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규연이한테 얘기 못 하게 해?”
나루가 집요하게 물었다. 건후는 어쩔 수 없이 대답해야만 했다.
그가 나루의 몸을 구석진 곳으로 잡아끌었다. 얌전히 잡혀 가 준 나루는 어서 이유를 설명하라며 쳐다봤다.
“규연이 형이 저 인간 안 좋아하잖아. 말하면 형 화내.”
이유가 꽤 간단했다. 나루는 건후의 말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뭐, 규연과 건혁의 사이가 틀어진 건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 뒤로 이어진 말은 믿기 어려웠다.
규연이가 화를 낸다고?
나루가 아는 규연은 화를 잘 내지 않았다.
물론 규연이 화를 냈어도 나루가 요리조리 피해 가거나, 화를 낸 줄도 몰랐던 게 대부분이었다.
“규연이 화 안 내.”
“안 내긴, 규연이 형 화나면 얼마나 무서운지 아냐? 와, 나 생각도 하기 싫어.”
무언가 떠올려 보던 건후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상상만으로도 무서운 모양이었다.
나루는 자신이 모르는 규연이 있다는 생각에 흥미를 느꼈다.
화난 규연이는 어떨까. 보아하니 건후는 한 번 겪어 본 듯했다.
“왜? 난 몰라, 규연이 무서워?”
“말도 마라.”
“왜? 말해줘, 나도 알고 싶어.”
나루의 호기심 신호등에 초록색 불이 반짝 들어왔다. 다른 건 다 모르겠고, 규연이 화났을 때 어떻게 행동하는지가 제일 궁금했다.
건후가 주춤거렸다. 굳이 이야기를 꺼내고 싶지 않았는데, 나루의 집요한 시선에 입이 억지로 떨어졌다.
“이거 형한테 비밀로 하면.”
“응, 말 안 해.”
“약속해.”
“안 말한다니까.”
나루가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비장한 표정에 손가락을 걸어 준 건후가 한숨을 내쉬었다.
머릿속에 여러 일이 떠올랐다. 그중 가장 강렬하게 기억나는 건, HMN 엔터테인먼트 막내아들의 개인 생일 파티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예전에 누가 규연이 형을 의도적으로 곤란에 빠뜨린 적이 있었거든.”
규연은 그 파티에 억지로 참석했었다. 형인 규성이 다녀오라며 등을 떠밀었기 때문이었다.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은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걸 깨닫고 근처에 다가가지 않았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발생한다. YK와 라이벌 관계인 천해기업의 둘째가 규연을 살살 긁어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일부러 사람이 많은 곳에서 신경을 긁자, 규연은 곧바로 반응하며 성질을 부렸다.
당연히 사람들의 시선은 규연에게 쏠렸고, 그날 주인공이었던 HNM의 막내아들은 처참히 묻혀 버렸다.
HNM의 막내아들은 유독 사랑받고 자라 어린아이 같았는데, 이 일로 화가 나서 대표인 아버지에게 찾아가 난동을 피웠다.
나이가 지긋한 대표는 막내아들의 투정에 직접 규성에게 전화를 연결했다.
그 뒤는? 안 봐도 뻔했다. 대놓고 화를 내지는 못했지만, HNM 대표는 돌려 돌려 주의를 주며 규성을 끈질기게도 괴롭혔다.
규성의 화는 자연스레 규연에게로 향했다.
“그래서?”
“규연이 형이 따로 파티를 열었어.”
규성의 잔소리에 폭발한 규연은 곧장 파티를 열었다. 이유 없이 열린 파티였으나 사람들이 꽤 많이 몰려들었다.
당연했다. YK전자의 막내아들이 직접 여는 파티인데 참가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참석 명단엔 천해기업의 둘째도 있었다. 규연의 먹이가 스스로 거미줄에 기어 들어온 것이었다.
이날, 규연은 그에게 제대로 된 수치심을 느끼게 해주었다.
“…손 한번 안 올렸는데 애가 바짝 얼더라니까. 잘못했다고 무릎으로 기며 싹싹 비는데도 눈 한번 깜짝 안 하는데…. 네가 그 모습을 봤어야 해.”
나루는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뭘 어떻게 했다고? 규연이가?
말도 안 됐다. 규연이 아무리 싸가지 없다고 하나 그렇게 경우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나루가 인상을 찌푸리자 건후가 이럴 줄 알았다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무튼, 그랬다고. 여기서 더 얘기 안 할게.”
“…….”
“지금이야 성격 많이 죽었지. 예전에는 말도 아니었어. YK 사람이라 아무도 못 건드리니까, 못할 게 뭐 있겠냐.”
건후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규연은 YK의 핏줄이었기에 뭘 해도 용서받았다.
아니, 용서받는다는 말도 어울리지 않았다. 규연에게는 모든 일을 덮을 수 있는 힘이 있었다.
나루는 충격이었다. 규연의 성격이 세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규연이 자신을 받아 준 게 신기했다. 뒷담화까지 했다고 오해받았는데, 밥도 주고, 잘 곳도 마련해 주고…….
정말 규연이는 천사가 맞구나. 나한테만 천사.
뿌듯하면서도 무서웠다. 나루는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규연이 차 안에서 과자 부스러기를 흘리지 말라고 했는데 맘 편히 부스러기를 흩날리던 자신의 모습.
“규연이는 착해, 진짜 착해.”
“어, 뭐, 겉은 좀 까칠해도 속은 착한 형이지.”
그러니까, 예전이었으면 내가 과자 부스러기를 흘렸을 때 쌍욕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거잖아?
나루가 바삐 움직이는 규연을 바라보며 두 손을 모았다.
몇 년 사이에 규연이의 성질이 죽어서 다행이다. 앞으로도 쭉 죽어 있길.
고개를 돌리다가 나루와 눈이 마주친 규연이 인상을 확 찌푸렸다. 뭐하고 서 있냐며 눈치를 주는 거였다.
음, 으음…….
아직 무서울지도.
시선을 피한 나루가 괜히 일하는 척 손을 움직였다. 역시, 저 까칠한 눈매는 언제 봐도 쫄아들 만했다.
익숙해져서 여태 못 느끼고 있었는데, 규연의 첫인상은 무척 거칠었다.
까칠한 말투는 기본이고, 쌍욕도 서슴없이 했다. 뭐, 하는 행동은 오묘하게 다정하긴 했지만.
아무튼 현재와 비교해보면 많이 거칠긴 했다.
나루는 문득 예전의 규연이 더 궁금해졌다. 무섭긴 한데, 이상하게 겪어 보고 싶었다.
이건 무슨 마음이지.
“송나루, 또 설렁설렁 놀지.”
“일합니다!”
규연의 말에 재깍 대답한 나루가 허겁지겁 움직였다. 속으로는 온통 예전의 규연 생각뿐이었다.
궁금하다. 예전의 무섭던 규연이.
* * *
일을 반복하다 보면 시간이 금세 흘러갔다. 손님에게 잘 포장된 쇼핑백을 건넨 나루는 시계를 확인하고 앞치마를 풀었다.
오후 세 시. 나루의 퇴근 시간이자 규연의 퇴근 시간이었다.
“가자.”
“안녕히 계세요!”
차 키를 들고 손장난을 치던 규연이 가자며 고갯짓했다. 나루는 허리를 꺾어 인사하고 그 뒤를 따라 나왔다.
카페 옆 주차장에는 규연의 스포츠카가 세워져 있었다. 늘 이 차 근처에만 주차가 되어 있지 않아서 탈 때마다 편했다.
조수석을 활짝 열고 탄 나루가 황급히 시트를 털어냈다. 이미 털어낸 듯 시트 위가 깔끔했지만, 그래도 일단 털어놓고 봤다.
운전석에 오르던 규연이 그 모습을 발견하고 코웃음을 쳤다.
“평소에는 신경도 안 쓰더니, 왜 갑자기 안 하던 짓이야.”
“어? 이런 거 싫어하니까…….”
엉덩이를 조심스레 붙여 앉던 나루가 규연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건후에게서 그런 이야기를 듣고 나니 묘하게 규연이 달라 보였다.
날카로운 눈매도 그렇고, 오똑 선 콧날도, 입도, 그냥 다 매서웠다. 뛰어나게 잘생겼지만, 그걸 떠나 꽤나 차가운 인상이었다.
“너 아까 도건후한테 무슨 말 들었어.”
“응?”
“아까 둘이서 쑥덕거렸잖아.”
“그게, 그냥 규연이 옛날이야기를 들었는데.”
옛날이야기라는 말에 규연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본인도 과거가 영 좋지 않다는 걸 아는 눈치였다.
차가 출발해서 다행이었다. 만약 액셀을 밟지 않았다면, 그 자리에서 나루의 두 어깨를 붙잡고 자세히 캐물었을 것이다.
나루는 규연이 운전하고 있다는 것에 안심하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화나면 무섭다고 해서.”
“뭐가 무서워.”
“그게, 화났을 때 하는 행동이…….”
“행동이?”
“싸가지 없어서 무서워…….”
싸가지 없다는 말은 또 어디서 배운 걸까. 수도 없이 많이 들어본 말인데, 이상하게 나루에게 들으니 기분이 묘했다.
규연은 황당한 듯 입을 벌리고 나루를 응시했다. 차분한 미성의 목소리로 싸가지가 없어서 무서웠다니.
가만 생각해 보니 어이가 없었다. 누가 누구한테 싸가지 없다고 말하는 건지.
마침 사거리에서 신호가 걸렸다. 규연은 곧장 조수석을 돌아보며 말했다.
“누가 누구 보고 싸가지 없다고.”
“왜?”
“네가 나보다 더해, 송나루.”
“아니거든.”
나루가 눈썹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규연에게는 싸가지 없다며 잘도 말해 놓고, 본인이 들으니 기분이 나쁜 모양이었다.
갑자기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갔다. 규연을 무서워하며 눈치를 보던 나루가 눈을 부릅뜨고 덤볐다.
신호가 다시 초록색 불로 바뀌었다. 규연은 헛웃음을 뱉으며 액셀을 밟았다. 전보다 속도가 더 올라 있었다.
“솔직히 까놓고 봐서, 네가 나 엿 먹인 게 많았지. 내가 너 엿 먹인 적 있냐.”
“…….”
“봐, 없,”
“나 두고 갔잖아. 백화점에서.”
가만히 눈을 굴리던 나루가 억지를 피웠다. 규연의 말이 틀리지 않아서 반박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규연은 어이가 없다 못해 억울할 지경이었다.
내가 백화점에서 송나루를 두고 갔다고?
말도 안 됐다. 그때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정신없이 돌아다니면서 나루를 찾아다녔는데, 두고 갔다니.
“네가 생각해도 억지스럽지 않냐.”
“…….”
“맞지.”
“…….”
나루가 입을 싹 닫았다. 본인이 불리한 상황에서는 무조건 입부터 닫고 보는 게 아주 약아 빠졌다.
규연은 그 모습이 웃겨서 일부러 말을 시켰다.
“송나루, 왜 대답 안 해.”
“…….”
“네가 불리할 때만 입 닫을래?”
“유규연, 시끄러워.”
유규연, 시끄러워.
유규연, 시끄러워.
유규연, 시끄…….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다.
어안이 벙벙해진 규연은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의지와 다르게 나루의 말대로 입이 꾹 다물려졌다.
순간 차 안에 정적이 돌았다. 나루는 만족스럽다는 듯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고개를 돌려서 몰래 웃었지만, 규연은 똑똑히 목격했다.
조수석 창문으로 장난스러운 나루의 얼굴이 다 비쳐 보였다.
저걸 진짜 어떻게 하면 좋지.
핸들을 돌리며 나루를 힐끔거리던 규연이 대뜸 웃음을 터뜨렸다.
아 분명 얄미운데, 얄미워 죽겠는데, 호구처럼 웃음이 삐질삐질 나왔다.
“그래, 시끄럽다는데 닥쳐 줘야지. 누구 말씀인데.”
“나루 말씀.”
앙큼한 대꾸에 규연은 그만 정신을 잃을 뻔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