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4화 (74/130)


소파 쿠션이 구름처럼 폭신했다. 하지만 나루의 기분은 이 소파처럼 말랑이지 않았다.

4백에 가까운 가격의 수트. 수중의 돈은 0원인데, 그렇다고 규연에게 전화를 걸기엔 너무 민폐였다.

이런 나루의 마음을 알긴 알까. 남자는 입은 수트 차림 그대로 나와 직원을 호출했다.

“이걸로. 더럽혀진 옷은 버려 줘요.”

“네, 알겠습니다.”

이런 곳에서도 곧장 입고 갈 수 있구나.

멍하니 그 장면을 바라보고 있는데 남자가 나루를 향해 손을 까딱였다.

어떡해, 나한테 계산하라는 건가 봐.

두근. 두근. 심장이 튀어나올 듯이 뛰어댔다. 나루는 무릎이라도 꿇고 빌 작정으로 가까이 다가섰다.

“저, 그게…….”

“계산해요.”

나루는 피가 마르는 기분을 느꼈다. 손이 본능적으로 주머니 속의 카드를 만지작거렸다.

규연이 카드…….

그래, 규연은 이걸로 집도 살 수 있다고 했다.

나루는 눈을 질끈 감은 채 카드를 내밀었다. 카드의 자태와 달리 내민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푸흡….”

남자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죽으러 가는 사람처럼 카드를 내미는 꼴이 서툴러 보였나 보다.

“집어넣어.”

“네?”

“내가 그 카드로 결제를 할 수는 없잖아.”

애매하게 말을 흘린 남자가 제 카드를 직원에게 건넸다. 결제는 순식간에 끝났다.

나루는 남자의 만류에 카드를 잽싸게 주머니 속으로 집어넣었다.

규연의 돈은 소중했다. 나루 본인을 위해 쓰는 거라면 몰라도, 이런 식으로 쓰이는 건 아까웠다.

남자는 그런 나루의 행동에 골때린다며 계속해서 웃음을 터뜨렸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루는 어서 이 백화점을 벗어나고 싶어졌다. 구경하는 건 좋지만, 남자와 함께 있는 게 불편했기 때문이다.

대놓고 불편하다는 티를 내는데,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 뜻대로 움직였다.

멍하게 끌려가던 나루는 눈치를 보며 잡힌 손을 빼내었다. 그러자 남자가 가던 길을 멈추고 나루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왜 그래.”

“아, 저기, 저는 이만 가 볼,”

“결제도 내가 했는데 그냥 가겠다는 건 아니겠지? 설마.”

아, 이 사람 생각보다 끈질기다.

나루는 할 말을 잃었다. 강적을 만난 기분이었다.

남자의 말에는 틀린 게 없었다. 아이스크림을 엎은 건 나루고, 나루는 아직 남자에게 보상을 하지 않았다.

이러려고 일부러 자기가 계산한 건가.

나루가 몰래 입술을 삐죽였다. 문득 규연이 보고 싶어졌다.

“밥이라도 한 끼 사 주는 걸로, 어때.”

“밥이요……?”

“가자.”

남자의 성격은 막 밀려드는 파도처럼 급했고, 동시에 시원했다. 규연이 확 타오르는 불이라면, 이 남자는 얼얼한 물 같았다.

어느새 정신을 차려 보니 남자에게 또 끌려가는 중이었다. 이번에는 밥을 먹으러 가는 모양이다.

나루는 남자가 비싼 걸 먹고 싶다고 하면 어쩌나, 계속 걱정했다.

규연의 돈으로 비싼 걸 사 먹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기뿐이어야만 했다.

“타, 여기서 좀 걸리니까.”

“싫어요!”

“왜 싫어, 차가 마음에 안 들어?”

저 남자의 머릿속은 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걸까.

검은색 외제차의 문을 열던 그가 나루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문제는 차가 아니었다.

나루는 남자를 심하게 경계했다. 여기까지 따라다닌 건 둘만 남겨진 공간이 아니어서였다.

하지만 차를 타게 되면 둘만 남게 된다. 저 남자가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른다는 거다.

나루가 눈썹을 좁히며 경계하는 사이, 남자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차와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는 듯했다.

나루는 운동화 끝으로 애꿎은 벽돌을 툭툭, 차며 도망갈 기회만 엿보았다.

“취향 한번 고급지네.”

“그런 거! 아닌데…….”

“아, 저기 온다.”

뭐가 온다는 거지.

남자의 눈길을 따라 시선을 돌린 나루는 굳어 버리고 말았다.

또라이…….

나루가 차에 타지 않는다는 이유 하나로 다른 차를 끌고 온 것이다.

흰색 스포츠카를 끌고 온 누군가가 운전석에서 내리고는 남자에게 차 키를 건네줬다.

어처구니없는 광경이었다. 이제 이 정도는 구분할 수 있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규연과 같은 부류인 듯했다.

게다가 이 차, 규연의 것과 디자인이 비슷했다. 안 보는 척 눈동자를 굴려 확인하니 로고가 똑같았다.

이 차가 흔한 건가…….

“이건 어때, 싫어?”

“아, 아니요.”

남자의 똘끼에 나루가 백기를 들었다. 이렇게까지 하는데 그냥 가서 얌전히 밥이나 사 주고 와야겠다.

조수석에 앉아 익숙하게 안전벨트를 맨 나루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 맞다.

규연에게 중간 메시지를 보내는 걸 깜빡했다. 철저하게 보내라고 당부한 적은 없었지만, 그냥 이 상황을 규연에게 알리고 싶었다.

나루는 남자의 눈치를 살피며 핸드폰을 꺼내 메시지를 전송했다.

[규연아 보고 시퍼]

급하게 쓰느라 맞춤법도 틀렸다. 재빨리 핸드폰을 집어넣으니 옆을 힐끔거리던 남자가 작게 웃었다.

아까부터 뭔가를 안다는 듯이 웃는데, 기분이 참 묘했다.

“걱정하지 마, 납치 안 해.”

“그런 생각 아, 안 했어요.”

“으음.”

너무 당황한 나머지 말을 더듬어 버렸다. 그런 생각을 안 하긴 무슨, 대답하는 지금도 하고 있었다.

나루의 말에 굳이 토를 달지 않은 남자가 차를 부드럽게 출발시켰다.

“……!”

부드럽게 나아갈 줄 알았는데, 남자가 갑자기 액셀을 세게 밟았다. 그러자 창문 밖으로 우우웅,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루는 머리 위에 있는 손잡이를 붙들었다. 일부러 이렇게 운전하는 건가, 싶어 옆을 돌아보았으나 남자는 진지해 보였다.

“왜 그렇게 봐, 내가 잘생겼나.”

은근한 시선을 느낀 그가 장난스레 물었다.

나루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대답이고 뭐고, 말이 나오지 않았다.

“속도 줄여 주세요…….”

“아, 내가 이 차만 끌면 신이 나서.”

“…….”

뒤늦게 나루의 표정을 파악한 그가 속도를 줄여 줬다. 그러니 한결 나았다.

쌩쌩 지나가던 건물들이 드디어 정상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나루는 잡았던 손잡이를 놓고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규연이는 운전 이렇게 안 하는데.

속으로 규연을 찾던 나루가 남자를 원망스럽게 힐끔거렸다.

“거의 다 왔어.”

남자의 말에 나루가 창밖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서울 중심가인 거 같은데 한적하고 고풍스러운 게 느낌이 무거웠다.

하필 골라도 왜 이런 곳을 고르는 거야. 나 돈 없는데!

악의 없이 엿을 먹이려는 남자의 행동이 얄미웠다.

멈출 줄 모르고 달려가던 차가 한 건물 앞에 천천히 멈춰 섰다. 나루는 고급스러운 외형에 놀라 눈을 질끈 감았다.

망했다. 여기서 먹으면 지갑이 다 털릴 거야…….

“도착했어, 내려.”

“…….”

“내려, 얼른.”

안 내리고 버티려니까 남자가 조수석 문을 대신 열어 줬다.

나루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표정으로 내렸다.

규연과 둘이 왔더라면 마냥 좋아했을 텐데, 상황이 이렇게 된 게 억울할 지경이었다.

양식을 취급하는 곳인가. 건물 외형부터 고급스럽더니, 내부는 더 호화스럽게 꾸며져 있었다.

먼저 들어간 남자는 직원과 무어라 대화를 나누더니 방을 안내받았다. 얻어먹는 입장이면서 제멋대로인 게 너무했다.

나루는 다급히 뛰어가 남자의 팔을 붙들었다. 자그마한 손이 두꺼운 팔목을 차마 다 감싸지 못한 채 파들거렸다.

“여, 여기는 비싸요. 다른 곳으로,”

“난 여기가 좋은데 어째.”

“안 되는데, 안 돼요.”

“된다니까.”

“안 돼…….”

남자가 팔에 나루를 매달고 한 걸음씩 옮겼다. 질질 끌려가던 나루는 있는 힘껏 고개를 휘저었다.

큰 키와 덩치에 비례하는 힘이었다. 나루가 도저히 당해낼 수 없었다는 거다.

안 된다, 안 돼! 무조건 막아야 해!

나루는 제 몸을 밀어붙여 남자를 벽으로 몰았다. 어쩌다 보니 자세가 이상해졌지만, 이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온몸으로 벽치기를 당한 남자는 재미있다는 듯 큭큭거렸다. 나루는 심각한데 웃고 있는 얼굴이 짜증 났다.

와중에 더 짜증 나는 건, 남자의 웃는 얼굴이 화려할 정도로 잘생겼다는 거였다.

나루는 빠져나가려는 정신을 꼭 붙잡고 제 뜻을 밝혔다.

“저 여기에서 밥 사 줄 만한 돈 없어요.”

“괜찮으니까 우선 들어가 봐.”

“돈이 없다니까요.”

“긴장하지 말고, 숨 똑바로 쉬고.”

흐읍, 하아아.

심호흡하던 나루가 입술을 벌벌 떨었다. 돈이 없다는데 자꾸 동문서답을 하는 남자가 죽도록 미웠다.

강아지를 쫓아가지 말걸. 아니, 아이스크림을 사지 말았어야 했어.

모든 상황을 되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남자는 나루가 진정될 때까지 기다려 주고는 어깨에 팔을 턱, 올려놓았다.

졸지에 스킨십까지 하게 된 나루는 모든 걸 포기한 채 몸을 축 늘어뜨렸다.

미안해, 규연아. 이 카드로 저 사람 밥 먹이게 생겼어. 내가 잘못한 건 맞지만, 그렇지만…….

자괴감에 빠져 있는데 남자가 위로하듯 어깨를 토닥여 줬다.

팔 무게가 꽤 나가는데, 이거나 좀 풀어줄 것이지.

몰래 남자를 째려보던 나루가 다시 늘어졌다. 그저 음식점일 뿐인데 복도는 또 왜 이리 긴지 모르겠다.

남자는 복도 제일 끝까지 걸어가 미닫이문을 열었다. 문을 여는 손길에 망설임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드륵.

나루는 남자의 발걸음에 맞춰 들어가야만 했다. 여전히 어깨에 남자의 손이 감겨 있었기 때문이다.

“저 왔어요.”

“……?”

남자는 다른 쪽 손을 올려 누군가에게 인사를 건넸다. 이 방에는 아무도 없어야 하는데, 뭔가 이상했다.

나루는 인기척이 느껴지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

그리고 그대로 혼이 빠져나가 버렸다.

믿기지 않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나루는 눈을 꾹 감았다 뜨길 반복했다.

현실이야, 현실, 인데…….

이게 정말 현실이 맞는 걸까. 내가 아직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니고……?

갈 곳을 잃은 눈동자가 다시 누군가에게 닿았다. 순간, 두 시선이 정확히 마주쳤다.

“송, 나루……?”

“규, 규…….”

규연. 유규연. 규연이었다. 오늘 나루가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유규연!

테이블 한쪽에 규연이 떡하니 앉아 있었다. 나루는 혼란스러운 상황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물론 규연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나루보다 더 당황스러워하는 게 눈에 띄게 티가 났다.

네가 왜 거기서 나와……?

그래, 딱 이런 눈빛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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