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잘 도착했어?]
[응.]
메시지 답장을 받은 후로부터 규연의 마음이 편치 않았다. 쓸데없는 말이라도 꼭 한마디씩 덧붙이던 나루가 오늘은 단답을 보내왔다.
마음대로 나가지도 못하는 상황에 연락까지 애매하게 끊겨 버리니 미치고 돌아 버릴 지경이었다. 규연은 집 안을 정신없이 돌아다니며 핸드폰만 쳐다보았다.
다시 한번 메시지를 보내 볼까. 집에 잘 들어간 것 같은데 괜히 들쑤시는 건 아닐까.
일단은 참기로 했다. 이것도 걱정을 빙자한 애 취급이었기 때문이다.
규연이 정신없이 돌아다니자 보다 못한 유 회장이 헛기침을 내뱉었다.
“큼, 크흠. 정신 사나우니까 허튼 생각하지 말고 어서 네 방으로 올라가.”
“진지하게 물을게, 아빠.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유 회장의 말에 얌전히 대답하긴커녕, 규연은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두 어깨가 으쓱이고, 눈썹 한쪽이 신경질스럽게 올라갔다.
곱게 자란 철없는 막내아들 아니랄까 봐. 어투부터 표정 하나까지 건방졌다. 그런데도 유 회장은 이상함을 느끼지 못한 채 혀를 끌끌 찼다.
“유규연, 규연아. 차라리 예전처럼 여자를 만나. 어? 너 그런 거 잘했잖니. 금방 만나고, 금방 질리고. 아까 그 남자도 그런 거냐? 대답해 봐.”
아까는 벼락같이 화를 내더니, 잠깐 사이에 화가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유 회장은 규연을 타이르듯 말했다. 당연히 효과는 미미했다.
규연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졌다. 여자. 금방 만나고, 금방 질린다. 다 맞는 얘기였다. 하지만 지금의 규연과는 거리가 먼 말들이었다.
금방 만났을지는 몰라도, 나루는 금방 질릴 수 없는 존재였고, 헤어질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누가 금방 질린대. 나 그럴 생각 없어. 걔한테 정착했다고.”
“너, 또! 나 자꾸 화나게 할 거냐!”
“나 좀 보내 줘. 걔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떡해.”
아들의 충격적인 발언들에 유 회장이 눈을 부릅떴다. 여자였다면 차라리 덜 놀랐을 텐데, 남자에게 정착이라니. 이건 말도 안 됐다.
규연은 미동도 하지 않고 서서 보내달라는 듯 현관문을 쳐다봤다. 자신이 없는 사이에 나루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큰일이었다.
하지만 유 회장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허락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규연은 억지로 현관문 손잡이를 붙잡았다.
“너, 너 그거 열고 나가기만 해 봐!”
“내가 애도 아니고 왜 그래.”
“나가는 순간 이 아비 쓰러질지도 모른다. 어?”
“…….”
한숨밖에 안 나왔다. 규연은 잠시 휴전하고 뒤돌아 나루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당장은 아버지를 설득하기 어려울 듯해 일단 전화라도 해 보려는 모양이었다.
Trrrr…….
신호음이 여러 번 이어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규연의 낯빛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유 회장은 실시간으로 변하는 규연의 표정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Trrrr…….
<전화를 받지 않아 음성사서함으로…….>
전화 연결에 실패했다. 규연은 곧장 끊기 버튼을 누른 후 다시 전화를 걸었다.
<삐―.>
음성사서함으로 넘어가는 알림음이 울렸다. 규연은 바로 시간을 확인했다. 현재 시각은 밤 열한 시. 나루가 잠들 시간이 아니었다.
설마, 아까 일로 화가 나서 일부러 전화를 받지 않는 걸까.
의심해 보던 규연이 다시 전화를 걸었다. 벌써 세 번째 전화 연결이었다. 유 회장은 규연의 착잡한 얼굴에 같이 궁금해하며 슬그머니 근처로 다가왔다.
규연은 제 아버지가 다가온 줄도 모르고 열심히 전화를 걸었다.
세 번째 전화도 실패, 네 번째도, 여섯 번째도, 아홉 번째도.
전부 실패였다. 나루가 전화를 받지 않는다.
순간 규연의 눈빛이 싸하게 변하더니 초점이 사라졌다. 유 회장은 못 보던 모습에 당황하며 규연의 상태를 살폈다.
“그러게, 그 남자도 제가 잘 생각해 보니 아니라고 느꼈던 거다. 응? 규연아.”
“그럴 리가 없어.”
믿을 수 없는 현실에 고개를 젓던 규연이 계속해서 전화 연결 버튼을 눌러댔다. 연결되지 못한 전화가 방금 것까지 20통이 넘어가고 있었다.
당장 집에 돌아가서 나루의 얼굴을 직접 마주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규연은 유 회장의 경고를 가볍게 무시한 채 현관문을 열었다.
철컥.
그러자 뒤에서 유 회장의 처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규연! 어디 가, 어딜!”
“놔.”
막무가내로 나온 규연이 유 회장의 손을 뿌리쳤다. 밖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하자 규민과 규성 또한 뛰쳐나와 상황을 살피기 급했다.
“규연아, 왜 그래.”
“가야 해. 송나루가 전화를 안 받아.”
“택시 태워서 잘 보냈잖아, 자는 거겠지. 일단 오늘은 집에 있고, 내일 아침에라도…….”
“비켜. 내일 아침에 가면 걔 못 찾아.”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무뚝뚝하게 내뱉어졌다. 단호히 대응한 규연은 규성의 옆을 그대로 지나쳐 버렸다.
가족들 모두 규연의 돌발 행동에 놀라 넋이 빠져 있었다. 유 회장이 급히 달려가 규연을 잡아 보려고 했으나, 이미 늦은 뒤였다.
현관 근처에서 차 키 하나를 챙겨 든 규연이 돌계단을 빠르게 내려갔다. 버튼을 누르니 제일 앞쪽에 있던 외제차 문이 열렸다.
그러는 도중에도 손은 쉬지 않고 있었다. 핸드폰 화면에 나루의 이름이 쉴 새 없이 반짝였다.
규연의 눈동자는 진동이 온 듯 자잘하게 떨리는 중이었다. 숨을 들이마시며 애써 이성을 되찾은 규연은 액셀을 세게 밟았다.
“유규연! 거기 안 서!”
막 대문을 빠져나갔을 때 즈음, 뒤에서 유 회장의 화난 목소리가 버럭 울렸다. 사이드미러로 그 모습을 힐끔거리던 규연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골목길을 벗어났다.
Trrrr…….
“왜 안 받는 거야, 송나루.”
답답한 마음에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아무리 화났다고 해도 여러 번 달래면 금세 괜찮아지는 앤데, 이렇게까지 전화를 받지 않는 게 이상했다.
집까지 도착하려면 대략 40분 정도가 소요된다. 40분이 이렇게나 긴 시간이었던가.
“이런, 씹.”
하필이면 신호까지 도와주지 않았다. 가는 족족 빨간불에 걸려 욕지거리가 잇새로 흘러나왔다.
규연은 습관적으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나루와 함께 지내면서부터는 입에 잘 대지 않았는데, 착잡해지니 손이 저절로 담배를 찾았다.
창문을 끝까지 내린 규연이 팔을 걸친 채 담배를 태웠다.
잠시 후, 신호등이 초록색 불로 바뀌었다. 규연은 바로 액셀을 밟아 속도를 냈다.
조금 더 달려가니 익숙한 아파트 단지가 보였다. 규연은 주차도 제대로 하지 않고 내렸다.
40분 걸릴 거리를 정확히 25분 만에 도착했다. 액셀을 죽어라 밟은 덕분이었다. 규연은 내리자마자 엘리베이터부터 잡았다.
<1층입니다.>
층수를 누른 후, 황급히 문을 닫으니 엘리베이터가 천천히 올라갔다. 규연은 올라가는 층수를 바라보며 인상을 구겼다.
“왜 이렇게 느려.”
<문이 열립니다.>
1분이 지나지 않아 문이 열렸다. 규연은 뛰듯이 내려 현관문을 열었다. 비밀번호를 급하게 눌러서 두 번이나 오류음이 울렸다.
덜컥!
그렇게 집 문을 열었다.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복도를 지나친 규연은 거실 불을 환하게 켰다.
“송나루…….”
유독 서늘한 공기가 집 안을 삭막하게 만들고 있었다. 소파를 먼저 훑어본 규연이 허망하게 나루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송나루!”
거실에는 나루가 없었다. 불안한 마음에 제 방으로 뛰쳐 들어간 규연이 침대를 마구 뒤졌다.
커다란 침대에도, 욕실에도, 드레스룸에도, 다른 방에도.
없다.
아무리 찾아보아도 나루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규연의 눈이 탁해졌다. 넋을 놓고 있던 그는 이 상황을 믿지 못하고 계속해서 집 안을 뒤지기 바빴다.
“송나루! 나루야, 나와. 어디 있어.”
다정한 목소리로도 불러 보고, 소리도 질러 보았는데, 어째서 머리카락 한 올 보여주지 않는 걸까.
전화를 거는 규연의 손길이 전보다 더 다급해졌다.
지잉. 지잉.
신호 연결음과 함께 진동음이 울렸다. 소파에서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규연은 진동음을 쫓아 소파를 뒤적거렸다.
“이건…….”
나루의 핸드폰이었다. 주인은 어디로 가고, 핸드폰만 소파에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다.
규연은 정신이 아찔해지는 걸 느꼈다. 핸드폰이 집에 있다는 건, 그래도 나루가 집에 한 번 들렀다는 거였다.
씻고, 밥이라도 먹은 상태라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아무튼 일이 더 커져 버렸다. 핸드폰을 두고 가서 연락도 되지 않고, 어떻게 찾을 방법이 없었다.
덜컥!
규연은 바로 집을 나섰다. 나루가 없다는 걸 알았으니 찾으러 가야만 했다.
“이 시간에 무작정 어딜 나간 거야……!”
혼자 신경질을 내던 규연이 타고 왔던 차에 그대로 몸을 실었다.
나루가 어디로 나갔는지 모르겠지만, 우선 이 동네를 전부 돌아보는 게 좋을 듯했다.
“하아…….”
규연의 손가락 사이에서 담배가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새벽 늦은 시간이 될 때까지 차를 끌고 돌아다니며 나루를 찾아다녔다.
좋게 헤어진 것도 아니고, 최악의 상황에서 혼자 집에 보냈던 거라 죄책감이 가시지 않았다.
게다가 두 사람은 처음으로 싸움 비슷한 걸 해 봤다. 싸움이라기엔 나루의 일방적인 감정 호소였지만.
사실, 규연은 나루의 말에 적잖게 놀랐다. 늘 해맑게만 행동해서 걱정 따위 없는 줄 알았는데, 알게 모르게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던 것 같아 미안했다.
지난날의 행동을 돌이켜볼 때마다 후회가 밀려들었다. 한숨을 내쉬는 게 지겨울 정도였다.
“송나루, 어디 있는 거야…….”
진심 섞인 혼잣말이 새어 나왔다. 속상하다는 톤이 그의 마음을 고스란히 나타내 주고 있었다.
창문 밖을 유심히 살피며 차를 조심스레 몰고 다닌 지 4시간째.
새벽 늦은 시간이라 도로에 차가 없었다. 규연은 포기하지 않고 작은 골목까지 모조리 살펴봤다.
걱정이 커서 그런지 잠도 오지 않았다. 규연은 그렇게 하루를 꼬박 지새웠다.
동이 트고, 하늘이 푸르스름하게 물들었다. 곧 있으면 슬슬 직장인들이 출근할 시간이었다.
규연의 눈 밑이 퀭해졌다. 혹시 몰라 다시 집까지 와 본 그는 텅 빈 거실을 눈에 담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믿고 싶지 않았는데…….
송나루가 사라졌다. 나를 두고. 사라져 버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