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9화 (79/130)


드디어 기다리던 날이 다가왔다. 나루는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말끔히 준비를 마쳤다.

오늘은 규민이 초대해 준 행사에 참석하는 날이었다. 규연은 썩 내키지 않았지만, 나루를 위해 억지로 참석하기로 했다.

행사는 늦은 시간에 시작된다. 오후 여섯 시에 지루한 연설을 마치면, 자연스레 파티가 이어질 듯했다.

보통은 연설이 끝난 후 가볍게 담소를 나누다가 돌아가곤 하지만, 규민이 나서는 바람에 파티가 끼어든 것이었다.

외국에서 오래 살다 온 그는 파티에 익숙했다. 노는 것을 특출나게 좋아하기도 했다.

어쨌든 나루 입장에서는 그저 좋았다. 맛있는 것도 먹고, 편히 놀다 올 수 있으니 말이다.

“모르는 사람이 말 걸면 피해. 아니면 바로 나를 찾아도 되고.”

“옆에 없을 거야?”

“있을 건데, 중간에 잠깐 자리를 비워야 할 수도 있어서 그래.”

출발하기 전, 규연은 나루에게 몇 가지 주의사항을 읊어 주었다.

말이 좋아 파티지, 다들 웃으며 서로를 헐뜯는 곳인데 나루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었다.

규연의 수트 재킷을 꼭 붙든 나루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출발도 전에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아서 긴장한 모양새였다.

“그냥 가지 말고 집에 있을까.”

“싫어.”

“…그래.”

혹시나, 싶어 마지막까지 집에 있기를 권유해 보았으나 소용없었다. 나루는 규연이 자신을 데리고 나가지 않을까 눈치를 봤다.

그 모습이 또 안쓰러워서 규연의 마음이 약해졌다.

“내가 사 준 옷 입었네.”

“응, 이거 예뻐.”

가벼운 한마디로 분위기를 풀어낸 규연이 현관문을 열었다. 제 옷을 두어 번 매만져보던 나루는 몰래 웃음 지으며 집을 나섰다.

베이지색 정장은 나루에게 꼭 맞춘 듯 잘 어울렸다. 너무 딱딱해 보이지도 않아서 적당했다.

반면, 규연은 나루보다 훨씬 무거운 분위기를 풍겼다. 검은색 롱코트에 수트까지 갖춰 입으니 태가 났다.

앞서 걸어가는 규연의 뒤태를 감탄하며 바라보던 나루가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저렇게 잘난 사람이 내 애인이라니,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야. 그런데 현실이고. 행복해.

여러 감정이 밀려들어 머릿속이 시끌시끌했다. 물론 대부분 규연을 칭찬하는 말들이었다.

“차 키.”

“여기.”

규민에게 선물 받은 차 키가 규연의 손 위로 올라갔다. 나루는 발을 동동 구르며 조수석 문을 열었다.

오늘 드디어 이 차를 타 보는구나.

규연이 운전석에 오르기도 전에 조수석 시트에 몸을 기댄 나루가 눈을 편히 감았다.

새 차에서 나는 가죽 냄새도 좋고, 폭신한 시트도 기분 좋았다.

운전석에 오르던 규연은 눈을 감고 있는 나루를 발견하고 입꼬리를 올렸다.

“좋냐.”

“응, 이 차 진짜 좋아.”

습관적으로 나루에게 안전벨트를 채워 준 규연이 차를 부드럽게 출발시켰다.

늘 사용하던 차와 비슷한 듯 달라서 규연 또한 기분이 좋아 보였다.

나루는 행사장에 도착하기 전까지 쉴 새 없이 떠들어댔다. 음식은 뭐가 맛있을지, 사람들이 얼마나 올지, 규민은 거기서 무슨 일을 맡았는지, 궁금한 게 많은 모양이었다.

하나하나 대답해 주다 보니 어느새 행사장 앞이었다. 규연은 내리려다 말고 차를 뒤쪽으로 돌렸다.

“저 사람들은 뭐 하는 거야?”

“기자.”

뭔가 번쩍거린다 했더니, 기자들이 벌써 몰려들어 있었다. 물론 규연은 이런 일에 익숙했다.

하지만 나루는 아니었다. 터지는 플래시에 당황할 게 분명했고, 무엇보다 규연은 나루의 얼굴을 세상에 밝히기 싫었다.

셔터를 얼마나 눌러대는 건지, 차 밖으로 정신 사나운 셔터음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차를 뒤로 돌려서 다행인가.

알려지지 않은 입구로 돌아오길 잘했다. 하마터면 기자들 사이에 섞여 골치 아파질 뻔했다.

지하에 차를 세운 규연은 주변을 휙 둘러보고 문을 열었다. 그러자 나루가 뒤따라 내렸다.

“조용히 들어가자.”

“왜?”

“위험하니까.”

무심하게 걸음을 옮기면서도 입은 친절히 움직였다. 나루는 유독 신경이 곤두선 규연을 빤히 관찰하며 걸었다.

조금 걸어가다 보니 검은색 철문 하나가 보였다. 규연은 바로 그 문을 열어젖혔다.

덜컹.

묵직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방금까지는 주변이 어두웠는데, 문을 열자마자 화려한 빛이 나루를 반겼다.

여러 조명부터 가장 가운데에 큼지막하게 설치된 샹들리에까지. 눈이 안 부실 수가 없었다.

“대박…….”

“내가 자리 따로 빼달라고 했어.”

“자리?”

“응, 도건후랑 셋이 앉으면 돼.”

규연은 이런 면에서 은근 세심했다. 가족들 사이에서 불편해할 나루를 생각해 자리를 따로 뺀 게 센스 넘쳤다.

행사장 내부는 사치스러울 정도로 화려했다. 나루는 이곳이 결혼식장인 줄 알았다.

푸른색 벨벳 천이 깔린 원형 테이블, 두 손으로 끌어도 무거울 만한 고급 의자.

이런 장면은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었다. 정확히는 드라마에 나오는 결혼식 장면이었다.

규연은 어리둥절하게 서 있는 나루를 이끌고 자리에 앉았다. 가장 뒤로 빠진 테이블이었다.

“어, 형, 왔어?”

“먼저 도착해 있었네. 나루 좀 데리고 있어, 나 가족들한테 인사하고 올게.”

자리에는 먼저 도착해 앉아 있는 건후가 있었다. 평소 캐주얼한 차림으로 다니던 건후가 규연과 비슷한 수트를 차려입은 게 어색했다.

짧게 인사를 주고받던 규연은 건후에게 나루를 부탁했다. 어쨌든 행사에 참석했으니 가족과 지인들에게 얼굴도장을 찍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어디 가?”

“잠깐 인사 좀 돌고 올게.”

“규민이 형은?”

“글쎄, 아무튼 잠깐 도건후랑 있어.”

곧바로 규민부터 찾는 모습에 규연이 인상을 작게 찌푸렸다. 그러다가도 나루의 등을 다정하게 토닥여 줬다.

나루가 고개를 끄덕이자, 규연이 급히 자리를 떴다.

나루는 정신없는 분위기에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가만히 있어도 머리가 아픈데, 규연은 더 심할 것 같았다.

“규연이 형 진짜 바쁘네.”

“그러게.”

“YK 막내아들이니까 그럴 만도 하지. 우리는 앉아 있다가 연설 끝나면 뷔페나 먹자.”

바쁘게 돌아다니며 인사하는 규연을 쳐다보던 건후가 손으로 밥 떠먹는 시늉을 해 보였다. 나루는 좋다며 미소로 화답했다.

연설이라는 게 뭔지 모르겠지만,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빨리 끝났으면 했다. 나루가 기대하던 분위기는 이런 게 아니었다.

그러니까, 조금 더 부드럽고 여유로운 그런 분위기를 원했는데…….

막상 온 곳은 복잡스럽기만 했다. 묘하게 찝찝한 기분이 드는 거 같기도 하고, 아무튼 느낌이 영 아니었다.

“왔구나.”

“어, 안녕하세요….”

“편하게 있어, 규연이가 바쁜 모양이네. 기회 봐서 돌려보낼 테니까 둘이 시간 보내고, 무슨 일 생기면 말하고.”

멍하니 앞만 바라보고 있는데 누군가가 나루의 어깨를 톡톡, 쳤다. 바로 규성이었다.

수트 재킷을 바르게 여미던 규성이 할 말만 빠르게 늘어놓았다. 여간 바쁜 게 아닌가 보다.

나루는 잽싸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파티에 오는 것뿐인데 하나같이 무슨 일이 생길까 걱정하는 게 이상했다.

규성은 짧은 대화를 마치고 사라져 버렸다. 규민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연설 시작한다.”

“규민이 형……?”

“멋있지.”

불이 하나둘씩 소등되고, 단상에 하이라이트가 내려왔다. 그 위에 서 있는 사람 중에는 규민도 있었다.

나루는 앞을 삿대질하며 규민의 이름을 조용히 외쳤다. 그러자 건후가 옆에서 한마디 거들었다.

“형이 이번 프로젝트 중심인물이야.”

“그런데 너는 어떻게 다 알아?”

“엉?”

“어떻게 다 알고 있어? 규민이 형에 대해서.”

“…글쎄다.”

나루의 물음에 대답을 얼버무린 건후가 시선을 돌렸다.

그때, 타이밍 좋게 연설이 시작됐다. 큼지막한 마이크 소리에 놀란 나루는 더 물으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연설은 규연이 얘기했던 것처럼 지루하고, 또 지루했다. 간혹 규민이 마이크를 들었을 때만 눈이 반짝였다.

게다가 더럽게 길었다. 끝날 법한데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져서 죽을 맛이었다.

배가 꼬르륵, 소리를 낸다. 나루는 배고픔을 참으며 눈을 끔뻑거렸다. 아무리 마이크 소리가 크다 해도 지루한 말을 계속 들으니 졸음이 몰려왔다.

그렇게 꾸벅, 졸고 있을 즈음 연설을 끝마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상으로 끝맺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박수가 터져 나왔다. 나루는 뭣도 모르고 사람들을 따라 손바닥을 맞물렸다.

“규연이 형 부모님께 붙잡힌 것 같은데, 우리끼리 연회장으로 옮겨야겠다.”

사람들이 하나둘씩 일어서서 연회장으로 자리를 옮기기 시작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건후는 규연의 곤란한 뒤통수를 발견하고 나루를 먼저 이끌었다.

아쉬운 눈으로 규연을 바라보던 나루가 발걸음을 힘없이 돌렸다.

같이 다닐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유규연 짜증 나…….

“뭘 시무룩하게 있어, 저거나 봐.”

“허얼…….”

나루의 표정이 가라앉자 건후가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연회장 안은 나루가 생각하던 그 분위기 그대로였다. 여유롭고, 부드러운 분위기.

심지어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이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모두 이런 곳에서 맛볼 수 있는 음식들이었다.

나루의 표정이 순식간에 환해졌다. 건후는 아이 같은 모습에 웃음을 흘렸다.

“야, 너 되게 좋아한다?”

“맛있겠다. 나 배고팠어.”

귀신에 홀린 듯 음식 앞으로 다가간 나루가 접시부터 집어 들었다.

일단 저 새우도 먹고, 소고기도…….

챙그랑!

평화로운 연회장 안이 날카로운 파열음으로 인해 시끌벅적해졌다.

음식을 고르기 위해 한 발짝을 딛던 나루는 바닥에 처참히 엎어져 있었다.

이게 갑자기 무슨 상황이지.

생각할 틈도 없이 누군가의 발이 나루의 재킷 끝자락을 지긋하게 밟아왔다.

수군거리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나루는 고개도 들지 못한 채 밟힌 재킷 끝만 바라보았다.

“미안해요, 내가 실수로 그만. 손잡고 일어날래요?”

“…….”

칼을 친절함으로 둘러싸는 듯한 화법. 이 목소리는 분명 건혁이었다.

나루는 눈을 매섭게 뜨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역시나, 건혁이 오만한 태도로 자신을 깔아보고 있었다.

“아, 이게 누구야. 규연이 애인이었네. 진짜 미안해요.”

뒤로 이어진 건혁의 말에 연회장이 크게 들썩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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