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0화 (80/130)


“규연이라면, YK전자 막내아들 그 유규연?”

“세상에, 말도 안 돼요.”

건혁의 계략에 연회장이 술렁였다. 자유롭게 자랐다고는 하지만, 규연도 YK 가족 구성원 중 한 명이었다. 절대 아무나와 만나고 다닐 인물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바닥에 엎어진 나루를 대놓고 힐끔거리며 수군거리기 바빴다. 어떻게 저런 비루한 남자가 규연의 애인이라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나루는 이런 것에 익숙했다. 아니, 익숙해져야만 했다.

지하실에서 살 때나, 지금이나, 사회적인 취급은 별반 달라진 게 없었다. 서럽지만 어쩔 수 있겠는가.

건혁이 내민 손을 무시하고 무덤덤하게 일어선 나루가 제 엉덩이를 툭툭, 털었다.

“앞으로는 똑바로 보고 다니세요.”

나긋한 목소리로 대꾸한 나루가 뒤돌아섰다. 더 이상 건혁과 엮이기도 싫었고, 지금은 이 공간을 어서 빠져나가고 싶었다.

이러면 안 되지만, 자리에 없는 규연이 원망스러웠다.

처음에는 이런 일을 당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존재는 이런 일을 당해도 억울해하지 않아야 한다고 배웠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부당한 일을 당하는 게 미치도록 억울했고, 화났다.

애써 마음을 추스린 나루가 한 걸음 돌아섰을 때였다.

“하는 행동도 말도 이상한 게, 지적 장애 같던데. 지금 상태 괜찮아요?”

“…….”

발이 저절로 멈춰 섰다. 건혁은 끝도 모르고 설치는 중이었다.

하는 행동도 말도 이상한 지적 장애 같다고? 못 배운 나보다 더 못 배운 티 나는 인간은 처음이네.

눈을 매섭게 뜬 나루가 다시 뒤돌아 가 건혁의 앞에 떡 버티고 섰다.

“못 배운 티 내는 거 아니라고 했어요. 저 바보 아니에요. 무르게 대해 주니까 우습게 보이세요?”

“하……!”

맞는 말이었다. 건혁은 나루의 앞에서만 기고만장하게 굴었다. 돈도 없고, 어리숙해 보이니 만만히 보는 거였다.

나루가 일부러 침착하게 대응하니 당황한 듯했다. 건혁은 주변의 시선을 인식하고 머리를 굴렸다.

“우습게 보이는 게 아니라, 신기해서요. 정상인의 지능이 아닌데 어떻게 유규연을 꼬신―.”

퍽!

건혁의 말이 끝까지 이어지지 못하고 끊겼다. 옆에서 파들거리며 지켜보던 건후가 주먹을 날렸기 때문이다.

연회장의 분위기가 점점 험악해져 갔다. 건후는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본능적으로 행동하고 말했다.

“형, 추하게 뭐 하는 짓이야. 어떻게 사람한테 그런 말을……!”

나루의 눈이 크게 확장됐다. 설마, 건후가 나서 줄 줄은 몰랐다는 눈치였다.

심지어 뭔가 이상했다. 계속 형, 형, 하는 게 꼭 형제 같아 보였다.

나루의 추측대로라면 건후는 제 형의 뺨을 주먹으로 때린 거였다. 이렇게 생각하니 마음속이 복잡해졌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 카페 뒤에서도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걸 목격했었다.

건후는 건혁에게 저자세를 취했다. 그렇다는 건, 지하실에서 살던 나루와 비슷하게 같이 사는 사람을 무서워했다는 건데…….

이렇게 때려도 되는 걸까. 나루는 순간 건후가 걱정돼서 앞을 가로막고 섰다.

“도건후, 네가 감히 형을 때려?”

“…형이 심하게 하니까.”

역시, 추측이 딱 들어맞았다. 나루는 건후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나섰다.

“멀쩡한 사람 괴롭히지 말고, 가세요.”

“가야 할 건 너 아닌가, 주변을 둘러봐요. 가야 할 사람이 누구인가.”

건혁의 말에 고개를 돌린 나루가 주변을 훑어봤다.

사람들은 모두 나루를 보며 저들끼리 무언가를 수군거리고 있었다. 잘못한 건 도건혁인데, 이상한 현상이었다.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감정에 눈동자가 정처 없이 떨렸다.

이게 아닌데. 난 잘못한 게 하나도 없는데.

세상은 참 무심하고 냉혹했다. 약한 사람이 당해도 도와주려 하지 않고, 오히려 가해자와 함께 돌을 내던졌다.

“사과하는 법을 모르면 입이나 닥치고 있어.”

“……!”

당황에 빠지려고 하는 순간, 규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급하게 달려온 건지 머리카락이 미세하게 흐트러져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여유로움을 유지하고 있는 게 대단했다. 나루는 제 옆에 선 규연을 보자마자 눈물을 머금었다.

참고 있던 설움이 확 복받쳐 올랐다. 방금까지 정말 괜찮았는데, 규연의 얼굴을 보고 나니 드디어 기댈 곳이 생긴 거 같아 눈시울이 붉어진 듯했다.

건혁은 규연의 등장에 입을 꼭 다물었다. 잘 터져 있던 입이 이럴 때만 다물리는 게 어이가 없었다.

“저번에도 멀쩡한 사람 붙잡고 쇼하더니, 망신을 덜 당했나 봐.”

“망신은 네가 당했어. 저거, 네 애인 맞지?”

예전에는 찍소리도 못하던 건혁이 작정한 듯 덤벼들었다.

나루가 규연의 애인이라는 걸 모두의 앞에서 밝히고 일을 키우려는 모양이었다.

규연은 나루를 제 등 뒤에 숨겨 주고는 듬직하게 버티고 서서 맞대응했다.

“내 애인인 거 알면 건드리지 말았어야지. 건혁아, 지능이 부족한 건 얘가 아니라 너 아니냐.”

규연이 같잖다는 듯 헛웃음을 쳤다. 고작 이런 유치한 방법으로 망신을 주려 한 건혁이 우습기만 했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주춤한 건혁이 주변을 빙 둘러봤다.

나루와 있을 땐 분위기가 제 쪽으로 기울었었는데, 규연이 등장한 후부터 분위기가 다시 반대로 기울어 있었다.

상황은 더욱 커져만 갔다. 규연 한 명으로도 당해내기 벅찬데, 멀리서 규민과 규성까지 다가오고 있었다.

“무슨 일인데 이렇게 시끄러워.”

“건혁이네, 둘이 싸웠나.”

규성과 규민이 차례대로 물었다. 아직 두 사람의 관계가 틀어진 지 모르는 눈치였다.

규민은 가까이 다가와 나루부터 살펴봤다. 애가 조금씩 떨고 있는 게 안쓰러웠다.

나루는 규민의 눈치를 보다가 냅다 눈물부터 흘렸다. 반은 진짜 눈물이었고, 나머지 반은 가짜 눈물이었다.

“으흐, 윽, 끄으…….”

“나루,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저 사람이, 흐으, 저한테 지적 장, 애라고, 규연이랑, 사귀는 거, 흐끅, 이상하다고…….”

진짜 서러운 감정을 느끼고 있던 탓에 연기가 완벽히 나왔다. 나루는 제가 말하면서도 대단하다고 느꼈다.

머리는 이렇게 굴리는 거였다. 지능이 부족한 사람은 규연의 말대로 건혁이 확실했다.

강아지인 나보다 머리 못 쓰는 멍청한 새끼.

나루의 울음 섞인 목소리에 규민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늘 시원스럽게 웃던 얼굴이 굳으니 더 무서웠다.

“교양 없게 뭐 하는 짓이야, 건혁아. 훌륭하신 부모님 밑에서 컸는데, 이러면 실망 많이 하시겠네.”

입은 웃고 있는데,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평소와 같은 말투로 압박을 넣던 규민이 나루의 어깨를 붙잡아 제 쪽으로 당겼다.

규연은 나루가 완전히 안전해진 것을 확인하고, 곧장 건혁의 이마를 밀쳤다. 나름대로 모두가 보는 앞이라 성깔을 눌러 참은 거였다.

“규연아, 그러면 못 쓰지.”

규민이 대충 말리는 척 한마디 거들었다. 실은 전혀 말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나루는 YK가 형제들 사이에 둘러싸여 최대한 불쌍하게 눈물을 훌쩍였다. 이게 자신이 건혁을 엿 먹일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었다.

적당히 상황을 지켜보던 규성은 규연이 두어 번쯤 건혁을 압박할 때 즈음 다가가 손을 붙잡아 줬다.

“그만, 사람들도 있으니 여기까지.”

“…….”

“너도, 또 이런 짓 벌이면 기업 간 사이 안 좋아진다는 거 명심하고.”

규성이 나서니 상황이 단번에 마무리되었다. YK전자의 부사장인지라 규연보다 입김이 센 덕분이었다.

세 사람의 정신없는 공격에 당황한 건혁이 손을 벌벌 떨었다. 규연이라면 몰라도, 규성과 규민까지 나서니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항상 뭘 해 보기도 전에 일이 이렇게 끝나 버렸다. 어쩔 수 없었다. 상대가 막강해서 입을 더 벌렸다가는 큰 봉변을 당할 수도 있었다.

건혁은 이를 부득 갈았다. 아무것도 아닌 나루에게 YK가 형제들이 붙어 있다는 게 용납되지 않았다.

더 열받는 건 나루가 이 점을 잘 이용한다는 사실이었다. 역으로 망신을 당한 건혁은 아버지에게 들키기라도 할까 무서워 뒤돌아섰다.

“도건혁, 마지막 경고야.”

“…….”

건혁의 어깨를 억세게 붙잡은 규연이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여태 들어온 목소리 중 가장 위협적이었다.

소름 끼친다는 듯 몸을 잘게 떨던 건혁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졌다.

연회장 분위기는 이미 엉망이 된 후였다. 다들 어떻게 마무리되는 건지 궁금해하며 나루를 힐끔거렸다.

짧은 소동이었으나, 나루에게는 큰 사건이나 마찬가지였다. 사람들 앞에서 안 좋은 취급을 받고도 멀쩡한 게 이상했다.

규연은 나루부터 챙겼다. 울고 있는 게 아까부터 신경 쓰였는데, 곧바로 달래주지 못해 미안했다.

“송나루, 괜찮아?”

“안 괜찮아, 나 저 사람 정말 싫어.”

“눈 다 부었네, 내가 늦게 와서 미안해.”

나루의 두 뺨을 감싼 규연이 부은 눈을 살살 쓸어내려 줬다. 이런 자리에 데려오는 게 아닌데, 괜히 상처만 준 것 같아 속상했다.

늘 괜찮다고만 하던 나루가 안 괜찮다며 고개를 저었다. 마음이 많이 상한 모양이었다.

규연이 나루를 달래는 사이, 규민과 규성이 나서서 상황을 정리했다.

사람들과 자연스레 대화라도 나누며 입막음을 하려는데, 갑자기 입구 쪽이 술렁거렸다.

“유 회장이잖아. 어이쿠, 오늘 YK 무슨 일이래…….”

망했다.

시선을 돌리던 규연이 제 아버지와 눈을 마주치고 이마를 짚었다.

이런 상황까지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래서 일부러 빠르게 분위기를 정리하려고 했던 건데.

영문을 모르는 나루는 그저 어리둥절하게 서 있었다. 그러는 동안 유 회장이 성큼성큼 걸어와 규연의 앞에 섰다.

“이게 다 무슨 소리니.”

“…아빠.”

“누가, 뭐, 누구 애인이라고?”

문제는 건혁이 아니었다. 겨우 언덕 하나 넘었더니, 앞에 커다란 산 하나가 막고 서 있는 느낌이었다.

유 회장의 부릅뜬 눈이 나루에게 닿았다. 식사 자리에서 보았던 때와 180도 다른 인상이었다.

겁먹은 나루가 눈을 슬쩍 내리깔았다.

설마, 규연의 아버지가 연회장에 나타나 모든 걸 알게 될 줄은…….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나루를 비롯한 YK가 형제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아버지, 일단,”

“전부 집으로 들어와라.”

규성이 나서서 유 회장을 구슬려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오히려 전부 집으로 들어오라는 불호령이 떨어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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