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1화 (81/130)


행사는 좋지 못한 분위기로 마무리됐다. 주요 기업이 함께 주최한 행사인데 YK의 소란으로 인해 망해 버린 것이다.

유 회장은 잔뜩 화가 난 상태였다. 막내인 규연에게만큼은 화를 내지 않던 그였는데, 오늘은 참을 수 없다는 듯 부들거렸다.

나루는 형제들 사이에 섞여 차를 타고 내렸다. 내린 곳은 다름 아닌 규연의 본가였다.

커다란 저택의 위엄에 기가 눌린 나루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걷기만 했다.

일이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그저 덤벼오는 건혁을 상대하고 있었을 뿐인데, 일이 상상도 못 할 정도로 커져 버렸다.

덜컹.

넓은 저택의 대문이 열렸다. 유 회장은 앞만 보고 걸어갔다. 빨라진 걸음걸이가 그의 심정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현관을 열고 들어선 유 회장이 곧장 코트를 벗어 소파로 던졌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걸 보니 열이 오른 모양이었다.

“아버지, 진정부터 하시고,”

“규연이 너, 내가 하고 싶은 거 다 시켜주니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거냐!”

소리가 벼락같이 떨어졌다. 나루는 몸을 움찔, 떨고 시선을 바닥으로 고정했다.

흥분한 유 회장은 제 할 말만 늘어놓을 뿐, 자식들의 말리는 소리를 듣지 않았다.

그 사이에서 제일 고통스러운 건 나루였다.

내가 우는 척만 안 했으면 다들 그렇게까지 큰 소리를 내지 않았을 텐데.

자신이 일을 더 키운 것 같아 죄책감이 들었다. 정작 규연은 반성하는 듯해 보이지 않았다.

“아빠, 상황 설명부터 들어 봐.”

“설명은 무슨! 너, 저 사람이 진짜로 네 애인이냐. 어떻게 남자를, 그것도 저런……!”

일이 골치 아파졌다. 규연은 나루에게 미안해 미칠 지경이었다. 연회장에서 사람들의 주목을 받은 것도 스트레스였을 텐데…….

나루는 유 회장의 뒷말을 홀로 추측해 보았다. 굳이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쉽게 알아낼 수 있었다.

저런 아무것도 없는 놈을, 왜 애인으로 삼았냐는 말이겠지.

부모로서 자식이 걱정되어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걸 알지만, 속상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그것도 저번 식사에서 봤던 남자 아니냐. 설마, 너희 전부 알고 있었으면서 우리한테만 숨긴 거냐. 어? 그런 거야?”

유 회장이 제대로 배신당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소파에 주저앉았다. 형제들은 모두 약속한 것처럼 말을 아꼈다.

침묵은 곧 긍정이라고 했던가. 분위기의 흐름으로 모든 걸 눈치챈 유 회장이 다시 소리를 버럭 내질렀다.

“유규연, 네가 미쳤구나. 네가 네 인생을 꽉 틀어막지 못해 안달이야, 아주!”

“그렇게까지 말할 건 없잖아.”

듣고 있던 규연이 기어코 말대답했다. 고작 애인 하나 생겼다고 이렇게까지 난리를 치는 아버지가 진심으로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인생을 꽉 틀어막았다니. 이건 규연이 아닌 나루에게 말하는 것과 같았다.

“카드부터 집까지 전부 뺏겨 봐야 정신을 차리지, 네가!”

“하…….”

상황이 악화되었다. 아버지의 호통에 한숨을 내쉬던 규연이 입을 열지 않았다.

차라리 모조리 빼앗긴 후, 나루를 데리고 이 공간에서 나가고 싶었다. 빼앗긴다 해도 아버지의 돈은 몇 없었다.

하지만 나루의 생각은 달랐다. 규연의 인생이 막힐지도 모른다는 말과 집을 빼앗긴다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인생, 돈, 집. 모두 없어서는 안 될 것들이었다.

나루는 집도, 돈도 없이 살아 봤다. 그래서 그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규연을 그런 지옥에 떨어뜨린다고 생각하니 겁부터 났다.

이게 다 내가 규연이를 좋아해서 생긴 일이야? 그러면 안 되는 거야?

내가 규연이를 좋아하면, 규연이는 가족도, 돈도, 집도 잃는 거야…….

생각을 마친 나루가 유 회장의 앞으로 다가가 섰다. 그러자 여러 개의 시선이 나루에게 박혔다.

“죄, 죄송해요.”

여린 목소리가 거실에 울려 퍼졌다. 나루는 고개를 숙이다 못해 무릎까지 꿇었다.

돌발 행동에 놀란 규연이 나루의 어깨를 붙잡았다. 일으켜 주려고 했으나, 고집이 얼마나 세던지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루의 눈에 초점이 사라졌다. 지하실에서 전 주인에게 빌던 그때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

“죄송해요, 지, 진짜 죄송해요. 규연이 좋아해서 죄송해요, 인생 막아서, 그래서…….”

나루의 목소리가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 불쌍해서 차마 두 눈 뜨고 보기 힘들 정도였다.

규연은 억장이 무너져 내리는 걸 느꼈다. 처음 진심으로 좋아해 본 사람이 제 아버지 밑에 무릎을 꿇고 떠는 모습은 생각보다도 더욱 보기 괴로운 장면이었다.

보다 못한 규민이 나루의 등을 토닥이며 살살 달래기 시작했다.

“그만 일어서자. 네가 이럴 필요 없어, 응? 규연이 속상해한다.”

다정한 말에도 고개를 휘저은 나루가 얘기를 이어갔다. 아무것도 모르는 유 회장에게 어떻게 된 일인지 알려줘야만 했다.

“제가 사실 집이 없어서, 조금 불쌍해서, 규연이가 거두어 준 것뿐이에요. 그러니까 규연이한테서 집 빼앗지 말아 주세요…….”

그렇게 되면 본인 살 곳도 사라지는 건데, 본인 걱정은 하지 않고 규연부터 챙기는 게 안타까웠다.

규연은 나루의 말에 더 못 참겠다는 듯 다가가 몸을 강제로 일으켜 세웠다.

“송나루, 왜 그래. 너 잘못한 거 하나도 없으니까 이런 짓―.”

속상한 마음에 핀잔을 늘어놓던 중, 규연의 말이 뚝 잘려 나갔다. 나루는 초점 나간 눈으로 규연을 응시하며 간절하게 애원했다.

“일으키지 마, 규연아. 내가 진짜로 네 인생을 막고 있는 거라면, 그냥 혼자 살래.”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언제는 평생 같이 살 것처럼, 절대 떨어지지 않을 것처럼 말하더니….

이건, 그러니까, 헤어지자는 말과 다를 게 없었다.

규연은 용납할 수 없었다. 고작 이런 일로 헤어지는 건 더더욱 안 된다.

아무래도 나루가 유 회장의 말에 심히 겁먹은 듯했다. 다른 사람 앞에서는 당돌한 모습을 잘만 보여줬지만, 막상 규연의 부모에게는 그러지 못했다.

하긴, 당연했다. 나루에게 부모라는 존재는 절대적이었다. 어렸을 때 사고로 엄마를 잃고 난 뒤로는 더욱 그랬다.

“아버지, 제가 미리 봤는데 괜찮은 아이예요. 그리 걱정 안 하셔도 될 만큼 성숙하고, 노력도 많이 하는 아이라 문제 될 게 없어 보여요.”

이번에는 규성이 한마디 거들었다. 일부러 거짓은 섞지 않았다. 자신이 느낀 그대로를 말해 주며 나루를 감싸는 게 은근 따스했다.

형제들의 적극적인 지원에 당황한 유 회장이 인상을 찌푸렸다.

확실히 말하는 걸 보아하니 규연에게 독이 될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그렇다고 해서 쉽게 허락할 수는 없었다. 무릎을 꿇고 있는 아이가 불쌍하지만, 유 회장에게는 제 아들이 더 먼저였다.

들어 보니 사정도 좋지 않은 듯하고, 가장 중요한 건 나루의 성별이 남자라는 점이었다.

“됐다. 너희가 아무리 그래도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 미안하지만, 말한 것처럼 규연이 놔 주고 혼자 살아요.”

쿵.

나루는 심장이 바닥에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각오하고 내뱉은 말이었지만, 규연의 아버지에게서 직접 들으니 가슴이 쓰렸다.

이게 아닌데,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야…….

휘청이며 일어선 나루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여기 계속 있다가는 눈물이 터질 것 같아서 도망치고 싶었다.

“저런 말 듣지 마. 어디 가, 나루야. 나랑 같이 나가. 잠시만-.”

“너야말로 어딜 나가려고, 유규연! 네 집에 갈 생각하지 마.”

규연이 황급히 나루의 뒤를 따라 나가려고 하자, 유 회장이 앞을 막아섰다. 총체적 난국이 따로 없었다.

나루는 규연에게 붙잡힌 손을 강제로 빼내기 위해 애썼다. 앙상한 팔목을 아무리 휘둘러도 규연의 손이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규연은 답답함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자꾸만 자신을 벗어나려 하는 나루가 답답하고, 또 안쓰러웠다.

팔목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대로 나루를 놓아주면 모든 게 끝난다.

나루의 성격상, 놓아주는 순간 도망을 갈 게 뻔했다.

“얘 절대 혼자 못 보내.”

“유규연, 너 이 아비 죽는 꼴 보고 싶어 이러니. 얌전히 집에 있어.”

어느새 화를 가라앉힌 유 회장이 집에 있으라며 규연을 달랬다.

“나한테는 얘가 먼저야. 이대로 보내면 다시는 못 볼지도 모른다고.”

달랜다고 해서 들어먹을 규연이 아니었다. 그는 끝까지 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 고집을 부렸다. 오늘 무슨 일이 있어도 본가에서 빠져나가겠다는 의지가 돋보였다.

“규연아, 이거 놔. 나 집에 있을게.”

분위기가 점점 더 험악해질 때 즈음, 나루가 규연의 손을 힘껏 놓아 버렸다. 격한 행동과 달리 나오는 말은 차분하기 그지없었다.

규연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했다. 얌전히 옆에 있을 줄 알았던 나루가 냉정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루의 속은 썩어들어가는 중이었다. 규연의 앞길을 막는다거나, 부모님이 반대하는 걸 떠나서, 그냥 자신의 존재에 회의감이 들었다.

잠시 정적이 맴돌았다. 나루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도망치듯 현관문을 나섰다.

철컥.

저택 계단을 내려가는 발걸음이 점차 빨라졌다. 찬 밤바람을 맞으니 현실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이 세상에 잘 적응해서 살아가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규연이를 처음 만났을 때와 많이 달라진 줄 알았는데.

보통 사람처럼 바뀔 수 있을 줄 알았고, 이곳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려고 노력했는데…….

결국, 아무리 발버둥 쳐도 다른 사람의 눈에는 아직 부족해 보이는 걸까.

“송나루!”

서러운 마음을 삼켜가며 걸음을 옮기던 나루가 뒤를 돌아봤다. 황급히 뒤쫓아 나온 규연이 인상을 가득 찌푸린 채 뛰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손이 다시 붙잡혔다. 나루는 붙잡힌 손을 빤히 바라보고, 시선을 옮겨 규연의 얼굴을 응시했다.

“가지 마, 걱정되게 어딜 혼자 나가.”

“얼른 들어가.”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너는,”

쿵.

규연의 말에 나루의 마음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어딜 혼자 나가’,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규연은 걱정돼서 내뱉은 말이겠지만, 나루에게만은 그렇게 들리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만드는 규연의 행동이, 이상하게 전 주인인 범현과 겹쳐 보였다.

아닌 듯 강압적인 태도. 성인인 자신에게 선택권조차 주지 않으려는 말투.

나는 애가 아닌데. 모자라지도 않은데. 괜스레 감정이 울컥했다.

탁!

나루를 달래듯 걱정하던 규연이 잡은 손을 살살 이끌었다. 그러자 나루가 그 손을 거세게 쳐냈다.

얼마나 세게 쳤는지 둔탁한 소리까지 났다. 규연은 얼얼해진 팔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쳐다보았다.

놀란 규연과 달리 나루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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