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들어가 있으라고 했잖아!”
나루가 처음으로 소리를 질렀다. 설움이 터짐과 동시에 복잡한 속마음까지 섞여 소리가 더 날카롭게 날아들었다.
규연은 그런 나루를 달래지도 못하고 가만히 서 있었다. 당황스러운 감정도 들었고, 무엇보다 건드리면 안 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흉부가 가쁘게 들썩였다. 나루는 답답한 가슴을 주먹으로 쳐가며 화를 억눌렀다.
“네가 다 알아서 하지 마.”
“…뭐?”
“너는 내 주인 아니라며, 우리 이제 애인 사이라며. 그런데 왜 나를 자꾸 애 취급해? 나도, 나도 보통 사람이랑 똑같아.”
규연은 그제야 나루의 말을 이해했다.
연회장에서 내내 모자란 사람 소리를 들은 나루는 집까지 끌려와서도 걸림돌 취급을 받았다. 그런데 애인이라는 저까지 나서서 걱정된다는 핑계로 나루를 통제한 것이다.
딱히, 애 취급을 한 건 아니었지만 나루의 시점에서 보면 충분히 오해할 만했다.
규연은 제 마음부터 차분히 가라앉힌 후, 이야기를 이어가 보기로 했다.
“그냥, 너희 아버지 화 풀리시면, 그때 보자. 나는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하지만 나루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먼저 이야기를 마무리한 그가 뒤돌아서자, 규연이 저도 모르게 다가가 나루의 자그마한 몸을 뒤에서 감싸 안았다.
이런 상태의 나루를 혼자 둬도 괜찮은 걸까. 걱정됐으나 굳이 이 감정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붙잡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우선 보내줘야 할 것 같았다.
“그런 뜻으로 말한 거 아니었어. 오해하지 마.”
“…….”
“집 가면 따듯한 물로 씻고, 밥도 챙겨 먹어. 웬만하면 나한테 연락도 하나 남겨 줘.”
나긋해진 목소리가 나루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규연은 나루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스레 부탁했다.
다정한 태도에 나루는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방금까지 버럭 소리를 지른 게 괜히 미안해져서 뒤를 돌아볼 수가 없었다.
“이건 네가 애 같아서 걱정하는 게 아니라, 그냥 애인으로서 걱정돼서 그래.”
“…….”
“택시만 잡아 주고 들어갈게.”
“……응.”
드디어 허락이 떨어졌다. 규연은 나루의 어깨를 감싸 안은 채 대문 밖으로 나와 곧장 택시를 잡았다.
기사에게 주소를 불러 준 그가 어느새 뒷좌석에 올라탄 나루를 복잡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나루는 일부러 눈을 마주치지 않겠다는 듯 앞만 쳐다보고 있었다. 규연의 다정한 얼굴을 보면 눈물이 왈칵 터져 나올까 봐, 있는 힘껏 외면했다.
“연락해, 나루야.”
“…….”
“대답해 줘. 한 번만.”
“…응.”
규연의 간절함에 나루가 잠긴 목소리로 대답해 주자 뒤늦게서야 뒷좌석 문이 닫혔다. 택시는 곧바로 출발했다.
규연은 제 시야에서 멀어지는 나루를 끝까지 응시하며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바보처럼 아버지의 반대에만 신경 쓰느라 나루의 속마음을 알아채지 못한 스스로가 한심했다.
저쪽 세계에서는 지하실에 갇혀 살았고, 한마디로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다는데. 이쪽에서마저 모자란 취급을 당한 그 기분은 말도 못 할 정도로 수치스럽고, 처참했을 것이다.
마냥 천진난만하게 굴어도 세상에 적응하고 싶어 했고, 사람들과 잘 어울려 지냈다. 그래서 괜찮은 줄로만 알았다.
“하아…….”
괜찮긴 무슨, 여기도 나루가 원래 살던 세계만큼이나 더러운 인간들이 판을 쳤다. 예를 들어 도건혁 같은 것들.
그런 인간들 때문에 잘 살아갈 수 있었던 애가 흔들리고 있다.
규연은 담벼락에 흘러내리듯 기대앉아 마른세수를 반복했다. 나루가 화내던 모습을 되돌려보니, 문득 몇 개월 전의 자신이 떠올랐다.
나루를 모자란 사람처럼 보고, 어리숙한 행동에 답답함을 느끼고, 만만히 보던 그때.
잘 생각해보면 자신도 처음에는 나루를 이해하지 못하고, 막 대했었다. 쭉 붙어 있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도건혁처럼 나루를 대했을지도 모른다.
지금이야 나루의 행동이 그때와 확연히 달라졌다는 걸 알고 있지만. 애초부터 이해하려 하고, 알려주려는 마음을 품지 않았다면?
갑자기 가슴이 쓰렸다. 몇몇 인간들이 나루를 모자란 사람 취급하는 건, 제대로 들여다보려 하지 않아서겠지.
송나루는 이 세상에 완벽히 적응해 가는 중이고, 절대 멍청하기만 한 애가 아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규연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생각이 부풀려질수록 머리가 지끈거렸다. 규연은 한숨과 함께 머릿속을 비워냈다.
다 됐고, 나루가 혼자 있는 동안 제발 괜찮았으면 좋겠다.
* * *
도어락 잠기는 소리가 현관 복도를 가득 메웠다. 텅 빈 신발장에 나루의 하얀 운동화 한 쌍만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오늘따라 집 공기가 서늘했다. 나루는 아무도 없는 거실을 스치듯 바라보고, 욕실로 향했다.
우선은 규연이 일러준 대로 따듯한 물을 틀어 샤워를 마쳤다.
샴푸는 두 번, 바디워시는 세 번. 거품을 깨끗하게 씻어낸 뒤에는 양치질. 칫솔은 제 자리에 올바르게 꽂아 두었고, 수건을 쓴 다음에는 서랍형 선반을 반듯하게 정리했다.
뽀송해진 상태로 나온 후에는 부엌으로 향했다.
입맛이 없어서 아무것도 먹기 싫었지만, 간단히라도 먹는 게 좋을 듯했다.
눈에 띄는 건, 떨어질 때마다 규연이 하나씩 채워 놓던 시리얼이었다.
달그락.
투명한 볼과 숟가락을 꺼낸 나루가 시리얼 적당량을 부었다. 그리고는 냉장고를 열어 우유까지 조금 섞어 주었다.
식탁에 앉은 나루는 숟가락을 들어 시리얼을 한 입 떠먹었다. 우유와 함께 씹히는 시리얼이 더 부드럽고 촉촉했다.
“…….”
문득, 처음 이곳에 왔던 때가 생각났다. 배가 고파서 몰래 부엌에 나와 시리얼을 먹던 때가.
우유도 없이 부어 접시에 코를 박고 먹는 모습에 규연은 화들짝 놀랐었다.
나한테는 퍽퍽하게 넘어가는 그 식감이 익숙했는데, 그게 맞는 거였는데.
“흐…….”
별것도 아닌 걸로 울음이 새어 나왔다. 이러고 있는 와중에도 강아지 수인의 습성이 본능적으로 올라와 힘겨웠다.
나루는 숟가락으로 시리얼을 크게 떠 입에 억지로 욱여넣었다. 우유에 젖어 물컹해진 식감이 불쾌했으나 기계적으로 씹고 삼키길 반복했다.
쓸데없는 고집을 부려가며 한 그릇을 다 비운 나루는 설거지까지 완벽히 마친 후, 소파에 누웠다.
불 꺼진 거실에 홀로 누워 있자니 외로웠다. 그 흔한 시계 똑딱이는 소리도 안 들리고, 밤이라 바깥의 희미한 소음도 들리지 않았다.
내가 정말 규연이의 인생을 가로막고 있는 걸까.
유 회장에게서 들었던 말이 잊히지 않았다.
이곳 사람들은 나루가 규연의 옆에 붙어 있는 걸 굉장히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지만, 보통 그랬던 것 같다.
예전, 규성이 규연의 옆에서 떨어지라고 했을 때 나루는 해맑음으로 승부하며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여줬었다.
그땐 그게 정말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돌이켜보니 터무니없었다. 규성의 인간성이 좋아 기특하게 봐준 게 다였다.
이렇게 하나씩 따지고 보면, 어른스럽지 못한 행동들이 더 많았다. 나루는 지난날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소파 구석에 무릎을 모아 앉아 얼굴을 묻은 나루가 조용히 눈물을 삼켰다.
고작 몇 개월 지났지만, 나 정말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봐.
어떻게 해야 다른 사람들의 눈에 성숙하게 비추어질까.
지잉.
고민이 끝나기도 전에 핸드폰 진동음이 울렸다. 어두컴컴한 거실에 핸드폰 불빛이 반짝, 빛나자 동굴까지 꺼져 있던 정신이 조금이나마 돌아왔다.
[집에 잘 도착했어?]
규연의 메시지였다. 걱정스러운 말투가 텍스트에서까지 고스란히 느껴졌다.
나루는 손가락을 천천히 움직이며 답장을 보냈다. 규연의 적당한 말풍선과 달리 나루의 말풍선은 짧았다.
[응.]
평소였다면 이런저런 말들까지 전송했을 텐데, 지금은 도저히 그럴 기분이 들지 않았다.
나루는 채팅방을 나가는 대신 스크롤을 올려 지난 대화를 돌아봤다.
[규연아, 어디야? 원두가 다 떨어졌대.]
[오늘 왜 중간에 나갔어? 보고 싶어]
.
.
.
[규여나 뭐해 나 지금 외토리야]
[외톨이겠지]
.
.
[이거 머야 갓낭콩 싫은데]
[그냥 둬, 그리고 갓낭콩이 아니라 강낭콩이야]
예전 날짜로 돌아갈수록 말투나 맞춤법이 엉망이었다. 부끄러운 마음에 홀드 버튼을 눌러 버린 나루가 핸드폰을 소파에 던져 놓았다.
억지로라도 자야겠다.
대충 쿠션을 베고 누운 나루가 눈을 감았다. 쓸데없는 생각이 더해질 때마다 우울감이 들어서 차라리 잠들고 싶었다.
“……답답해.”
꼭 이럴 때만 잠이 오지 않았다. 삼십 분이 지나도록 눈을 감고 있었는데 졸음이 밀려오기는커녕 정신이 맑아졌다.
결국, 나루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벼운 옷으로 갈아입었다.
속이 답답해져서 잠시 산책이라도 하고 오려는 모양새였다. 얇은 카디건을 걸쳐 입고, 운동화까지 신은 나루는 현관에 서서 컴컴한 거실을 둘러봤다.
“아, 핸드폰…….”
핸드폰을 소파 위에 그대로 두고 왔지만, 다시 들어가기 귀찮아 그냥 현관문을 열었다.
그나저나 오늘 날씨가 추운 건가. 문을 열고 나오니 오한이 들었다. 묘하게 몸이 간질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기분 탓일 거야.
두 팔을 쓸어내리던 나루가 엘리베이터를 잡았다.
1층, 2층, 3층…….
어서 도착하기를 기다리는데,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감기 기운은 확실히 아니었고, 뭔가 묘하게 익숙한 게 느낌이 이상했다.
이건, 원래 세계에 있을 때나 느끼던 상태인데.
드륵.
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가 소리 없이 열렸다. 나루는 조심스레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1층. 문이 닫힙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서서히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한다. 고층이라 그런지 내려가는 시간이 꽤 걸렸다.
천천히 머리를 식히고, 다시 생각해보는 거야. 규연이의 옆에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모자라 보이지 않을,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해.
“허, 허억……!”
다시금 마음을 다잡고 있는데, 갑작스레 머리가 어지러웠다. 속은 울렁거리고, 팔과 다리는 쥐가 난 듯 저려서 움직이기 힘들었다.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일까.
나루가 엘리베이터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골랐다. 헐떡이는 소리가 점점 빨라지는 게, 꼭 사람의 숨소리 같지 않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