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빠진 외제차 한 대가 서 있었다. 평소에 보이지 않던 차인데 의아했다. 게다가 이건 규연이 새로 뽑은 차도 아니었다.
자세히 보니 안에 누군가가 타 있었다. 나루가 주변을 기웃거리니 남자가 시동을 끄고 내려 대뜸 차 키를 건네주었다.
나루는 얼떨결에 그 남자가 건네는 차 키를 손에 쥐었다. 이게 다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선물이라고 하셨습니다.”
“기어코…….”
남자는 규민의 개인 비서였다. 5년이나 함께 한 사람인지라 규연도 그의 얼굴을 잘 알고 있었다.
아까 손에 차 키를 쥐여 보낸다며 중얼거리더니, 그 사이에 차를 뽑아 보낸 모양이었다.
정작 나루는 운전 면허증도 없는 무면허자인데 말이다.
용건만 간단히 전한 남자는 미련 없이 뒤돌아 가 버렸다. 집 앞에는 규연과 나루, 그리고 흰색 오픈카만이 덩그러니 남았다.
“이거, 내 거야?”
“……어.”
“우와…….”
번쩍거리는 차를 손으로 조심스레 쓸어 보던 나루가 입을 벌렸다. 심지어 차에 박힌 로고가 규연의 것과 똑같았다.
문제는 나루가 운전을 할 줄 모른다는 거였지만, 규연이 있으니 괜찮았다.
“생일인가 봐…….”
나루는 오늘이 꼭 제 생일 같다고 느꼈다. 아니, 아무리 생일이라도 이렇게까지 과분한 선물을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냥 좋아하는 나루와 달리 규연은 인상을 가득 찌푸렸다. 차를 사 줬다는 건, 앞으로도 나루를 더 불러내겠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고 보니 식사 자리에서 행사 이야기를 들었던 거 같기도 하다.
주요 기업들이 처음으로 손잡고 기획한 대규모 프로젝트를 공개하고, 축하하는 자리라고 했다.
규민도 실은 이 행사 때문에 급히 한국으로 넘어온 거였다. 주목받고 있는 사항이기에 조금의 틈도 보여주지 않을 모양새였다.
규연은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혹시라도 규민이 나루를 그 행사에 데려오라고 하는 건 아닐까.
지잉.
별로 반갑지 않은 타이밍에 규연의 핸드폰이 진동을 울렸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규민의 메시지였다.
[22일에 나루 데리고 와]
이럴 줄 알았다. 규연은 말풍선 위에 박힌 글씨를 은근히 노려보았다.
나루에게 관심을 보이는 건 그렇다 쳐도, 이런 식이면 곤란했다.
행사에는 주 기업의 관계자들이 떼로 몰려든다. 그중 정상인은 극히 드물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그 행사에는 나루에게 손을 댔던 도건혁이 참석한다.
그런 장소에 나루를 데리고 가라니, 말도 안 됐다.
“나도 오래.”
“깜짝이야, 봤어…?”
“응, 나도 갈래.”
이럴 때만 행동이 재빠른 나루가 원망스러워졌다.
규연이 멍하니 서 있는 사이, 발꿈치를 들어 화면을 구경한 나루가 싱글벙글 웃었다.
어디에 데려오라는 건지 모르겠지만, 규민이 직접 초대해 주는 것 같아 기뻤다.
나루는 어서 오늘 있었던 일을 자랑하고 싶었다. 친구라고는 카페 사람들이 전부였으나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냥 누구라도 알아줬으면 했다.
내가 이렇게 좋은 사람들을 만나 행복해질 수 있었다는 것을.
* * *
창문 밖의 나무가 힘없이 흔들렸다. 하나둘씩 떨어져 가는 낙엽이 씁쓸함을 더해 주었다.
하늘까지 흐릿한데, 집 안의 분위기는 더 우중충했다.
건후는 조용히 일어나 발소리를 내지 않고 걸었다. 혼자 나가 있을 땐 어떻게 걸어도 괜찮았는데, 본가에서는 행동 하나하나를 조심해야만 했다.
이게 다 핏줄이 천한 탓이었다. 요즘 세상에 귀천이 어디 있냐 하겠지만, 이 집안에서는 분명히 존재했다.
“일이나 가야지.”
그나마 버틸 만한 건 일을 핑계로 나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가지도 못하게 했더라면 진즉 죽어 버렸을지도 모른다.
간단한 빵이라도 챙겨 나가기 위해 부엌으로 내려온 건후는 인기척에 발걸음을 멈췄다.
이 시간에는 늘 아무도 없었는데, 웬일인지 건혁이 부엌을 서성이는 중이었다.
“내 앞으로 와, 우리 얘기할 거 있잖아?”
“…….”
능글맞으면서도 비아냥거리는 말투가 오늘따라 무섭게 들려왔다.
두 사람 사이에서 오가야 하는 말이 뭐가 있을까. 속으로 생각하던 건후는 바로 나루를 떠올렸다.
그래, 카페 뒤에서 마주쳤을 때. 나루와 건혁이 묘한 시선을 주고받았었다.
건후가 가까이 다가가니 건혁이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여주며 다정한 척 겉을 꾸며냈다.
“규연이한테 빌붙어 지내길래 설마 설마 했는데, 그 새끼랑 잘 아는 것 같더라.”
“그게 무슨 말이야, 형.”
“송나루, 그 개새끼 말하는 거야.”
거친 언어를 우아한 목소리로 담아낸 그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건후는 그 표정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건혁이 저 정도로 싫어한다는 건, 언제 한번 심각한 일이 벌어졌었다는 건데 도저히 알 수 없었다.
건후는 일단 모르는 척, 나루와의 관계를 숨기고 봤다.
“그냥 같은 직원이라 아무것도 몰라. 규연이 형이랑 조금 친하다는 것 빼고는….”
의심받지 않으려고 적당히 말을 둘러대자, 건혁이 눈을 게슴츠레 떴다. 거짓말을 하는 건지 파악해 보려는 수작이었다.
건후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잠깐의 정적 후, 건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새끼가 어떤 짓을 벌이고 다녔는지 알아, 몰라.”
“그야, 나는 모르지.”
“의도적으로 유규연한테 붙어서 내 이미지 깎아내린 미친놈이야, 그거.”
실제 있었던 일과 전혀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건후도 그가 제 좋을 대로 돌려 말하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건혁은 규연에게 친구로서 내쳐진 후, 반쯤 미쳐 있었다. 겉으로는 제정신인 척 멀쩡히 돌아다녔지만, 속은 누구보다 시커멓게 썩어 있었다는 거다.
건후는 제 형을 이해할 수 없었다. 능력도 괜찮고, 돈 걱정도 없는 사람이 왜 그렇게 약한 인간을 괴롭히려 드는지. 안타까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런 소리를 입 밖으로 내었다가는 죽도록 맞거나, 압박이 가해질 수도 있었다.
건후가 억지로 이야기를 들어 주고 있으니 건혁이 끝도 없이 입을 놀렸다.
“그리고 너도 걔 지능 이상한 거 느꼈지. 그 정도면 어디 아픈 거야. 지적 장애 있는 거라고.”
“형, 그래도 그런 말은……!”
“더 신기한 얘기해 줘? 유규연, 정신 나가서 그 지적 장애 있는 새끼랑 사귀는 모양이더라.”
선을 넘어도 한참 넘었다. 멀쩡한 나루에게 아프다면서 지적 장애라는 말까지 막 사용하는 게 생각 없어 보였다.
건후는 주먹을 꽉 움켜쥐고 화를 참았다. 얼마나 힘을 주었으면 손이 바들바들 떨릴 정도였다.
“하, 미친놈.”
그 모습을 발견한 건혁이 코웃음을 쳤다. 작은 소리 하나에 힘이 쭉 풀렸다. 본능적으로 건혁에게 굴복하는 거였다.
콰장창!
들고 있던 컵을 싱크대에 던져 버린 건혁이 건후의 옆을 스쳐 지나가며 경고를 남겼다.
“곧 있을 행사에서 그 새끼한테 배로 되돌려줄 예정이니까 구경하러 와라.”
가슴이 쿵쿵 뛰었다. 심장이 바닥에 내리쳐진 느낌이었다.
건후는 황급히 손을 뻗었다. 그러나 건혁에게 닿지 못한 채 맥없이 떨어졌다.
이미 말릴 수 없을 정도까지 와 버린 듯했다. 건후는 건혁의 저 눈빛을 잘 알았다.
안광이 사라져서 탁해진 눈동자. 자신이 한참 건혁에게 괴롭힘당했을 때 보았던 눈이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손 놓고 바라볼 수만은 없었다.
나루는 제 친구였다. 조금 어리숙할지 몰라도, 그 누구보다 야무진 친구.
그리고, 힘들 때 늘 도움을 주던 규연의 소중한 사람이기도 했다.
현관에 걸터앉은 건후는 운동화 끈을 힘껏 조여 맸다.
송나루가 행사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막아 보자. 그것부터 해보자.
한숨이 터져 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아낸 그가 눈을 부릅뜨고 몸에 힘을 불어넣었다.
* * *
딸랑.
문이 열리고 경쾌한 종소리가 울렸다. 나루는 그 소리에 맞춰 발을 내디뎠다.
날씨는 흐리지만, 하루의 시작이 상쾌했다. 어제 과분한 대접을 받아서 오늘까지 그 기분이 이어지고 있었다.
“나루 씨, 왔어요? 좋은 아침.”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
직원들과 인사를 주고받은 나루는 곧바로 일할 준비를 마쳤다.
아침에 할 일은 생각보다 많았다. 테이블과 가게 외부 통창을 닦고, 발판도 예쁘게 다시 펴 놓고, 홀을 깨끗이 쓸어야 했다.
“오늘 일찍 왔네?”
“엉, 너 기분 좋아 보인다.”
“응, 나 기분 좋아. 왜 좋게.”
빗자루를 들고 왔는데 이미 구석에서 누군가가 홀을 대충 청소하는 중이었다.
넓은 등판에 눈에 띄는 붉은색 머리카락. 누가 봐도 건후였다.
나루는 반갑게 다가가 소소한 얘기를 늘어놓았다. 건후 또한 그런 나루를 받아 주며 얘기를 이어갔다.
“기분이 왜 좋은데.”
“나 어제 규연이네 형들 만났어.”
“아, 첫째 형?”
“응, 그리고 규민이 형도.”
“규민이 형이 한국에 왔어?”
오랜만에 듣는 이름에 내심 반가워하던 건후가 얼떨떨하게 웃으며 다시 청소를 시작했다. 주로 친하게 지내왔던 건 규연이지만, 옛날에는 둘째인 규민과도 심심치 않게 대화를 나누던 사이였기 때문이다. 규민은 규연과 달리 말투가 온화해서 어린 마음에 형을 바꾸고 싶다는 생각까지 해 본 적 있었다.
나루는 건후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어제 있었던 일을 자랑했다.
규민과 규성이 자신을 백화점에 데리고 가서 이것저것 사 주었다는 이야기는 기본이고, 차를 받았다며 방방 뛰기까지 했다.
건후는 일부러 더 오바를 떨어 가며 호응해 줬다.
“미친, 차를 사 줬다고? 대박이네.”
“대박이지? 그런데 면허가 없어서 큰일이야.”
“규연이 형이 있잖아. 운전 맡겨.”
“그래서 그러려고, 운전 면허증이라는 걸 따려면 얼마나 공부해야 해?”
잡담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건후는 가벼운 웃음기를 유지한 채 나루에게 친절히 대꾸해 줬다.
두 사람의 모습이 다정해 보였는지 카운터에서 매출을 확인하던 규연이 날카로운 눈빛을 쏘아 보냈다.
이제는 저 눈빛도 익숙해졌다. 나루는 규연의 시선을 무시하고 계속해서 잡담을 이어갔다.
“아, 그리고 또 나한테 무슨 행사에도 오라고 했어.”
“……뭐라고?”
“규연이는 안 가는 편이 좋다고 했는데, 그냥 가기로 했어.”
나루의 해맑은 말에 건후가 하던 행동을 멈췄다.
행사에 가기로 했다니.
어떻게든 말리고자 했는데, 나루는 이미 마음을 굳힌 것 같았다.
나루의 화사한 웃음에 건후의 마음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워졌다.
이 순간만큼은 건혁의 동생이라는 사실이 미치도록 싫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