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3화 (73/130)


“어, 저, 그렇다면 저와 함께 공부하시면서 천천히 알아 가신다면…….”

“싫어.”

나루의 단호한 대처에 남자들의 말끝이 뚝뚝 잘려 나갔다. 두 사람은 저들끼리 눈빛을 주고받다가 인사도 없이 휙, 뒤돌아 가 버렸다.

홀로 남겨진 나루는 급히 뛰어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구경했다. 헐레벌떡 뛰어가는 게 묘하게 웃기면서도 추했다.

서울에는 이상한 사람들이 정말 많구나.

그래도 규연의 말투를 얼추 따라 해서 잘 쫓아낸 것 같아 뿌듯했다.

혼자 놀기의 시작이 꽤 괜찮았다. 나루는 신기한 건물이 보이는 족족 들어가서 안을 둘러보고 나오길 반복했다.

“여기는 카페, 여기는 돈가스 파는 음식점…….”

먹을 것도 많고, 구경할 만한 옷가게도 끊임없이 보였다. 꼭 거대한 백화점 같기도 했다.

나루는 우선 배부터 채우기로 했다. 가까운 크레페 가게에 들어가니 키오스크 하나가 반듯하게 서 있었다.

여기서 주문하는 건가?

주변 눈치를 보던 나루가 화면을 소심하게 터치했다.

-주문하시겠습니까?

“네…….”

작게 대답하며 버튼을 누르자 잘 정리된 메뉴가 나타났다. 신세계였다.

화면을 여러 번 눌러 보며 겨우 주문을 마친 나루가 테이블 한구석에 늘어지듯 앉았다.

주문 한 번 했을 뿐인데 벌써 힘들었다. 그래도 혼자 무언가 해냈다는 게 뿌듯해서 규연에게 메시지를 전송했다.

[나 이거 혼자 주문했다..]

찰칵.

키오스크와 사진도 한 장 찍어 보냈다. 나루가 메시지를 전송하자마자 말풍선 옆의 1이 빠르게 사라졌다.

[잘했네ㅋㅋ 모르는 거 생기면 전화해, 도와줄 테니까.]

나루를 귀여워하는 동시에 걱정해주는 게 딱 규연 다웠다.

“바나나 초코 크레페 나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직원의 우렁찬 목소리에 놀라던 나루가 크레페를 받아 들었다.

목소리를 저만큼 크게 해야 하는구나.

규연의 카페에서는 주로 진동벨을 이용하거나, 핸드폰으로 알림을 주는 방식이라 이렇게 소리쳐 본 적이 없었다.

나루는 새로운 방식을 터득했다. 언젠가는 꼭 카페에서 우렁찬 목소리를 내 보리라 다짐하기도 했다.

“맛있다…….”

크레페의 맛은 환상적이었다. 지나치게 달콤할 정도였으나, 이 기분과 화창한 날씨까지 더해지니 전혀 부담스럽지 않았다.

나루는 그 자리에서 크레페를 먹어 치우고 나와 다른 맛집을 찾아 나섰다.

크레페를 먹으니, 이제 시원한 게 당겼다. 시원한 아이스크림 같은 것.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나루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쳐 또 하나의 건물을 발견했다.

유난히 톤이 밝은 가게였다. 연분홍색 간판에 크림색 글씨가 쓰여 있는 게 무척이나 귀여웠다.

이곳은 아이스크림을 파는 가게였다. 망설임 없이 문을 열고 들어간 나루는 곧장 딸기 아이스크림부터 주문했다.

“맛있게 드세요.”

“감사합니다…….”

딸기 아이스크림까지 손에 쥐고 나니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아이스크림 먹으면서 돌아다녀야지.

부드러운 크림을 입에 부지런히 밀어 넣던 나루가 무언가를 발견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강아지……?

강아지 탈을 쓴 사람이 돌아다니며 전단지를 나눠 주고 있었다.

귀엽다!

뭐에 홀린 듯 뒤따라가는데 걸음이 어찌나 빠르던지, 따라잡기가 힘들었다.

나루는 설렁설렁 뛰기 시작했다. 가서 강아지의 손도 잡아 보고, 전단지도 받아내고 싶었다.

“강아지, 거기 좀 서라…….”

간절하게 중얼거리며 강아지를 뒤따라가고 있었을까.

퍽!

살랑이는 가짜 꼬리를 따라 코너를 돌던 나루가 누군가와 세게 부딪히고 말았다.

손에 들린 아이스크림은 어딘가로 사라진 지 오래였고, 몸은 찬 아스팔트 바닥에 맥없이 고꾸라졌다.

“아으…….”

눈을 깜빡이던 나루가 정신을 차리고 위를 쳐다봤다. 다행히 부딪힌 사람은 넘어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부딪혔던 몸이 제법 단단했던 것 같기도 했다. 그에 비해 나루의 몸은 종잇장 같았다.

“하아, 뭐 하는 새끼야. 부딪혔으면 일어나서 사과부터 해라, 어?”

이런, 심상치 않다, 했더니 성깔까지 있는 사람이었나 보다.

나루는 잽싸게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남자의 눈치를 보았다. 소심하게 움직이던 눈동자가 잠시 남자의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어…….

우락부락한 아저씨일 줄 알았는데, 생각하던 것과 정반대인 사람이었다.

날카로운 눈매에 날렵한 턱선, 어느 한 부분 못난 것 없이 잘생긴 사람이었다.

게다가 분위기가 뭐랄까, 규연과 조금 비슷하기도 했다.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나루는 사과부터 했다. 조심성 없이 부딪힌 건 오롯이 자신의 잘못이었다.

남자는 나루의 사과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제 옷을 털어내기 바빴다.

자세히 보니 남자의 말끔한 수트 재킷에 연분홍색 아이스크림이 묻어 있었다.

“허억……!”

나루는 기겁하며 입을 틀어막았다. 딱 봐도 비싸 보이는 옷인데 아이스크림까지 묻혀 버려서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제가 다, 닦아드릴게요.”

“손 치워, 그걸 또 옷으로 닦는 건 무슨…….”

옷소매를 끌어내려 남자의 옷을 닦아주려는데 손이 매정히 내쳐졌다.

핀잔을 늘어놓던 남자는 나루의 손가락을 보고 하던 말을 끝맺지 못했다.

뭐지,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어리둥절해진 나루가 미안하다는 듯 눈을 울망하게 떴다. 남자는 그런 것 따위에 관심이 없어 보였다.

시선이 나루의 손가락에 끈질기게도 따라붙었다. 정확히는 아침에 규연이 끼워 준 반지에 꽂혀 있었다.

“저, 제가 진짜 죄송해요. 앞을 못 봐서, 그래서…….”

“죄송하면 시간 좀 내 주지?”

“네?”

“이런 꼴로 어떻게 돌아다니라는 거야, 같이 옷이나 사러 가 줘요.”

방금까지만 해도 불같이 짜증을 내던 남자가 태도를 싹 바꿨다.

초면에 반말을 사용하며 싸가지 없게 구는 건 그대로였으나, 말투가 어딘가 능글맞아져 있었다.

나루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의 옷을 못 쓰게 망친 게 자신이었으니 어쩔 수 없이 따라야만 했다.

나루가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가 자연스럽게 어깨동무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루의 어깨에 본인의 팔을 걸쳐 놓은 수준이었다.

스윽.

나루는 바로 몸을 돌려 팔을 떼어냈다. 규연이 아닌 사람이 만지는 건 싫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붙어 왔다. 초면에 이 무슨 해괴한 짓일까.

“반지 예쁘네, 누구한테 선물이라도 받았나 봐요?”

눈짓으로 나루의 엄지손가락을 가리키던 그가 능청스레 물었다.

나루는 고개를 힘껏 끄덕였다. 규연에게 무언가 받았다는 걸 자랑하고 싶었는데, 드디어 자랑 대상이 생겨서 신이 났다.

“받았어요. 이거 제가 진짜 예쁘다고 했는데, 끼고 싶으면 그래도 된다 해서, 아, 그런데 호수가 커서 엄지에 했어요.”

짧은 엄지손가락을 두어 번 까딱여주던 나루가 헤실거리며 웃었다. 남자는 그 말에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키득거렸다.

내가 반지를 선물 받은 게 웃긴가.

원래 이런 반응이 아닌데. 막 부러워해야 하는 거 아닌가.

나루가 눈썹을 살짝 찌푸리자 남자가 고개를 저으며 변명했다.

“아, 한 번도 못 본 디자인이라 웃었네. 신경 쓰지 마.”

“…….”

“기분 나빴나?”

“저기, 제가 아이스크림 묻힌 건 죄송하지만, 왜 자꾸 반말하세요.”

조곤조곤 따지는 목소리가 야무졌다. 남자는 이번에도 나루를 보며 웃었다.

조금 다른 건, 아까처럼 키득거린 게 아니라 한쪽 입꼬리만 슬쩍 올려 조용히 웃었다는 거였다.

“몇 살이에요.”

“저는 스물하나…….”

“나랑 여덟 살 차이 나는데, 말 놓을까요?”

“네? 네…….”

왜 반말하냐니까 강제로 말을 놓게끔 했다. 어이없지만 뭐, 여덟 살 위인 사람이니 뭐라고 더 말을 덧붙일 수가 없었다.

그는 20대 후반치고는 동안이었다. 중반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의 외모였다.

염색한 듯한 갈색 머리카락은 반쯤 뒤로 넘어가 있어 스타일이 고급스러웠다.

날카로우면서도 시원스럽게 빠진 눈매나 높은 콧대가 특유의 분위기를 더 완벽하게 받쳐주고 있었다.

보면 볼수록 규연과 분위기가 비슷한 남자였다.

“단 음식을 좋아하나 봐.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네, 나루요. 송나루.”

“그래, 나루야.”

어라, 어쩌다 보니 이름까지 알려줬다.

이 남자, 사람을 꾀어내는 스킬이 보통이 아니었다.

나루의 손을 붙잡아 이끌던 남자는 큼지막한 건물 앞에 멈춰 섰다. 저번에 규연과 한 번 가 보았던 백화점보다 조금 더 큰 사이즈였다.

“여기 지하에 괜찮은 베이커리 브랜드가 하나 있는데, 취향에 맞을지 모르겠네.”

남자가 회전문을 통해 백화점 안으로 들어섰다. 나루는 잽싸게 그 뒤를 따라 걸었다.

그저 단 걸 좋아한다고 말했을 뿐인데, 베이커리 소개까지 해주다니. 사실 그리 나쁜 사람이 아닌 건가.

그나저나 백화점의 분위기가 이상했다. 남자가 들어가니 직원들이 다들 분주히 움직였다. 간혹 지나치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직원도 있었다.

여기는 고객에게 유독 깍듯한 곳이구나. 서울 백화점 최고…….

백화점은 언제 와도 신기했다. 확실히 바깥 가게들보다 품질이 뛰어난 게 많아서 좋았다.

남자는 익숙하게 걸음을 옮겨 남성 정장 브랜드 매장으로 들어섰다.

“사,”

“알아서 볼게요.”

“네, 알겠습니다. 필요한 것 있으시면 바로 말씀 주십시오.”

무언가 말하려던 직원이 우아한 걸음으로 멀어졌다. 남자는 직원을 물려 놓고 천천히 옷을 골랐다.

나루는 긴장해서 뻣뻣해진 몸으로 남자의 뒤를 졸졸 쫓아다녔다.

가격표라도 잠깐 볼까…….

‘3,980,000’

“히익…….”

도망치고 싶었다. 옷 한 벌에 거의 4백 돈이라니, 나루에게는 그만큼의 돈이 없었다. 어떻게든 물어 줘야 할 텐데, 큰일이었다.

나루의 표정이 울적하게 물들었다. 수트를 골라 탈의실에 들어간 남자는 말끔한 상태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와…….

감탄밖에 나오지 않았다. 수트의 가격은 소름 돋았지만, 막상 입고 나온 남자의 모습을 보니 입이 떡 벌어졌다.

키가 크고, 몸매가 딱 잡혀 있어서 수트 핏이 완벽했다. 꼭 규연이 수트를 입은 것처럼 말이다.

나루는 애써 눈을 돌린 채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정신 차리자, 송나루! 도망쳐야 해. 저 사람한테 미안하지만, 나는 수트를 사 줄 돈이 없으니까…….

남자는 전신거울을 바라보며 핏을 체크하기 바빴다. 기회는 이때였다.

마른침을 삼키던 나루가 그 틈을 노려 발을 힘차게 굴렀다.

“거기 가만히 앉아 있어.”

“…….”

그리고 대차게 망해 버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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