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도착해 차를 세운 규연은 내리기도 전에 나루를 끌어당겨 안았다. 어리둥절한 낯으로 안긴 나루는 동그란 눈을 끔뻑였다.
“수, 숨…….”
“다음에는 귀여운 척해도 안 봐줘.”
“귀여운 척……?”
나루는 규연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귀여운 척? 자신은 그런 짓을 한 적이 없었다.
아니라고 해명하려는데, 규연이 문을 열고 내렸다. 나루는 뒤따라 내려 후다닥 규연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주차를 감지한 엘리베이터가 자동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나루는 점차 줄어가는 숫자를 바라보며 발장난을 쳤다.
지잉. 지잉.
그때, 진동음이 여러 번 울렸다. 규연에게 전화가 온 모양이었다.
“아, 씨.”
화면을 확인한 그가 작게 욕을 중얼거렸다. 누구길래 욕까지 내뱉는 걸까. 나루가 관심 없는 척 귀를 활짝 열었다.
“어, 형.”
-말투가 그게 뭐야.
아, 이건 규성의 목소리였다. 반가운 목소리에 들뜬 나루가 전화하는 걸 빤히 구경하기 시작했다.
규연은 똥 씹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뭐가 그리 불만인지, 찌푸려진 눈썹이 쉬이 펴지지 않았다.
-내일 규민이 오니까 밥 먹으러 나와.
“왜 벌써 온대?”
-형한테 그게 무슨 태도야. 아무튼 부모님도 너 보고 싶어 하시니까 늦지 말고 나와. 알겠어, 모르겠어.
규성의 말투가 평소보다 더 단호했다. 규연은 짜증을 내면서도 알겠다며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짧은 전화였으나 내용은 꽤 흥미로웠다. 아, 물론 나루에게만 흥미로운 내용이었다.
규민. 규민. 모르는 이름이지만 어딘가 낯설지 않았다. 느낌상 규연의 형인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규연에게는 형이 둘이나 있었다.
첫째인 유규성과 둘째인 유규민.
규민은 한국에서 백화점도 운영하고, 동시에 해외 지사도 관리하느라 이리저리 바빠 얼굴 보기 힘든 존재였다.
형이 오는 게 기쁘지 않은 건가. 나루가 궁금하다는 듯 얼굴을 들이밀자 규연이 짧은 숨을 내뱉었다.
“내일 잠깐 좀 혼자 있어야겠다.”
“응?”
“가족끼리 약속이 생겨서.”
“아, 가족 약속…….”
나루는 아무렇지 않은데 괜히 규연이 미안하다는 얼굴을 했다. 나루 앞에서 가족 이야기를 꺼낸 게 미안한 모양이었다.
“나 그럼 놀러 나가도 돼?”
“뭐? 어디 가게. 너 혼자 어딜,”
“나 혼자 다닐 수 있어. 애 아니야.”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집에 들어갈 때까지 말을 아끼던 규연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루는 성인 남성이었고, 충분히 혼자 돌아다닐 수 있었다.
게다가 규연 본인은 약속에 나가면서 나루를 통제한다니. 상당히 이기적인 태도였다.
나루가 나간다고 해 봤자 서울 바닥일 것이다. 길을 잃어버리면 곧장 데리러 가면 그만이었다.
“놀다가 들어와. 내 카드로 맛있는 것도 사 먹고.”
“카드!”
“…….”
“카드!”
‘카드’라는 단어에 흥분한 나루가 손을 쭉 뻗었다. 어서 카드를 내놓으라는 뜻이었다.
규연은 잠깐 서운한 감정을 느꼈다. 예전에는 가족 모임에 나간다거나, 밖에 나간다고 하면 자기도 데려가 달라며 매달렸으면서. 이제는 카드만 반긴다 이건가.
“송나루, 내가 좋아, 내 카드가 좋아.”
“카드.”
“압수.”
“카드를 가지고 있는 규연이.”
존나 약아가지고.
위기 대처 능력이 가면 갈수록 는다. 나루는 일부러 예쁜 웃음을 지으며 두 손을 내밀었다.
결국, 규연의 블랙 카드가 손 위에 놓였다. 나루는 뺏어갈까 봐 카드를 잽싸게 제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TV 드라마에 보면 이걸로 사고 싶은 걸 다 사던데. 먹을 것도 사고. 집도 사고. 땅도 사고.
“내일 그걸로 뭐 할 거야.”
“아이스크림 사 먹고, 으음.”
“사 먹고?”
“집 사야지.”
부엌으로 들어와 물을 마시던 규연이 괴로운 기침을 내뱉었다. 나루의 엄청난 씀씀이에 사레가 걸린 듯했다.
아이스크림에서 어떻게 집으로 업그레이드될 수 있는 거지.
그나저나 나루의 머릿속이 궁금했다. 집을 산다는 생각이 어떻게 하다가 나온 걸까.
“갑자기 웬 집이야.”
“집은 못 사?”
“아니, 살 수는 있는데 왜 집이냐는 거지. 네 그 사고회로가 궁금해서.”
순수하게 물어보는데 미치는 줄 알았다. 규연은 웃음을 참아가며 물었다. 나루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티비에서 보면 다들 이걸로 집 사던데.”
“그래서, 너도 집이 사고 싶었어?”
“응.”
“집 사면 나랑 떨어져 살아야겠네.”
“…….”
어라, 이건 생각지도 못한 부분이었다.
나루의 눈이 댕그랗게 뜨였다. 집을 사는 건 좋지만, 규연과 떨어지기는 싫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던 나루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집은 필요 없는 거 같아.”
“왜, 집이 얼마나 중요한데.”
“……안 사. 너랑 살래.”
나 계속 데리고 살아 줄 거지?
규연을 닦달하는 듯한 눈빛이 오늘따라 초롱초롱한 게 맑아 보였다. 간식을 원할 때의 강아지 같았다.
“그래, 나랑 계속 살아야지.”
“응.”
아까는 시끄럽다면서 앙칼지게 굴더니, 이제는 또 순한 양처럼 군다.
규연은 나루의 머리카락을 거칠게 쓰다듬었다. 이러는 걸 볼 때마다 몸을 부서질 정도로 안아 주고 싶었다. 그런데 그럴 수 없으니 머리를 쓰다듬는 거였다.
아, 주말인데 이런 애인을 두고 가족을 만나러 가야 한다니.
주말에 데이트할 생각이었던 규연은 가족 모임을 원망했다.
“맛있는 거 있으면 잔뜩 사 와. 너 먹는 거 좋아하잖아.”
“그래도 돼?”
“어, 사고 싶은 것도 마음껏 사고.”
“아싸…….”
나루가 헤실거리며 웃었다. 혼자 놀러 나갈 생각에 가슴이 콩닥거렸다.
드디어 혼자서 이 세상을 구경하는구나!
신난 나루와 다르게 규연의 낯빛은 어두웠다.
애인이 그저 어린애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 * *
주말 아침이 밝았다. 날씨가 화창한 게 외출하기 딱 좋아 보였다.
일찌감치 일어난 나루는 시리얼을 타 먹고 깨끗하게 씻었다. 그리고 규연의 드레스룸에 들어가 옷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부산스러운 소리에 눈을 뜬 규연이 곧장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나루가 한 번 옷을 파헤치기 시작하면 답이 없을 정도로 어질러져서 빨리 말려야 했다.
“뭐 해, 송나루.”
“나 옷 골라!”
“아침부터 신이 나셨네, 우리 나루…….”
대답하는 목소리에 힘이 넘쳤다. 나루는 헹거를 열심히 뒤적이며 입을 옷을 찾았다.
크림색 상의에 짙은 베이지색 바지. 이거다.
옷을 고른 나루가 괜히 드레스룸 안을 돌아다녔다. 규연은 자연스레 그 뒤를 쫓아다니며 어지른 옷가지들을 정리했다.
“와…….”
나루가 걸음을 멈추고 유리관 안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유리관으로 된 보관함 안에는 규연의 시계와 악세사리가 가득 들어 있었다.
나루는 그중 하나에 시선이 꽂혀 있었다. 바로 반지였다. 심플한데 하얀 보석이 부담스럽지 않게 박혀 있어서 무척이나 예뻤다.
“아, 그거.”
“이거 진짜 예쁘다…….”
“마음에 들면 끼고 나가.”
“이거 비싼 거잖아.”
“상관 없어.”
규연은 흔쾌히 자신의 반지를 내어주었다. 호수가 맞지 않아 잃어버리기 쉽겠지만, 대충 엄지손가락에 끼워 놓으면 될 듯했다.
나루는 제 엄지에 끼워진 반지를 보며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런데 이런 건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맞추는 거 아니야?”
그러기도 잠시, TV에서 본 내용을 떠올리던 나루가 눈을 매섭게 부라렸다.
졸지에 의심받게 된 규연은 황급히 손을 휘저었다.
“그거 둘째 형이 뭐 형제의 의리라나 뭐라나 하면서 준 거야. 안 끼니까 마음에 들면 가져.”
“형이……?”
형제 사이에서 이런 반지도 선물하는구나. 나루는 문득 규연이 부러워졌다.
이렇게 선물을 주고받을 정도로 각별한 형제 사이라니. 뭔가 멋졌다.
옷을 갈아입고 나온 나루는 신나서 방방 뛰었다.
엄지에 끼운 반지도 예쁘고, 날씨도 좋고, 규연의 까만 카드까지 있으니 뭔들 안 좋을까.
규연의 가족 모임 약속은 점심에 잡혀 있었다. 나루는 아침을 먹으면서 시간이 빨리 지나길 바랐다.
“송나루, 나 보고 싶으면 전화해.”
“응, 알겠어!”
“전화할 거야?”
“아니.”
돌아오는 대답이 쓸데없이 칼 같았다. 규연은 기대하지도 않았다며 이마를 짚었다.
오후 열두 시.
준비를 마친 규연이 옷매무새를 정돈하며 현관 앞으로 나왔다. 나루는 이미 신발을 다 신은 후였다.
나 없이 나가는 게 저렇게나 좋을까.
어제와 같이 서운한 마음이 들었지만, 나루가 잘 놀고 왔으면 했다.
“타.”
“근처에 내려 주는 거야?”
“응, 거기 볼 거 많으니까 괜찮을 거야.”
차를 끌고 나온 규연이 나루를 태워 줬다. 중간에 내려 주고 약속에 나갈 모양이었다.
나루는 차가 도로 위를 달리는 동안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오늘따라 길거리에 사람이 많았다. 주말이라 그런지 다들 나들이를 나온 듯했다.
“잘 놀다 와, 중간에 연락하고.”
“왜?”
“걱정되니까.”
“응, 그럼 연락할게!”
힘껏 대답한 나루가 서둘러 문을 열고 내렸다. 신났다는 게 온몸에서 티가 났다.
창문을 향해 손을 흔들어 준 나루가 거침없이 뒤돌아 갔다.
그 자리에 한참 서 있던 규연의 차는 뒤늦게서야 출발했다.
나루는 큼지막한 빌딩들을 보며 감탄했다.
대학가 근처에 내려 줘서 그런지 입구부터 신기한 게 한가득했다.
캐릭터 샵도 있고, 큼지막한 카페도 있고, 지하철역도 있어서 사람들이 개미 떼처럼 움직이는 게 다 보였다.
나루는 무작정 발걸음을 옮기며 주변을 탐색했다. 마음에 드는 곳이 보이면 들어가 볼 생각이었다.
그렇게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어깨를 두드렸다.
톡톡.
뒤를 돌아본 나루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밝은색 셔츠에 단정한 바지를 입고, 뿔테 안경까지 갖춰 쓴 남자 두 명이 인위적인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저요……?”
“잠깐 말씀 좀 나눌 수 있을까요.”
뭐지, 나루는 이런 사람들을 몰랐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나루를 잘 안다는 듯 행동하고 있었다.
경계하며 한 발자국 멀어지니 저쪽에서 두 발자국 더 다가왔다.
“혹시, 아기 동자님을 아실까요.”
“…….”
헛소리였다. 말씀 좀 나눌 수 있냐고 묻더니, 늘어놓는 게 죄다 헛소리였다.
나루는 규연이었다면 어떻게 대처했을지 곰곰이 고민했다.
서울에는 생각보다 이상한 사람들이 많다고 했는데, 이 사람들이 그 사람들인 것 같고, 그렇다면 나는 대응해야 하고…….
이럴 때의 규연이라면…….
“몰라, X발.”
표정을 굳힌 나루가 쌍욕을 뱉었다. 얼굴과 정반대되는 말투에 당황한 그들이 어깨를 움찔 떨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