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 라는 거…….”
“향수?”
“병이 예뻐서요.”
나루는 아까 백화점에서 얼핏 본 향수를 얘기했다.
유리로 제작된 듯한 투명한 병이 보석같이 예뻤는데, 내용물은 모르겠고 나루는 그냥 그 병이 가지고 싶었다. 규연은 문득 예전 일을 떠올렸다. 백화점에 갔을 때, 향수 코너에 정신이 팔려 눈을 떼지 못하던 나루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규민은 또다시 이마를 짚었다. 오밀조밀 입술을 움직이며 말하는 나루가 귀여워 보였기 때문이다.
규민과 규성, 두 사람은 어렸을 때부터 동생이 태어나길 간절히 바랐었다. 그래서인지 막내인 규연을 심하게 아꼈는데, 정작 막내가 막내답지 않아 늘 서운해했다.
규연은 사랑받는 막내였으나 애교가 부족한 편이었다. 생긴 것도 날카롭고, 키도 듬직하니 커서 동생이라는 느낌이 안 들었다.
하지만 나루는? 규민이 원하는 것처럼 작고 아담했다.
피부도 뽀얀 게 적당히 홍조가 돌아 복숭아 같았고, 동그란 머리통은 어쩜 이리 작은지 밤톨을 떠올리게끔 했다.
그런데 이런 애가 목소리까지 여리여리해서는 다 들어주고 싶게 말한다. 규민이 원하는 동생 그 자체였다.
처음 만났을 때 경계하던 것도 고양이 같아서 귀여웠고, 그런 애가 집 막내랑 사귄다니 예뻐 죽을 지경이었다.
“형들 지금 뭐 해, 얘 내 애인이야. 왜 본인들 것처럼 그러냐고.”
“네 애인 탐내는 게 아니라, 친동생 같아서 그래. 귀엽잖아.”
갑자기 이게 무슨 상황일까. 규연의 눈앞이 핑핑 돌았다.
규민이 눈에 띄게 당황하지 않는 걸 보니, 첫째인 규성이 언질을 준 듯했다.
그러니까, 규민은 한국으로 넘어올 때부터 나루를 만나 볼 생각이었던 거다. 우연치 않게 만나서 지금 더 들뜬 거고.
규민이 머리카락을 쓰다듬자 나루가 가만히 서서 머리를 내어줬다. 규연은 당황스러울지 몰라도, 나루는 이런 상황이 조금 익숙했다.
아기 시절, 강아지 상태로 지냈을 때였다.
시골 사람들은 모두 지나갈 때마다 나루를 한 번씩 쓰다듬고 지나갔다. 얼굴 한 번 못 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아이구, 털이 뽀얗다. 아가!’
‘오매? 요 눈 뜬 것 봐라, 아주 예뻐 죽겠네.’
‘엄마아, 강아지! 예뻐! 예뻐!’
사람의 손을 타는 건 좋았다. 다들 부드럽게 만져 주고, 질리도록 예쁘다고 말해 주니까.
아주 잠깐의 시간이었지만, 평생 기억에 남는 이유가 있었다.
아무튼 나루는 아기 때 느꼈던 그 감정을 다시 느끼는 중이었다. 규민이 꼭 그 시골 동네 주민처럼 자신을 예뻐해 주고 있었다.
“얘는 무슨 향이 어울리려나.”
“형이 얘한테 향수를 왜 사 줘.”
“갖고 싶다잖아.”
“사 줘도 내가 사 줘.”
옆에서 주접을 지켜보던 규연이 선을 그어 버렸다. 아무리 친형들이라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런 규연과 달리 나루는 뭐에 홀린 듯 규민의 뒤를 졸졸 쫓아가고 있었다.
정신 차리고 보니 규성과 규민 사이에 끼어서 예쁨을 잔뜩 받고 있었다.
규연은 그 꼴에 어이가 없어 눈을 지긋이 감아 버렸다. 자꾸만 입술 사이로 헛웃음이 튀어나온다.
“하, 하 참, 송나루 쟤는 또 왜…….”
애인이 버젓이 옆에 서 있는데 좋다고 다른 사람을 따라가는 게 은근 서운했다.
“내 차 타고 가게 나와. 멍하니 서 있기는.”
“아니, 형까지 왜 그래?”
“큼, 나와.”
규민이 들떠서 주접을 떨어대니 규성도 동참했다. 가장 단호하던 사람이 저러고 있으니 우스울 따름이었다.
아니, 저 형들 왜 저러는 거야. 송나루는 또 왜 장단 맞춰 주고 있는 건데?
어느새 규연은 소외당해 있었다. 솔직히 나루가 무섭다며 꼭 붙어올 줄 알았는데, 오히려 한술 더 떠서 황당했다.
“손 놔, 형. 잡지 마.”
“얘는 손도 작네.”
“송나루, 손가락에 힘 안 풀어?”
붙잡은 두 손을 억지로 떼어 놓은 규연이 인상을 구겼다. 와중에 나루가 잡고 있던 규민의 손을 놓지 않아서 미치는 줄 알았다.
형제가 다 죽거나 실종된 나루는 이런 관심이 좋았다. 진짜 형제가 된 기분이라 더 가까워지고 싶었다.
하지만 이런 마음을 규연이 알 리 없었다.
“안 풀어. 형 같아, 우리 형.”
“…….”
“가족 생긴 것 같아서 좋아.”
“그렇게 말하면 내가, 하…….”
나루는 직설적으로 제 기분을 전했다. 무덤덤한 어투에 말문이 막힌 규연이 더 말을 잇지 않았다.
가족이 생긴 것 같다니. 이렇게 말하는 애한테 떨어지라고 말할 수 있을까. 절대 불가능했다.
“그래, 편하게 형이라고 불러 봐.”
“…….”
“규민이 형, 해 봐.”
“규민이 혀, 형.”
“안 되겠다, 애기 손에 차 키라도 들려 보내야지.”
얼씨구, 이제 규연을 쏙 빼놓고 자신들만의 세계를 만들었다.
YK전자의 막내아들이 어느덧 나루로 바뀌어 있었다. 규연은 찬밥 신세였다.
규민은 나루를 ‘애기’라 칭하며 차라도 사 주겠다고 난리를 피웠다. 주책맞은 짓은 혼자 다 했다.
네 사람은 규민이 도맡아 관리하고 있는 지점까지 나란히 행차했다.
나루는 백화점으로 돌아온 것이 의아해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이 뒤로는 무어라 물어볼 새도 없이 시간이 정신없이 흘러갔다. 유 씨 형제들이 백화점을 누비고 다니며 나루의 손에 쇼핑백을 한가득 들렸다.
“이건 어때.”
“색이 귀엽네, 담아.”
“얘는 이런 걸 더 좋아해, 내가 알아서 고를 테니까 형들은 좀 가만히 있어.”
규민이 앞장서서 물건을 고르면, 규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꼴을 지켜보던 규연은 자신이 나루를 더 잘 안다는 듯 비아냥거렸고, 그 누구보다 진심으로 나루의 물건을 골라 담았다.
덕분에 나루는 할 일 없이 끌려다니기만 했다. 한 손에는 지하에서 산 빵이 들려 있었다.
규민이 칭찬했던 대로 빵의 맛이 꽤 괜찮았다. 가만히 앉아 빵을 찢어 먹던 나루는 문득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되어버린 거지.
분명, 처음에는 위기를 느꼈는데, 지금은, 음, 모르겠다.
나루는 발치에 치이는 쇼핑백들을 덤덤하게 쳐다봤다. 이 정도면 백화점을 전부 털어 온 수준이었다.
규연과 올 때도 이것과 비슷했는데, 그의 형들까지 더해지니 장난이 아니었다.
빵을 먹다 만 나루가 매장 안에 서 있는 세 명을 지긋이 쳐다봤다.
하나같이 키가 크고, 어깨도 딱 벌어져 있었다. 외모는 다 비슷하게 날카로운 듯 잘생겼지만, 음.
역시, 규연의 얼굴이 제일 잘생겼다. 나루의 눈에는 그랬다.
그때, 규연과 나루의 눈이 정통으로 마주쳤다. 그는 눈을 마주치자마자 걸어와 나루의 상태를 살폈다.
“피곤해?”
“아니, 안 피곤해. 규연아, 아아.”
“…….”
고개를 저으며 대답한 나루가 입을 벌리라며 아, 소리를 냈다. 그러자 잠시 망설이던 규연이 순순히 입을 벌려 줬다.
나루는 제가 먹던 빵을 조금 잘라 입에 넣어 주었다. 맛있는 건 무조건 규연에게도 주고 싶었다.
“맛있지.”
“어, 맛있네.”
“아까는 크레페 먹었어, 아이스크림이랑.”
“맛있는 거 많이 먹었네, 잘했어. 다음에는 나랑 둘이 가.”
모범 답안이었다. 나루는 홍조를 띠며 활짝 웃었다. 둘이 가자는 소리에 기분이 하늘 끝까지 치솟았다.
규민이 나루에게 선물할 옷을 고르는 동안 규성은 소파에 앉아 있었다.
잠시 일 전화를 받던 그는 구석에서 저들끼리 꽁냥거리고 있는 두 사람을 발견하고 피실, 웃었다.
귀여운 것들.
속으로 귀엽다고 생각한 규성이 조용히 규민의 팔을 잡아끌었다.
“어 형, 갑자기 뭐야.”
“이쯤하고 들어가자, 데이트할 시간은 줘야 할 거 아니야. 꼰대도 아니고.”
꼰대라는 말에 기겁하던 규민은 알겠다며 발걸음을 돌렸다. 인사를 하기 위해 두 사람 앞에 다가가니 규연이 벌써 경계를 했다.
“이번에는 또 무슨 말을 하려고.”
“형들 간다. 남은 시간은 둘이 데이트해.”
“실컷 방해해놓고.”
규민이 마지막까지 나루의 머리카락을 살살 쓰다듬었다. 부드럽고 포실포실한 머리카락이 강아지 같아서 귀여웠다.
간다는 말에 나루의 눈썹이 축 늘어졌다. 나름 아쉬웠던 모양이다.
그 표정에 사르르 녹아내린 규민이 무작정 나루의 핸드폰을 가져가 제 번호를 찍었다.
“자, 내 번호. 규연이가 못살게 굴면 형한테 전화해. 알겠지, 나루?”
“네…….”
“아무 때나 연락해. 심심하다고 하면 형이 드라이브 데리고 가 줄게. 맛있는 것도,”
“형, 작작 하고 가. 화내기 전에.”
“다음에 봐, 나루야.”
혼이 빠져나갈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이렇게 요란한 인사는 또 처음이었다. 그래도 이게 싫지만은 않았다.
시끌벅적했던 시간이 지나고, 다시 평소와 같은 텐션이 유지됐다.
규연은 드디어 둘만 남게 되었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막내라 그런지, 형들의 이런 관심이 좋다기보다는 더럽게 귀찮았다. 의도치 않게 나루까지 보여준 것 같아 더 싫었다.
“부럽다, 좋은 형이 있어서.”
“이제 내 형이 아니라 네 형 같은데.”
“그래도 돼?”
“가져, 웬만하면 돈만 뽑아먹고 버려. 그래도 되는 사람들이야.”
질린다는 표정을 짓던 규연이 현실적인 조언을 해 줬다. 제 친형이기에 할 수 있는 소리였다.
의미심장한 얼굴로 규연을 바라보던 나루는 주변을 조심스레 두리번거렸다.
사람이 조금 있긴 했는데, 이 근처는 비교적 한산했다. 그리고 다들 자기 쇼핑을 하느라 남에게 관심이 없어 보였다.
이때다!
나루가 힘껏 뛰어올라 규연의 상체를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잽싸게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
쪽, 하는 앙증맞은 소리가 둘 사이에 울렸다.
어안이 벙벙해진 규연이 눈을 두어 번 깜빡이다가 웃음을 흘렸다.
요망한 송나루. 귀여운 송나루. 사랑스러운 송나루.
사람들만 없었더라면 당장 나루의 두 뺨을 붙잡고 마음껏 입을 맞춰 줬을 것이다.
“규연아, 보고 싶었어.”
“…네가 날 보고 싶어 해서 다행이다. 아까 형이랑 부딪혔었다며, 처음에는 너한테 성질부렸을 텐데.”
다정하게 대꾸하던 규연이 나루의 몸을 이리저리 돌려 보며 상태를 살폈다.
그러자 나루가 아까 있었던 상황과 제가 느꼈던 감정을 폭포처럼 쏟아냈다.
“괜찮은데, 처음에는 무서웠어. 규민이 형이 너보다 더 화를 냈는데, 갑자기 괜찮아져서 나를 막 끌고 다니고.”
“그 형이 원래 좀 막무가내야, 다음에는 그러지 말라고 할게.”
“아니, 아니야. 지금은 잘해 주잖아.”
규연을 말리던 나루가 자연스레 입구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받은 쇼핑백이 하도 많아서 걸음이 자꾸 더뎌졌다.
규연은 나루의 손에 들린 쇼핑백을 모두 빼앗아 들었다. 무심한 다정함이 나루의 입꼬리를 올라가게 했다.
나루는 규연의 차를 타고 집까지 돌아왔다.
집 앞에서 내린 나루는 무언가를 목격하고 놀란 듯 입을 떡하니 벌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