. 그런데 갑자기 몸이―.”

나루가 찬찬히 해명하려 하자 규연이 끼어들어 화를 냈다. 그나마 아까보다는 목소리가 덜 굳어 있었다.

“대체 누가 산책을 며칠 동안 하는데. 송나루, 변명할 걸 해. 집 나가서 목욕탕에나 가 있고. 누구는 걱정돼 죽을 시점에 컵라면이나 사 먹고, 하, 됐다.”

“…….”

컵라면 사 먹은 거 어떻게 알았지.

반박하려던 나루가 입을 꼭 다물었다. 갑자기 규연이 무서워졌다. 목욕탕에 있는 건 어떻게 안 거고, 심지어 컵라면을 사 먹었다는 것까지 전부 알고 있었다.

진지한 분위기인데 자꾸 생각이 다른 쪽으로 튀었다. 나루는 규연을 경계하며 몸을 떨어뜨렸다.

그러자 어처구니없다는 시선이 따라붙었다. 규연은 시선을 피하고 있는 나루를 집요하게 응시했다.

“송나루, 나한테 할 말 없냐.”

“…….”

“없냐고 물었어.”

“…커, 컵라면 먹은 거 어떻게 알았는데.”

다시는 도망가지 않겠다는 말을 듣고 싶었던 건데, 뜬금없는 말이 돌아왔다. 아니, 뜬금없다 못해 어이가 없어서 뇌가 굳은 느낌이었다.

규연의 두 눈이 멍해졌다. 나루는 진지했다. 진지하게 규연의 행동에 소름이 돋아 물어본 것뿐이었다.

어색한 정적이 둘 사이에 맴돌았다. 규연은 제가 잘못 들은 게 아닐까, 하며 되물었다.

“…뭐라고?”

“내가 컵라면 먹은 거 어떻게 알았냐고.”

한 번 내뱉더니 목소리가 전보다 더 당당해져 있었다. 나루는 조금의 집착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경계를 키워갔다.

졸지에 규연만 이상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방금까지 화가 가득했는데, 맥이 풀려서 몸이 늘어지는 것 같았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규연은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억지로 내린 채 마른 세수를 반복했다.

화가 한 김 식으니 분위기가 느슨해졌다. 나루는 이때를 노려 제 상황을 설명했다.

“나 너한테 오려고 노력했어. 잠깐 산책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몸이 강아지로 변했어. 집에 들어가려던 때에 어떤 사람이 나를 잡아가서…….”

“……뭐?”

들으면 들을수록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몸이 강아지로 변했고, 그걸 누가 데려갔다? 남이 들으면 미쳤다고 할 거다.

하지만 규연은 이해할 수 있었다. 나루가 강아지 수인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사실 이런 상황 자체가 믿기지 않지만, 나루를 보고 믿어 준 것이다.

잠시 생각을 비우던 규연은 고개를 설렁설렁 끄덕여 줬다.

“그래, 믿어, 믿을게. 대신, 앞으로 늦은 시간에 나갈 생각하지 마. 연락도 무조건 바로 받고.”

“…왜 나가면 안 돼?”

“지금 상황을 봐.”

“돌아왔잖아. 돌아왔으면 된 거잖아.”

조금 느슨해진다, 싶더니 다시 2차전이 시작됐다. 규연의 집착으로 시작된 2차전은 방금보다 더 격했다.

나루는 집에서 나가지 못한다는 말에 불만을 표했다. 이거 하지 마라, 저거 하지 마라, 하는 게 꼭 전 주인과 비슷해서 기분이 더러웠다.

“내가 걱정되니까 나가지 말라는 거야. 나가더라도 나랑 같이 나가.”

“싫어. 그럼 난 답답하게 살아?”

그 누구 한 명도 물러서지 않았다.

“내 부모님도 그렇고, 아무튼 상황이 전체적으로 안 좋으니까 말 들어.”

“또 애 취급해. 유규연 왜 그래?”

퍽!

애 취급하듯 걱정하는 모습에 열이 뻗친 나루가 시원하게 손을 날렸다. 야무지게 치켜든 손은 규연의 뒤통수를 세게 휘갈긴 후 제자리로 돌아왔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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