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5화 (75/130)


방 안의 분위기가 어수선해졌다. 규연과 규성은 당황한 상태였고, 그들의 부모님으로 보이는 중년 여성과 남성은 서로 의미심장한 시선을 주고받는 중이었다.

그 사이에서 아무렇지 않게 웃고 있는 건 오직 남자뿐이었다.

“규민아, 옆에 계신 분은……?”

“인사하세요, 어머니. 제 애인이에요.”

폭탄이었다. 그것도 초대형급 폭탄.

너무 놀라 어깨가 크게 들썩였다. 나루는 남자의 팔을 황급히 떼어내고 두 손을 휘휘 저었다.

그러면서도 계속 규연의 눈치를 살폈다. 규연은 이게 다 무슨 소리냐며 남자를 미친놈 보듯 쳐다보았다.

“우리 둘째한테 애인이 생겼다니, 하, 하하…….”

“그, 그러게요. 이 무슨, 놀랐잖니.”

정적을 깬 중년 남성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자 옆에 앉아 있던 여성도 한마디 거들며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나저나 둘째라니. 이곳은 규연이 가족 모임을 한다고 했던 장소였다. 이 남자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이곳까지 도착했고, 그렇다는 건…….

이 사람이 규연의 둘째 형이라는 거였다.

“형, 미쳤어?”

“어이구, 우리 막내. 형한테 애인이 생겼다는데 미쳤냐니, 축하해 줘야지?”

까칠한 반응에도 능글맞게 대처하는 게 진짜 형 같았다. 보아하니 이런 식으로 많이 놀려 본 느낌이었다.

규연의 복잡스러운 눈빛이 나루에게 고스란히 닿았다.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인지 설명해 보라는 것 같았다.

이 상황을 어찌할 줄 모르고 손만 휘젓던 나루는 오해가 더 커지기 전에 나서기로 했다.

“그, 그런 거 아니에요. 제가 아이스크림을 옷에 묻혀서, 그래서, 밥 사라고 하시길래 어쩔 수 없이 따라온 건데, 그게…….”

눈동자가 어지럽게 흔들렸다. 규연을 한 번 보고, 규성을 보고, 나이 지긋하신 어른들을 보았다가, 또 이걸 반복하고.

가만히 앉아 지켜보던 규성은 이제야 이해됐다며 조용히 상황 정리를 시작했다.

“유규민, 오랜만에 와서 왜 또 막내를 놀려먹으려 그러냐. 부모님 더 당황하시기 전에 얌전히 앉아.”

단호한 어투에 방 분위기가 한 번 더 바뀌었다. 규민의 말을 그대로 믿고 있었던 부모님은 이제야 장난이라는 걸 알아챘다. 다행이었다.

반면, 규연의 얼굴은 뻣뻣하게 굳어 펴지지 않았다. 구겨진 인상이 오늘따라 더 험악해 보였다.

나루가 갈 곳을 잃은 채 발을 동동거리고 있자, 규민이 팔을 이끌어 자리에 앉혔다.

“형, 지금 뭐 하는 거야.”

“이 앞에서 친해졌거든, 같이 밥 먹는 거 괜찮지?”

“안 괜찮아.”

“왜 그래, 서운해하겠다.”

칼 같은 대답에 여우처럼 대꾸하던 규민이 나루의 머리카락을 두어 번 쓰다듬었다. 그러자 규연의 눈이 번뜩였다.

부모님이 계신 앞에서 대놓고 티를 낼 수도 없고, 미칠 노릇이었다.

규연의 몸이 들썩이며 움직일 때마다 규성이 허벅지를 꽉 잡아 눌러 줬다. 지금은 가만히 있으라는 무언가의 신호였다.

하여간 언제나 저 둘이 문제였다.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고양이와 쥐도 아니고, 허구한 날 투닥거리는 게 애들 같기도 했다.

그렇다 해도 항상 장난이 더 심한 건 규연이 아닌 규민 쪽이었다.

나루는 열받은 규연을 힐끔거리며 괜히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규성은 풀죽은 나루를 한 번 훑어보다가 무언가를 발견했다.

형제끼리의 우정을 다지자며 규민이 선물했었던 반지. 그 반지가 나루의 엄지에 끼워져 있었다.

저것 때문에 들켰나 보지.

드디어 상황 파악이 완벽히 끝났다. 어떠한 문제로 인해 두 사람이 우연히 부딪혔고, 눈썰미 좋은 규민이 나루의 반지를 발견하고 규연의 사람이라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직원들이 음식을 가지고 들어왔다.

테이블 위에 먹음직스러운 양식이 세팅되는 동안 방 안은 정적에 휩싸였다.

“즐거운 시간 보내십시오.”

나긋한 인사말과 함께 직원들이 물러났다. 하지만 정적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규민이랑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인데, 괜찮다면 같이 밥 먹고 가요.”

“네? 저, 저는…….”

“여기서 내쫓기도 미안하고, 우린 괜찮으니 천천히 식사해요.”

규연의 어머니는 무척이나 인자하고, 또 다정한 사람이었다.

가족 모임에 타인이 끼어들게 됐어도 온화하게 웃으며 음식을 내어줬다. 게다가 어리숙해 보이는 나루를 귀엽게 봐주기까지 했다.

얼떨결에 포크를 집어 든 나루는 눈칫밥을 먹기 시작했다. 집에 가고 싶은데, 규연이 이곳에 있어서 또 그러기는 싫었다.

“음, 규민이는 별 탈 없이 지냈니?”

“항상 똑같죠. 일하면서 놀 거 다 놀면서 지냈어요.”

“우리 집 애들은 어쩜 이리 노는 걸 좋아하는지. 어릴 때는 안 그러더니….”

입을 가리고 웃던 그녀가 슬쩍 규연을 쳐다봤다.

첫째인 규성의 관심사는 오로지 빈틈 없이 맡은 일을 해내는 것으로, 노는 것에는 전혀 흥미가 없었다.

반면, 둘째인 규민과 막내 규연은 노는 것에 환장했다.

규연은 요즘 나루 덕분에 노는 게 건전해졌지만, 규민은 예나 지금이나 화끈했다.

스프를 떠먹던 나루가 귀를 쫑긋 세웠다. 분위기가 불편하긴 해도, 규연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게 좋았다.

“규연이 너는 요즘 만나는 사람 없어? 예전에는 잘만 만나고 다녔잖아.”

“형, 일부러 그러는 거지.”

“에이, 궁금해서 그래.”

잠깐 조용하다 했더니, 규민이 또다시 규연의 성질을 살살 건드렸다.

다 알면서도 묻는 뉘앙스에 규연이 사납게 반응했다. 이런 둘 사이에 익숙해진 규성은 우아하게 고기를 써는 중이었다.

이 가족 은근 재미있어…….

샐러드에 박힌 훈제오리를 열심히 입에 넣던 나루가 생각했다. 처음에는 당황스러웠는데 대화를 듣다 보니 흥미로웠다.

자신과 있을 때와 가족과 있을 때의 규연이 모습이 확연히 달라서 신기하기도 했다.

“나루는 만나는 사람 있고?”

“아니요.”

“푸흡, 없어?”

“없는데요.”

“우리 규연이 어쩌나.”

규민이 일부러 나루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졌다. 차마 없다고 대답하지 못한 규연은 대충 말을 넘겼지만, 나루는 딱 잘라 아니라고 대답했다.

동시에 규연의 표정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배신당했다는 절망감에 무너진 표정이 무척 웃겼다.

규민은 그런 제 동생을 마음껏 귀여워했다. 작게 중얼거리며 속을 긁어 주니 매서운 눈빛이 날아들었다.

나루는 침착하게 대응했다며 홀로 뿌듯해하는 중이었다. 얌전한 손짓으로 음식을 듬뿍 떠먹고 있는 모습이 골때렸다.

“이제 슬슬 한국에 와서 백화점 돌아가는 것도 제대로 관리해야지.”

묵묵히 음식에 집중하던 중년 남성이 화제를 돌렸다. 그는 YK전자를 이끄는 회장이자 이들의 아버지인 유민성이었다.

유 회장의 말에 규민이 바로 대답했다.

“나름 잘 관리하고 있었는데, 다시 한국으로 오긴 해야 할 거 같아요. 우리 규연이가 경쟁사 백화점에 돌아다니더라고요.”

경쟁사 백화점. 규연은 지난날, 나루와 함께 갔던 백화점을 떠올렸다.

일부러 규민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그곳까지 간 건데, 어느새 소문을 들은 모양이었다.

유 회장이 규연을 나무라듯 쳐다보았다. 소중한 막내아들이라 함부로 꾸짖지는 못하고, 은근히 압박을 주었다.

규연은 짜증스러운 톤을 유지하며 대충 말을 둘러댔다.

“잠깐 일이 있어서 간 거야.”

“경쟁사 백화점에 무슨 일?”

“형, 나 뒷조사했어?”

“아니, 뒷조사는 무슨. 규연이가 거기서 직원들 붙잡고 남자를 찾았다는 그런, 읍.”

또 대형급 폭탄이 터질 뻔했다. 이번에는 나루가 규민의 입을 틀어막았다.

포크에 찍힌 샐러드가 규민의 입에 한가득 들어찼다.

급하게 입을 틀어막느라 자신의 포크로 먹여주기까지 한 나루는 뒤늦게 후회했다.

먹여주지는 말걸.

규연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시선이 포크에 고정되어 있는 걸 보니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다.

규민은 턱을 움직이며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막내를 놀리는 건 언제나 즐거웠다.

“남자?”

“아니야, 아빠. 그나저나 여기 음식 맛 별로다. 일찍 일어나는 게 좋겠는데.”

“역시 우리 규연이가 입맛이 까다로워서…….”

황급히 화제를 돌린 규연이 겨우 한숨 돌렸다. 이야기의 주제는 자연스레 규연의 입맛이나, 음식 평가로 넘어갔다.

그렇게 불편했던 식사 시간이 지나갔다.

나루는 어색하게 끼어서 밥을 얻어먹고 나왔다. 다행히 가족들이 친절히 대해 줘서 특별히 불편한 부분은 없었다.

“그럼, 우리는 먼저 집으로 들어가 볼게. 형제들끼리 오붓하게 시간 보내고 오련?”

“들어가세요, 어머니.”

“기회가 된다면 다음에 또 봐요.”

“아, 안녕히 가세요……!”

번듯하게 서 있는 형제들을 뿌듯하게 바라보던 그녀가 우아한 인사를 건넸다. 나루까지 챙겨주는 게 기품있어 보였다.

어영부영 인사까지 마친 나루는 멀뚱히 형제들 사이에 끼어 있었다.

그들의 부모님은 나란히 팔짱을 낀 채 이곳을 먼저 빠져나갔다.

분위기가 잠시 가라앉을 때 즈음 복도에 규연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렸다.

“형, 진심으로 미친 거야?”

“어때, 서프라이즈 선물 마음에 들었어?”

“쟤는 어떻게 만난 건데. 언제부터 알고 있었냐고, 어?”

규연이 세세히 따지고 들며 나루를 가리켰다. 규민은 제 동생이 화를 내거나 말거나 즐거워 보였다.

이런 게 진정한 형제구나. 부자인 규연의 가족 관계는 조금 다를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나루는 슬쩍 규성의 뒤로 가서 숨었다. 규연과 규민이 얼마나 서로 헐뜯고 싸워대는지 정신이 없었다.

“송나루, 이리 와. 왜 거기 가 있어.”

“싸우길래…….”

“안 싸워, 그러니까 내 옆으로 와.”

규성을 힐끔 노려보던 규연이 나루의 팔을 잡아끌어 제 옆자리에 데려다 놓았다.

그 모습에 두 명이 웃음을 눌러 참았다. 규민과 규성의 눈에는 그저 규연이 귀엽기만 할 뿐이었다.

아, 연애하는 동생이라니.

“귀엽게도 생겼다. 규연이 취향 바뀌었네?”

“하아, 걔 건들지 마.”

“나루야, 규연이가 잘해 줘?”

“…뭐? 나루? 형 지금 나루라고,”

“응? 대답해 봐, 나루야.”

규연의 말은 쥐뿔도 안 들리나 보다. 나루의 이름을 일부러 더 다정하게 부르던 규민이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다.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던 나루는 제 주머니에서 규연의 카드를 꺼내 조심스레 보여주었다.

“잘해 줘요. 오늘 저 놀라고 이것도 줬어요.”

“아, 미치겠다, 아, 귀여워라.”

“크흠, 흡…….”

나루가 내민 카드에 규민이 제 이마를 짚었다. 규성은 튀어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려고 헛기침까지 했다.

“뭐 또 갖고 싶은 거 있어? 말해 봐, 형들이랑 규연이가 다 사 줄게.”

처음 부딪혔을 땐 성질이 아주 더러워 보였는데, 갑자기 규민의 태도가 180도 달라졌다.

규연은 제 주책맞은 형을 보며 체념한 상태였다. 이런 일을 한두 번 겪은 게 아닌 모양이다.

잠시 망설이던 나루는 자그마한 목소리로 제가 원하는 것을 중얼거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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