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 가면 안 돼.”
“응?”
“가지 마라, 어? 가지 마.”
건후가 다급히 나루의 팔을 붙잡았다. 뜬금없이 가지 말라니, 이유도 모르고 듣기에는 황당했다.
미묘하게 인상을 찌푸린 나루가 잡힌 손을 비틀어 빼냈다. 늘 장난스럽게 굴던 건후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해 있었다.
“왜?”
“왜냐하면, 그, 아무튼 가지 마.”
“이유가 없는 거면 싫어. 형들이 초대해 준 거니까 무조건 갈 거야.”
일이 건후의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대놓고 내 형이 널 괴롭힐 거라고 말할 수도 없고,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애초에 행사에 참석할 수 있게 됐다며 신난 나루를 말릴 방법은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규연에게 직접 이 상황을 알리는 건데…….
그건 또 그거대로 겁이 났다.
“같이 갈래?”
“내가 무슨 수로 가냐.”
“너 아까 규민이 형 이름 막 불렀잖아, 친한 거 아니야? 맞지?”
나루가 절망하고 있는 건후에게 한 줄기 빛을 내밀었다.
그래, 직접 나서서 건혁의 옆을 지키며 허튼짓을 못 하도록 막으면 된다.
눈치 빠른 나루는 건후와 규민이 아는 사이라는 걸 잽싸게 캐치해 냈다. 딱 보니 행사에 참여하고 싶어 하는 모양인데, 규민에게 부탁한다면 흔쾌히 초대장을 내어줄 것이다.
“규민이 형한테 부탁해.”
“좀 어색해졌는데…….”
“왜 그래?”
“아니야, 야, 너 거기부터 쓸면서 와. 나는 저쪽부터 쓸 테니까.”
규민의 얼굴을 떠올리던 건후가 힘없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예전이라면 몰라도, 지금은 연락조차 하지 않아서 규민과 어색한 사이였다.
아무리 친화력이 좋은 건후라고 한들, 염치는 있었다. 제 친형인 건혁이 행사에서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르는 상황인데, 규민에게 뻔뻔스레 초대장을 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건후는 급히 화제를 돌리며 나루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다행히 나루는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궁금증보다는 며칠 뒤에 있을 행사에 관심이 쏠린 듯했다.
“규연이 말로는 맛있는 것도 많다고 했는데, 뭐가 있을까.”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바닥을 쓸던 나루가 몰래 엉덩이를 씰룩거렸다. 의도하지 않았는데 콧노래까지 술술 나왔다.
이런 나루와 달리 건후는 심란해 보였다. 어두워진 표정이 딱 우중충한 날씨와 비슷했다.
딸랑.
벌써 오픈 시간이 되었나. 가게 문이 힘차게 열렸다. 맑은 종소리에 습관적으로 고개를 들어 본 직원들이 환영 인사를 외쳤다.
“어서 오세요, 카페 데스티니입니다.”
“아, 형!”
직원들의 인사와 규연의 신경질 섞인 목소리가 겹쳐 들렸다.
홀을 쓸던 나루와 건후는 그 소리에 놀라 문 쪽을 바라보았다.
“가게가 그새 더 좋아졌네. 나루, 안녕.”
“안녕하세요!”
이 아침부터 누가 가게 문을 당당히 여나, 했더니 다름 아닌 규민이었다.
저번에는 규성이 집 드나들 듯 방문하더니, 이제 규민의 차례인가 보다.
가게 안을 흥미롭게 둘러보던 규민은 멀뚱히 서 있는 나루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어 줬다. 짧고 경쾌한 인사가 그다웠다.
나루 또한 힘찬 인사로 규민을 반겼다. 강아지처럼 달려가니 규민이 나루의 손에 들린 빗자루를 빼앗아 규연에게 넘겼다.
“내 선물은 잘 받았고?”
“네, 그런데 너무 비싼 것 같아서, 조금 죄송한…….”
“됐어, 그 정도는 돈 쓴 것도 아니니까 편하게 타고 다녀.”
규연은 두 뺨을 핑크빛으로 물들인 나루를 발견하고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나한테는 말도 막 하더니, 형한테는 내숭을 부린다 이거지. 송나루.
속마음이 그대로 눈빛에 담겨 쏘아졌다. 따가운 시선은 나루에게 닿자마자 통통, 튕겨 나갔다.
규민과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이어가며 얘기를 나누던 나루는 문득 무언가를 떠올렸다.
“귀 좀…….”
“귀여워, 나한테 무슨 말을 하려고.”
“그, 그게 그냥…….”
대놓고 말하기 애매한 사항이라 귓속말을 택했다. 나루가 발꿈치를 들고 입가를 가리자, 규민이 기꺼이 허리를 숙여 줬다.
그 꼴을 바라보다가 열받은 규연이 영수증 더미를 우악스럽게 구겼다.
“건후도 행사에 초대해 주시면 안 돼요?”
“……건후?”
소곤거리는 목소리에 규민이 시선을 돌리며 가게 안을 샅샅이 살폈다.
그러던 중, 허공에서 두 시선이 마주쳤다. 건후는 멋쩍은 듯 목을 긁적이며 걸어 나와 규민의 앞에 섰다.
“아, 규연이 형이 여기서 일할 수 있게 해 줘서요. 오랜만이네요, 형.”
“오랜만이다, 건후야. 못 본 사이에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네.”
건후의 붉은색 머리카락을 스치듯 만져 보던 규민이 평범한 인사말을 건넸다.
나루는 규민이 초대를 허락하길 기다렸다. 비록 첫인상은 사나웠지만, 지금은 누구보다 친절하고 인자한 사람으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잠시 뜸을 들이던 규민은 나루의 얼굴을 한 번 쳐다보고, 다시 건후를 빤히 응시했다.
“행사에 너도 참석해야지? 주요 기업들 모임인데, 같은 식구가 빠지면 섭섭하잖아.”
‘같은 식구’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건후를 은근히 위로한 그가 흔쾌히 초대를 권했다.
건후는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루 덕분에 손쉽게 행사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용건을 끝낸 규민은 건후의 어깨를 두어 번 토닥여 주고, 다시 나루와 규연에게 다가갔다.
“형도 디저트 하나만 포장해 줘.”
“알겠으니까 다음부터는 밖에서 만나.”
“왜 이리 까칠해. 나루야, 쟤 하는 행동 보면 우리 둘이 바람이라도 피운 줄 알겠다.”
규연이 일부러 까칠하게 굴면 굴수록 규민의 태도가 능글맞아졌다. 나루는 맞장구쳐 주듯 키득거리고 말았다.
그럴 때마다 규연의 매서운 눈빛이 날아들었다. 애정은 있어서 또 마냥 사납게 쳐다보지 못하는 게 웃겼다.
디저트를 직접 포장해 준 규연이 아메리카노까지 살뜰히 챙겨 건네줬다. 귀찮다, 싫다, 해도 오랜만에 본 형이 좋긴 한가 보다.
“나루 잘 챙겨서 와.”
“내가 알아서 해.”
“갈게. 나루, 형 간다.”
가게에 들어오던 순간부터 나루, 나루, 노래를 부르던 규민이 나갈 때까지 나루 타령을 했다.
질려버릴 지경에 이른 규연은 어서 나가라며 손을 작게 휘저었다.
“안녕히 가세요!”
“인사도 잘해, 애기.”
“애, 애기…….”
오글거리는 호칭을 아무렇지 않게 입에 담는 게 신기했다. 나루가 어버버거리는 사이, 규민이 긴 다리를 휘적이며 가게를 빠져나갔다.
아침부터 폭풍이 들이닥친 느낌이었다. 규연은 카운터에서 나와 나루의 손을 붙잡아 끌었다.
공과 사를 확실히 하자던 사람이 벌써 몇 번째 티를 내는 건지 모르겠다. 나루는 카페 뒤쪽까지 익숙하게 끌려왔다.
“형들 만난 후로 정신을 못 차려, 아주.”
“왜?”
“나는 눈에도 안 보이지.”
질투다. 이건 질투야.
속으로 웃음을 참던 나루가 일부러 우울한 표정을 꾸며냈다. 이러는 규연을 보니 괜히 놀려 주고 싶어졌다.
“규연이는 저런 말투 안 쓰잖아.”
“저런 말투라니.”
“다정하고, 으음, 간질간질하는.”
규연의 넋이 나가 버렸다. 혼이 빠져나간다는 게 이런 느낌인가, 싶었다.
나름 다정하게 대해 주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확실히 규민의 태도에 비하면 덜 다정하긴 했다.
아니, 덜 다정한 수준이 아니라 까칠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규연은 이제 막 한국으로 돌아온 제 형을 다시 외국으로 돌려보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 말투가 좋냐.”
“으음, 응.”
“애기 소리를 들어도 좋다고?”
“나 애기야.”
“크흡…….”
나루의 당당함에 웃음이 터졌다. 애기라니. 저런 말을 해놓고도 평온한 얼굴을 하는 게 제일 어이가 없었다.
규연은 황당해 미칠 지경인데, 나루는 정말 아무렇지 않았다.
사람으로는 성인 나이지만, 강아지일 땐 몸집이 또래보다 훨씬 작아서 애기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정한 것뿐인데, 규연이 왜 웃는 건지 도저히 파악할 수 없었다.
“왜 웃어?”
“아니야, 너 나 쳐다보지 마.”
“언제는 보라고 했으면서.”
얼굴을 보면 또 웃음이 터질까 봐 일부러 고개를 돌렸더니 나루가 삐쳐 버렸다.
입술을 쭉 내밀고 인상을 구기는 건 무조건 삐쳤다는 뜻이었다.
애써 웃음을 털어낸 규연은 나루를 품에 안고 아기 다루듯 부둥거려 줬다.
며칠 내내 형들에게 나루를 빼앗긴 느낌이었는데, 이렇게 안고 있으니 행복했다.
얘는 정말 능글거리는 게 좋은 건가.
온기 가득한 몸을 껴안고 있던 규연이 나루의 머리를 익숙하게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간질거리는 게 그렇게 좋다면야…….
“애기, 삐쳤어?”
“…….”
아 X발. 유규연 미친놈아. 방금 뭐라고 말한 거냐.
순간 분위기가 싸하게 굳어졌다.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있던 나루는 어깨를 한 번 움찔거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순간 규연은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창피함에 혀라도 깨물고 싶었다.
고개가 들리고, 나루의 얼굴이 서서히 드러났다.
좋아할까, 싫어할까.
이도 저도 아닌 미묘한 표정. 규연은 제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넘기며 말했다.
“잊어.”
“나 못 들었어, 또 해 줘.”
“뭐라는 거야, 다 들었으면서.”
“아니야, 진짜 못 들었어.”
나루는 모르는 척 눈을 댕그랗게 뜨고는 다시 한번 말해달라고 졸랐다.
입꼬리가 승천할 듯 씰룩거리는 게 거슬렸지만, 규연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누구 부탁인데, 또 해달라면 해 줘야지.
이번에는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다. 맨정신으로 그 오글거리는 호칭을 부르려니 속이 울렁거렸다.
“애, 기…….”
죽고 싶었다. 진심으로 죽고 싶었다. 하필이면 말까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푸핫…….”
젠장할.
멀쩡한 낯을 유지하던 나루가 금세 웃음을 터뜨렸다. 이건 규연이 원하는 반응이 아니었다.
아까 규민에게 그랬던 것처럼 두 뺨을 곱게 물들여 주길 바랐는데.
“프흡……!”
웃는다. 급하게 입을 틀어막아 가며 참으려고 애쓰는 모습이 보였으나, 튀어나오는 웃음은 어찌할 수 없었다.
규연의 두 눈썹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뒤늦게서야 웃음을 그친 나루 또한 규연과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한 번 더 듣고 싶다고 했으면서, 듣고 나니 정색하는 건 대체 뭐란 말인가.
나루는 그저 규연을 놀리고 싶었을 뿐이었다.
평소에는 걸려들지 않을 만한 장난이었지만, 질투심에 눈이 멀어 오글거리는 호칭까지 불러 준 게 마냥 재미있었다.
그와 동시에 이상한 감정이 들었다. 역시, 규연은 까칠해야 제맛이었다.
“느끼해.”
“이게 진짜, 송나루, 어딜 튀어.”
짧은 평을 남긴 나루가 호다닥, 카페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규연은 성질을 내며 나루의 뒤를 빠르게 쫓았다.
와중에 규연의 두 귀가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두 사람 전부 장난치는 초등학생 같았다. 연애 초창기의 커플답다고나 할까.
먹구름이 계속 밀려드는 하늘과 다르게 두 사람의 분위기는 꽃밭처럼 화사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