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3화 (83/130)


22층, 20층, 15층…….

큰일이다. 이건 비상이었다. 상상치도 못한 일이 갑자기 벌어지고 말았다.

가쁘게 내쉬던 숨이 점차 안정되고, 울렁거리던 속도 가라앉았다. 저리던 팔과 다리도 언제 그랬냐는 듯 멀쩡해졌다.

정신을 차린 나루는 눈을 끔뻑이며 층수를 확인했다.

10층, 8층, 4층…….

그런데 이상하게 엘리베이터 문이 아까보다 더 크고 길어 보였다. 원래 이랬던가.

한 걸음 딛으려던 나루는 사뿐히 내려앉는 발의 느낌에 놀라 소리를 질렀다.

“크릉, 멍!”

…….

어. 어어?

분명 악! 하고 비명을 질렀는데, 생각과 다른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니까, 사람 소리가 아닌 강아지 울음소리가…….

<1층입니다. 문이 열립니다.>

드륵.

황당해하고 있는 사이,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다. 아직 상황 파악도 다 마치지 못했는데 문이 열리기 시작하니 마음이 조급해졌다.

나루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자신은 지금 인간 상태가 아니었다. 강아지 귀나 꼬리만 쏙 튀어나온 정도가 아니라, 아예 강아지로 변했다는 거다.

두근. 두근. 두근.

심장이 다른 의미로 쿵쿵 뛰어댔다. 이쪽으로 넘어오면서는 수인화가 크게 진행되지 않아서 괜찮을 줄 알았는데. 상황이 안 좋게 흘러갔다.

귀나 꼬리가 이유 없이 갑자기 튀어나왔을 때부터 의심해 봤어야 했다. 조금이라도 조심성 있게 굴었다면, 이런 최악의 상황까지는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일단 집으로 다시 올라가야겠어.

이러다가 사람들 눈에 띄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언제 또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올지 모르니 말이다.

그렇게 엘리베이터에 다시 올라타려던 때였다.

“어머, 웬 강아지가. 아가, 너 혼자 타고 내려왔어?”

“……!”

1층에서 들어오던 아주머니 한 분이 엘리베이터 안에 있는 나루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기겁하며 놀란 나루는 펄쩍, 뛰어 아주머니의 손을 피하고 잽싸게 엘리베이터를 빠져나와 달렸다.

정신없이 달려 나와 보니 아파트 입구였다. 나루는 유리에 비치는 제 모습을 발견하고 절망에 빠졌다.

하얀 털, 쫑긋 선 귀, 축 늘어진 꼬리. 완벽한 강아지였다.

그저 산책을 하고 싶었던 것뿐인데, 어쩌다 일이 이렇게까지 된 거야?

멍하니 서서 낯설어진 세상을 바라보던 나루가 무언가를 깨달은 듯 눈을 번쩍 떴다.

설마, 이쪽 세계에서도 주기가 통하는 건가.

보통 성인이 된 후의 강아지 수인들은 수인화를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고 해도 대부분 꼬리와 귀만 내놓지, 완전한 강아지로 변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딱 하루는 달랐다.

바로 자신이 태어난 날. 이때는 수인화를 조절하기 힘들어져서 강아지로 변해 있어야만 했다.

나루는 아직 생일을 맞이하지 않았다. 조금 더 있어야 생일인데, 이곳으로 넘어온 후 수인화가 불안정해져서 이상이 생긴 듯했다.

낮아진 시야, 다리도 네 개, 빨라진 심장 박동.

나 정말 강아지로 변한 거 맞구나.

나루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안 그래도 강아지 수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이 세상에서 모자란 사람 취급받고, 불편을 겪고 있는데. 왜 하필 이 시기에 완전 수인화가 되어야 하는 건지 억울하고 속상했다.

이 상태로는 아무것도 못 하잖아….

집으로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문제였다. 강아지인 상태로는 공동현관조차 열지 못할 것이다.

어찌저찌 들어간다 해도, 도어락을 누르지 못하면 의미가 없었다. 게다가 규연과 떨어져 있는 상태라 도움을 청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빵, 빠앙-.

“낑……!!”

허망한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중, 클랙슨 소리가 크게 울렸다. 나루는 잽싸게 튀어 인도로 올라왔다.

하마터면 사고를 당할 뻔했다. 시야가 낮아져서 그런지 주변을 제대로 살피기 어려웠다.

인도로 올라와 구석에 처박힌 나루는 몸을 덜덜 떨었다. 침착해지려고 노력했으나, 본능적으로 떨리는 몸을 어찌할 수는 없었다.

멍청하게 떨지 마, 송나루. 문을 못 열어도 집 앞에 가 있자. 그러면 규연이가 오겠지.

그래, 바깥보다는 차라리 집 앞에서 규연을 기다리는 게 최선이었다.

나루는 다시 왔던 길을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리 멀리 나오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여기 혼자 있으면 위험해. 엄마 잃어버렸어? 응?”

“낑, 끼잉, 멍!”

방향을 틀어 집으로 향하려는데, 갑자기 몸이 붕 뜨더니 온기가 느껴졌다.

당황한 나루가 발버둥 치자 여자가 진정시키며 몸을 더 단단히 껴안았다. 아무래도 주인 잃은 강아지로 착각한 모양이었다.

‘아니, 안 위험해, 놓으세요!’

아무리 목소리를 내어 봤자 소용없었다. 나오는 게 전부 강아지 울음소리였기 때문이다.

여자는 나루의 흰 털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며 주변을 슥 훑어봤다.

“이 근처에 강아지 찾는 사람은 없었는데, 어쩌지. 조금 더 돌아다녀 볼까.”

“끼이잉, 낑!”

“으응. 그래, 그래. 엄마 찾아 줄게.”

‘아니야! 돌아다니지 마세요!’

나루의 울음소리를 알아듣지 못한 여자가 정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번화가 쪽으로 갈수록 규연의 집이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있는 힘껏 발버둥을 쳐봤지만, 여자가 못 빠져나가도록 품에 꼭 껴안아 도망칠 수가 없었다. 강아지를 많이 다뤄 본 여자인 듯했다.

어느새 주변 풍경이 바뀌었다. 여자는 번화가 중심에서부터 끝까지 걸어 다니며 주인을 찾겠다고 나섰다.

“혹시, 강아지 찾는 사람 보신 적 없으세요?”

“아니요, 못 봤어요. 어머, 얘 좀 봐. 너무 귀엽다.”

지나가던 사람들에게 주인의 행방을 물어볼 때면 다들 고개를 저었고, 한 번씩 나루를 만지고 지나갔다.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이라면 마냥 좋아했을 텐데, 지금은 스트레스만 쌓였다.

이대로 더 멀어지면 어떡하지. 규연이한테 나간다고 연락도 안 했는데. 어서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마음과 달리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나루는 자신이 강아지 수인이라는 것을 진심으로 후회하고 원망했다.

나는, 나는 왜 이렇게 태어나서.

어떻게든 도망쳐야겠다는 마음에 조급해진 나루가 여자의 손을 힘껏 깨물었다.

콱!

“아앗! 너 놀랐구나, 괜찮아. 괜찮아.”

이게 아닌데…….

뭘 해도 실패로 돌아갔다. 힘 빠진 나루가 잠시 늘어져 있자, 기회를 노려 몸을 편하게 든 여자가 목덜미를 자세히 살펴봤다.

“목걸이도 없고, 너 혹시 주인이 버리고 간 건 아니겠지? 아휴.”

“끼잉, 멍! 멍!”

‘안 버렸어요. 나 집 있어. 가야 한단 말이에요! 놔!’

나루가 서럽게도 짖어댔다. 여자는 자그마한 흰색 뭉치를 품에 다시 껴안고 진정시키듯 등을 쓰다듬어 줬다.

잃어버린 적 없는 주인 찾기만 벌써 한 시간째였다.

빠져나오려고 애쓰느라 진을 다 뺀 나루는 헥헥거리며 몸을 늘어뜨렸다. 

나루가 지쳤다는 게 눈에 보이자, 여자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쳐다보며 발걸음을 돌렸다.

“안 되겠다. 내가 임시 보호하고 있어야겠어. 우리 집으로 가자.”

뭐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

주인을 찾아 주지 못한 여자는 나루를 집으로 데려가 주겠다며 차 문을 열었다.

차라리 이 동네였더라면 도망쳐도 쉽게 길을 찾을 수 있을 텐데, 차까지 타게 되다니.

나루는 여자가 자신을 내려놓는 틈을 타 잽싸게 뛰쳐 나가리라 마음먹었다.

토도돗!

“몸집은 작은데, 힘은 넘치네. 너 그렇게 도망가면 정말 큰일 나.”

“끼잉! 낑!”

“우리 집에 얌전히 있다가, 주인 찾아서 나가자?”

나루의 계획이 처참히 무너졌다. 뛰쳐나가려던 순간 목덜미가 붙잡혀 발만 열심히 구른 꼴이 되어 버렸다.

차마 닿지 못한 문고리에 발톱이 긁혀 토도도, 하는 소리가 났다.

여자는 조수석 문을 단단히 잠그고, 운전석에 앉자마자 모든 창문과 문까지 전부 잠가 놓았다.

나루의 작고 동그란 머리가 창문에 딱 붙었다. 힘겹게 서서 창문을 짚고 있던 나루는 멀어지는 아파트를 바라보며 울상을 지었다.

안 돼, 규연아……!

“끼잉! 멍! 낑낑!”

“이거 무서운 거 아니야. 차 무서워하니? 정말 주인이 버리고 간 건가. 30분만 가자, 30분만.”

‘제발 이 문 좀 열어! 나 버려진 강아지 아니에요! 멋대로 주워 가지 마세요!’

여러 번 낑낑거리고 짖어 봐도 여자는 차를 멈춰 세우지 않았다. 그렇게 전쟁 같은 30분이 지났다.

서울 한복판에서 조금 더 떨어져 나온 이곳은 규연의 집 근처보다 훨씬 더 한적했다.

의도치 않게 모르는 곳까지 와 버렸어…….

모든 게 낯설어 경계하며 주변을 힐끔거리고 있으니 여자가 나루를 껴안고 내렸다.

여자의 집은 한적한 곳에서도 조금 더 깊이 들어가야 했다. 어두컴컴한 골목길이 두렵고 무서웠지만, 나루는 주변을 열심히 둘러보며 길을 외웠다.

집에서 나가는 길이라도 알아두면 도망치기 수월할 거야.

덜컹.

겉이 허름한 주택의 문을 연 여자가 방 안으로 나루를 들여보냈다. 내부는 겉과 다르게 깔끔하고 적당히 넓기까지 했다.

신발장을 대충 정리하고 들어온 여자는 구석에 몸을 숨긴 나루를 발견하고, 사료와 물을 가져와 내밀었다.

“자, 배고프지? 이것부터 먹어.”

“…….”

“이거 싫어? 안 먹을 거야?”

낮은 그릇에 담긴 사료를 가만히 바라보던 나루가 고개를 휙 돌려 버렸다.

나는 강아지가 아니야. 나는 사람이야.

떡하니 강아지로 변해 있으면서도 자신을 사람이라고 생각한 나루가 사료를 거부했다. 그릇에 코를 처박고 사료를 먹는 짓은 다시 하고 싶지 않았다.

사료도 먹지 않고 늘어져만 있는 나루의 모습에 여자가 걱정을 품었다.

나루는 여자의 걱정 따위 들리지 않았다. 아마 저 여자보다 자신의 걱정이 더 컸기 때문일까.

고개를 돌리던 나루가 현관 옆 전신거울에 비친 자신을 발견하고 힘없이 드러누웠다. 짧은 두 팔이 쭉 뻗어 머리를 감싼 게 분위기에 맞지 않게 귀여웠다.

나는 왜 이 모양일까. 얼른 도망쳐야 하는데.

게다가 언제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올지 모른다. 이 상태라면 낯선 사람에게 강아지 수인이라는 걸 들킬 수도 있었다.

이 생각이 들자마자 온몸이 서늘해지면서 정신이 퍼뜩 들었다.

위기감을 느낀 나루는 본격적으로 도망칠 기회를 보기 시작했다.

마음은 침착한데도, 몸이 자꾸만 덜덜 떨렸다.

이틀, 아니, 하루 안에는 무조건 도망쳐야 한다. 강아지 상태일 때 도망치지 못한다면…….

앞일은 생각도 하기 싫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