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5화 (85/130)


낯선 장소로 오게 된 후, 3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나루는 그간 여러 번의 탈출 시도를 해 보았다.

여자가 밥을 먹을 때 현관을 긁다가 붙잡히고, 빨래를 널러 갈 때 빠져나가려다가 붙잡히고.

탈출의 끝은 전부 붙잡히는 거였다.

여자는 친절했다. 밥도 잘 주고, 발도 깨끗하게 닦아 주고, 나루가 무섭지 않도록 무드등까지 켜 주기도 했다.

친절한 것과 달리 나루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이쯤이면 규연이 돌아왔을지도 모르는데, 괜한 오해를 만든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그래서 머리를 써 보기로 했다. 하루는 열심히 빠져나가기 위해 애를 썼고, 다음 날은 일부러 축 늘어져 일어나지 않았다.

여자는 왜 그러냐며 밥도 줘 보고, 쓰다듬어도 줬다. 하지만 늘어진 나루를 일으켜 세울 수는 없었다.

그렇게 또 하루가 지났다. 나루는 아침까지 힘없는 척하며 늘어져 있다가 여자의 눈치를 살폈다.

“오늘도 기분 안 좋아? 내가 금방 주인 찾아 주고 싶은데, 그게 어렵네…….”

‘필요 없다니까요!’

속으로 대답한 나루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푸흥, 크흥! 하고 나오는 소리에 여자의 두 눈썹이 팔 자로 늘어졌다.

나루는 현관 앞에 붙은 거울로 제 모습을 확인했다. 강아지로 돌아간 후, 다행히 이틀 동안 몸이 이상하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언제 갑자기 사람으로 변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전에 무조건 이 집을 나가야만 하는데…….

“끼잉…….”

며칠 괜찮더니, 오늘 처음으로 오한이 들었다. 강아지로 변했을 때와 비슷한 증상이었다.

나루는 위기를 느꼈다. 어서 이 집을 빠져나가지 못하면 정체가 발각될지도 모른다.

어떻게 해야 빠져나갈 수 있는지 주변을 둘러보던 중, 나루의 눈에 노란색 줄 하나가 보였다.

강아지 산책시킬 때 쓰는 목줄이었다. 예전에 키웠던 강아지에게 쓴 목줄인가.

사정은 알 바 아니고, 지금은 머리를 굴려야 한다.

“왕! 왕왕!”

“어머, 갑자기 기운을 차렸네. 너 괜찮아? 배 안 고파? 응?”

“멍멍! 왈! 끼잉, 왕왕!”

나루가 여자의 바지를 입으로 잡아끌며 왕왕, 짖었다. 별 의미 없이 짖은 건데 여자가 얼굴을 활짝 펴고 나루의 등을 쓰다듬어 줬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루는 여자의 바지를 열심히 끌어당겼다.

“어딜 가자고? 저기에 뭐가 있어?”

“왕!”

뒤늦게 그 뜻을 파악한 여자가 나루가 끄는 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현관 옆에는 고리 하나가 달려 있었는데, 그곳에 노란색 목줄이 걸려 달랑거리고 있었다. 나루는 목줄을 한 번 쳐다보고, 다시 여자의 바지를 물어 끌었다.

“산책?”

“왕왕!”

“산책 가자는 거였구나. 아휴, 전 주인이 그래도 답답하게 키우지는 않은 건가? 알겠어, 가자, 가자.”

혼잣말을 섞어 대답한 여자가 나루의 몸을 가볍게 안아 들었다. 그러더니 목줄을 빼내 나루에게 살살 둘러 주었다.

목을 꽉 조이는 줄의 느낌이 소름 돋았다. 나루는 세상에서 목줄이 제일 싫었다. 전 주인이 이걸 채우고 제멋대로 이끌 때면 괴로워서 목도, 무릎도 남아나지 않았었다.

그래도 탈출을 위해 있는 힘껏 참았다. 여자는 산책 갈 채비를 마친 후 현관으로 나와 신발을 신었다.

“자, 안겨서 나갈까?”

“끼잉, 낑!”

“싫어? 알겠어, 알겠어.”

나루의 몸을 집어 들려던 여자가 한 걸음 물러섰다. 나루가 싫다며 몸버둥을 쳤기 때문이다.

마른침이 꼴깍 넘어간다. 나루는 긴장한 채 발바닥에 힘을 주었다.

나루의 계획은 딱 하나였다. 현관문이 열리는 순간 뛰쳐 나가서 도망치는 것.

모든 게 천천히 흘러가는 기분이었다. 신발을 다 신은 여자가 운동화 끈을 두어 번 손보더니 현관 문고리를 집었다.

덜……컥.

드디어 문이 열렸다. 시야가 낮아져서 그런지 유독 현관문이 거대해 보였다.

철문 사이로 틈이 보이기 시작하고, 빌라의 허름한 계단이 시야에 들어찼다.

토도도돗!

그때였다. 작게 난 문틈 사이로 몸을 구겨 넣은 나루가 손쉽게 탈출에 성공했다.

“얘! 안 돼!”

토도도도!

여자의 다급하고 앙칼진 목소리에 나루가 발을 더 빨리 굴렀다. 강아지의 모습으로는 오랜만에 뛰어 보는 거라 버벅거렸지만, 금세 감을 잡아 괜찮았다.

이곳으로 올 때 길을 외워둔 게 제일 다행이었다. 계단을 허겁지겁 내려온 나루가 고개를 두어 번 두리번거린 후, 왼쪽 골목길로 내달렸다.

“거기 서! 위험해! 애기야!”

“히이, 헥, 흐에.”

여자가 부르든 말든 죽어라 뛰었다. 숨이 차서 헐떡거렸지만, 여기서 발을 멈췄다가는 다시 잡혀 갈 가능성이 컸다.

왼쪽 골목길을 나온 다음에 언덕 내려가기. 언덕을 내려가서 횡단보도 건너기.

머릿속으로 동선을 외우던 나루가 생각한 것처럼 발을 움직였다. 평소에 강아지로 있지 않아서 발바닥이 말랑거려 아스팔트 바닥 위를 달리는 게 힘겨웠다.

“도롯가로 가지 마, 가면 위험해!”

여자의 경고에도 아랑곳하지 않던 나루가 깜빡이는 초록 신호를 발견하고 잽싸게 횡단보도를 건넜다.

숨소리가 지나치게 가빠졌다. 신호등 불이 빨간색으로 변해서 여자가 발을 동동거리고 있는 게 보였다.

안심한 나루는 속도를 줄인 채 왔던 반대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내달리다 보니 발바닥이 쓰라렸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모르겠다.

“헤, 헥…….”

숨을 고른 나루가 주변을 꼼꼼히 둘러봤다. 여자는 나루를 완벽히 놓친 듯했다. 그 어딜 봐도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이제야 한시름 내려놓은 나루가 터덜터덜 걷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문제가 하나 더 있었다. 바로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거였다.

규연이 보고 싶지만, 이런 모습으로 마주하고 싶지는 않았다.

많은 생각을 품고 걷다 보니 어느새 익숙한 건물이 하나씩 보였다. 규연의 차를 타고 출근할 때마다 보던 건물들이었다.

내가 길을 잘 찾았구나. 기억하길 잘했어.

동네까지 돌아온 자신이 자랑스러웠으나, 마음은 여전히 심란했다.

“엄마아, 깡아지!”

“그래, 강아지네? 혼자인가?”

“가질래! 가질래!”

“안 돼, 얼른 와.”

번화가를 지나치던 중, 아이가 나루를 삿대질하며 소리쳤다. 그 목소리에 아이의 엄마가 대꾸해 주자, 아이가 나루를 갖고 싶다며 손을 뻗었다.

하마터면 꼬리를 붙잡힐 뻔했다. 나루는 잽싸게 몸을 피해 내달렸다. 안이든 밖이든 위험했다.

나루는 골목길로 들어와 몸을 숨겼다. 사람으로 돌아올 때까지는 이러고 있어야 될 것 같았다.

‘규연이는 뭐 하고 있을까.’

문득 규연을 생각하던 나루가 눈물을 머금었다. 차라리 짧게 괴롭힘당하고 끝내는 거라면 괜찮을 텐데, 이런 식으로 괴로워지니 버티기 힘들었다.

골목길을 배회하던 나루는 처음 이 세상에 도착했던 그곳을 발견했다.

‘차원 이동구가…….’

허공에 미미하게 일렁이던 차원 이동구의 색이 짙어져 있었다. 무언가 문제가 있는 걸까. 나루의 동공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전 주인과 함께 원래 있던 세계로 돌아간 도민이 생각났다. 도민은 그곳에서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는 건가.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나루는 한 걸음을 조심스레 내밀어 차원 이동구 가까이 다가갔다.

‘어…….’

자세히 보니 차원 이동구 한가운데가 굵게 찢어져 있었다.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설마, 설마 내 전 주인도 저걸 넘어서 날 찾으러 오지는 않겠지…….’

늘 하던 생각이었다. 나루는 머리를 애써 비워내며 뒷걸음질 쳤다.

저 너머로 넘어가서 사는 게 나한테 더 맞는 걸까.

찝찝한 마음이 들어서 괴로웠다. 왠지 이 앞에 서니 저 너머로 들어가야 할 것 같고, 기분이 이상했다.

나루는 벽 뒤로 달려가 몸을 숨겼다. 대신 얼굴만 빼꼼 내밀어 차원 이동구를 빤히 쳐다봤다. 생각과는 몸이 다르게 움직인 것이다.

나는 아르바이트도 하는 중이고, 친구도 생겼고, 직원들이랑 어울리면서 사회생활이라는 것도 해 봤어.

저 너머로 가기엔 이미 너무 많은 걸 알아 버렸단 말이야.

생각을 마친 나루가 고개를 휙 돌려 버렸다. 잠시나마 마음이 힘들어서 흔들렸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저 너머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다시 천천히, 침착하게 바꿔 가는 거야. 이 세상의 사람들처럼 변할 수 있도록. 노력하면 될 거야.

내년에는 인정받겠지, 안 된다면 그 이후에라도…….

욕심 같지만, 규연이 옆에 계속 남아 있고 싶다.

골목 깊숙한 곳에 숨은 나루가 몸을 웅크려 앉았다. 답답한 곳에서 나와 숨이 좀 트이니 마음이 놓였다.

생각 정리를 해서 그런가. 착잡한 감정도 들지 않았다.

알맞게 자란 풀을 이불 삼아 덮은 나루가 눈을 감았다. 지금 바라는 건 하나.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크우우…….”

눈을 떴을 땐 하늘이 어둡게 내려앉아 있었다. 나루는 기지개를 켜며 일어나 뻐근한 목을 돌렸다.

“너무 엎드려 잤나 봐…….”

어. 어라.

잠깐 잠들었다가 일어난 것뿐인데, 몸이 살짝 묵직했다. 속마음을 입으로 내뱉던 나루는 무언가를 깨닫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왕왕, 하는 소리가 아니라 익숙한 목소리가 내뱉어졌다. 몸도 묵직해졌고…….

고개를 내린 나루가 손을 내밀어 손가락들을 꼼지락거렸다. 짧고 동글동글한 강아지 발이 아닌 길쭉하고 흰 손이 보였다.

손 너머로는 아무렇게나 뻗어 있는 다리가 보였다. 그러니까, 드디어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는 거다!

“사람!”

너무 기쁜 나머지 팔짝 뛰던 나루가 입을 틀어막았다. 며칠 전에 벌어진 일은 어느새 머릿속에서 떠난 지 오래였다.

규연에게 화를 냈건, 신경질을 부렸건, 다 모르겠고 그냥 어서 보고 싶었다.

골목길을 빠져나온 나루는 근처 가게 유리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확인했다.

잠옷 차림에 걸치고 나왔던 카디건, 바지와 얼굴, 그리고 머리카락이 엉망이었다. 꼬질꼬질한 게 영 거지 꼴 같았다.

이런 모습으로 규연이를 마주할 수도 없고. 어쩌지.

당장 집까지 달려가도 모자랄 판에 꼬질꼬질한 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주변을 둘러보던 나루는 건물 가장 위층에 빛나고 있는 간판을 발견했다.

24시 사우나.

마침 목욕 바구니를 든 남자 한 명이 건물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나루는 뭐에 홀린 듯 남자의 뒤를 따라 사우나로 향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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